나를 지켜줘, 빨강 볼펜

제트스트림 0.5

by 나로살다

네,

결국은 이 볼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시리즈를 썼습니다.


내가 문구광이라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항상 위대하고 찬란한 것으로부터만 힘을 얻는 것은 아니잖아요.

공기 한 자락, 보리차의 구수한 끝 맛,

이런 것으로도

오늘 한 발짝 나아갈 만큼의 힘이 생기지 않나요?


저는 그게 볼펜이었던겁니다.




둘째 아이가 돌을 갓 지났을 때

뇌종양 판정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뇌 수술을 했고

악성 종양이라서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시무시한 단어들이네요.

뇌종양, 악성, 항암치료.


무너지지 않으려고 정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항암치료, 라는 것이

참 어렵고, 복잡하고, 그리고 길더라구요.

두 살도 안된 아기가 감당하기에는 정말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어요.


뇌 수술이 가장 큰 사건이었지만

수술시간 4시간에, 회복 일주일 (다행히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항암치료는

10개월.

300일.


애를 애를 쓰고

이것만 넘자! 하고 마음을 다잡는 일도

300일이라는 긴 일정 앞에서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작심삼일이잖아요.

어떻게 작심삼백일을 하란 말입니까?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교수님께서 부모교육을 하신다고 해서

한 평 정도 되는 골방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 무슨 말을 할까.

- 또 무슨 안 좋은 소식이 있을까.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다물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 은우는 수모세포종이라는 병입니다.


교수님은 A4 용지를 테이블 위에 놓으시더니

가운 윗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종이 왼쪽 상단에 '수모세포종' 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병은 어떤 병이고, 항암제에 반응이 있는 것으로 검증되어서 항암치료를 시작합니다.

치료 성적과 생존율, 10개월간의 치료 스케줄, 그리고 발생가능한 부작용까지.


마치 정말 강의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이런 강의를 수백 수천번은 해오신 모양으로

한마디도 막힘없이 술술술술 설명을 이어나가셨어요.

설명과 함께 글씨와 그래프도 술술술술 써나가셨습니다.

어느새 A4 반페이지가 가득찼을 무렵, 교수님은 가운데에 가로줄을 죽 그으셨습니다.


- 여기까지의 얘기는 다 의미없는 얘기에요.

- ??????


시선을 아래로 하시고 적기만 하시던 교수님은

저와 남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씀하셨어요.


-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얘깁니다.

아이가 잘못되고 건강해지고는 이제부터에 달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

치료 계획에 대한 설명이 의미가 없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뒷골이 서늘해졌습니다.


- 이제부터 감염관리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병원에서 치료하는 시간과, 집에서 있는 시간 중 어디가 더 길죠?

집에서 엄마가 어떻게 아이를 관리해주느냐에 따라서 치료의 결과가 완전히 바뀝니다.


항암제로 인해 면역력이 바닥인 아이가

다양한 외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매시각 주의하여 관리해주어야 하고,

감염되었을 경우 이를 즉시 파악하여

응급실에 데려와야 한다는 주의사항이었어요.


- 아이가 다시 건강해지면 좋겠다, 라는 바램이 누구나 어떤 부모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부자가 되고싶다' 라는 것과 같은 겁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죠.

그런데 실제로 되는 사람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저축을 하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아이가 건강해지려면 부모가 실제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긴장해있지만 치료 기간 동안 느슨해질 겁니다.

다른 엄마들 만나서 커피 한 잔 하고 이야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감염이 되고,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참 많은 케이스들을 보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한순간 방심하여 응급조치를 하지 못해

잘못된 아이들을 많이도 보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바쁜 스케줄을 쪼개, 모든 부모들을 만나 한 시간이나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시는 거겠죠.


- 아이 치료는 병원에 맡기고 집에서는 그냥 쉰다? 아닙니다.

부모님은 의료진과 한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는 저희가 치료하고, 집에서는 부모님이 돌보는 겁니다.

자, 여기에 이름 쓰세요.


교수님은 어느새 빼곡하게 글씨로 가득찬 A4 용지를 나와 남편에게 돌리며

자신의 이름 밑에 우리의 이름을 직접 적으라고 하시더군요.


- 이 종이는 복사해서 저와 부모님이 나눠 가질 겁니다.


마치 중대한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지는 계약식 같았습니다.

간호사가 복사를 마치고 제게 교수님의 치료 계획서를 건넸고,

저는 그 종이 한 장이 정말 너무나 든든했습니다.


읽고, 또 읽고.

눈에 새길듯이 보고 또 보았습니다.


교수님이 한 자 한 자 적으실 때

어쩌면 그렇게 술술술술 써지는지

그 볼펜 조차도 너무나 유능해보였어요.

그 볼펜이 쓰는 대로 다 이루어 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똥도 안나오고, 끊김도 없고, 너무나 부드럽게 써지는.

교수님이 수 백 번을 써내려간 치료 계획서에

가장 좋은 볼펜을 고르셨을 거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랐습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병원에 은우와 단 둘이 있을 때,

그 치료 계획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 그 볼펜은 어디서 나온걸까?

그렇게 부드럽게 잘 써지는 걸 보면 일본 브랜드 일 것 같은데.



은우를 치료하는 중에 엄마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 신호등 수첩에 아이를 모니터링한 결과를 열심히 적는 것이었습니다.


1. 3시간 간격으로 체온 측정

2. 먹은 것과 나온 것 (대변/소변) 모두 기록

3. 항암제 투여 시 특별한 증상 여부

4. 피검사 수치 기록

5. 체중 (매일 아침 동일한 시간에 측정)

6. 가글 기록 (2시간에 한 번)

7. 좌욕 기록 (하루에 최소 두 번)

8. 각종 검사 일정


거기에 더해서 의료진에게 질문해야 할 것들을

추가로 포스트잇에 적어 수첩에 붙여놓았어요.

회진을 오실 때는 너무 잠깐 들리시기 때문에

깜빡 잊어버리면 또 하루를 기다려야 했거든요.


이렇게 수기로 기록하는 것들이 많았고,

그래서 저는 교수님의 그 유능한 볼펜을 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볼펜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라곤

바디가 빨간색이라는 것, 그리고 3색 볼펜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상컨대 일본 제품이라는 것.


은우가 잠든 후 보호자 침대에서 쿠팡 검색을 시작했죠.

'일본 볼펜'

'일본 3색 볼펜'


와,

일본 볼펜이 왜 이렇게 많은지.

아니 그리고, 펜 굵기도 너무너무 많더군요!

0.38, 0.5, 0.7, 1.0 이 가장 많이 보이는 굵기였습니다.


교수님의 볼펜은 도대체 몇 mm 일까!


그 다음날부터

저의 온 신경은 볼펜의 정체를 찾는데 집중되었습니다.

회진을 오실 때는 볼펜을 꺼내지 않으셔서

주머니에 꽂혀있는 클립 부분만 판별할 수가 있었어요.

클립이 투명한 재질이고

눈알이 빠져나올 것처럼 들여다본 끝에

제트스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유레카!!!!!!


제트스트림 볼펜 중 빨강 바디에 투명 클립은 0.5mm 뿐이었습니다.

불투명 클립 0.5mm 도 있어서 헷갈렸지만,

확실했어요.


빨강 바디, 투명 클립,

제트스트림 3색 볼펜 0.5mm


저는 교수님 볼펜 5자루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광적으로 제트스트림 볼펜을 검색하는 동안

참 예쁜 디자인과 컬러가 많다는 것이

문구광인 제 눈에 들어오게 되었지 뭐에요?

그래서 0.38도, 4색 볼펜도, 펄이 들어간 바디도,

많이 많이 주문을 했습니다. 하하.


집으로 쏟아지는 볼펜 배달에, 남편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어요.

병원에 입원해있는데, 전화가 왔더라구요.


- 여보, 펜을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자기가 산 거 맞아?

- 응. 그거 교수님이 쓰시는 펜이야.

교수님 펜으로 은우 수첩쓰면 은우가 더 잘 이겨낼 거 같아서.


그 땐 정말 그랬어요.

교수님의 그 유능한 볼펜으로

은우의 수첩에 매일 매시간을 기록하면

쓸 때마다 정말 좋은 기운이 전해져

피검사도 좋아지고, 열도 떨어지고, 그리고 응가도 잘하게 될 것 같은 마음.

큰 힘이 은우에게 가기를 바라는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그냥 저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항암제를 맞을 때는 약만 맞지 않고

독한 약성분에 내장이 상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방광보호제, 혈전방지제등 보호약을 함께 맞습니다.

거기에 진토제,진통제, 승압제, 뭐...다양합니다.

수액은 기본으로 들어가구요.


방광보호제를 맞는 날은 쉬를 엄청 많이 해요.

새벽에 기저귀를 만져보면 터질듯이 빵빵해서,

조심히 갈아주고, 그리고 어둠 속을 조용히 지나 저울에 달아

기저귀 무게를 빼고 쉬한 양을 기록지에 적습니다.

문과라 셈에는 원체 약하지만

새벽 어둠속에서는 왜 이렇게 뺄셈이 안될까요?

그래도 그 쉬의 무게를 기록지에 적을 때

교수님의 빨강 볼펜으로 적으면

참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숙제를 잘 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까지 그럴 일이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제가 펜에서 이렇게까지 힘을 얻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길고 지치는 병원 생활 중에

쓰는 순간만은 즐거웠고,

쓰기 위해 숙제를 열심히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저라는 것이,

저를 저로 만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수많은 자질구레한 경험과 취향이

저를 지켜주는 가장 든든한 힘이 아닐까요.


내가 나인 것은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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