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있는 쓰기

만년필

by 나로살다

제인 에어, 센스 앤 센서빌러티

요런 작품, 영화들이 쏟아져나오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 시대의 패션, 매너, 연애와 결혼 방식 등이 작품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봉긋봉긋하고 보들보들한 영상미에

하나같이 뽀얀 살결이 여성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요.


최근에는 브리저튼! 이라는 파격적인 미드가 나와서

아, 그 시대에도 모두가 호호 하하 하지만은 않았구나, 역시,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쨌든 그 시대 (어떤 시대라고 부르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에는

그렇게 뭔가를 쓰는 장면이 많이 나오더랍니다.

연애편지, 자산의 운영상태, 일기, 전쟁에 나간 남편에게 쓰는 편지 등등

그 모든 쓰기는 자그마한 책상위에서 깃털이 달린 펜대로 씌여지더군요.


잉크를 한 번 찍어서 한 줄 반 정도를 쓰고,

다시 한 번 찍고를 반복하면서요.


클로즈업이 된 화면에는 항상 필자의 잉크로 물든 손가락 끝이 함께 등장하곤 했습니다.

잉크 냄새가 싸하게 날 것 같고, 날렵한 펜촉이 종이위를 달려가는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면서요.

글을 다 쓰면 반원 모양의 도구로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한번 살짝 찍어내고

잘 접은 후에 봉투안에 넣고,

촛농을 개봉부에 조심히 떨어뜨리고

가문의 문양이 있는 도장을 찍어 마무리 합니다.


이메일 처럼 썼다 지웠다를 무한정 반복할 수도 없고

한 번 보내기에도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드는 그 당시의 쓰기는

그래서 얼마나 간절하고 신중해야만 했을지.


요즘처럼 자주, 짧게, 그것도 줄임말을 써가며 이루어지는 쓰기와

실시간 포스팅, 바로 발행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그런 희귀성, 전혀 다른 매력이 있어서인지,

펜촉과 깃털 펜대에서 출발한 만년필 패밀리는

광팬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펜촉을 펜대에 끼워서 써보았는데

아무래도 잉크 분출이 균일하게 되지 않고 이리저리 번지고 찍히는 잉크 관리가 쉽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회사에서 큰 계약을 할 때 백화점에서 구매하곤 하던 몽블랑 만년필의 아우라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있습니다.


아, 계약 서명식을 준비하고

거래선이 서명할 계약서 옆 쪽에 이 만년필을 셋팅해놓는 것이

저희 부서의 의식 이었다고나 할까요.

서명을 한 후 계약을 체결한 것에 대한 감사, 기념의 의미로

만년필을 선물하는 것 또한 작은 전통이었습니다.

자그마치 10년도 넘은 시절 이야깁니다. 네.


세 번, 네 번 몽블랑 만년필을 구입하면서 접하게 된 만년필의 세계는

너무나 휘황찬란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가격 부터가 눈이 부시더군요.


만년필의 가격을 알게된 후부터는 회사 임원들, 거래선이 가지고 다니는 펜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이 달리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출장을 다니고 면세점을 드나 들면서

하나 둘 씩 만년필을 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꽤 합리적인 가격의 브랜드들도 있었어요.

Aurora 의 금장 만년필이 저의 첫 만년필이었죠.

그 펜으로 참 많은 일기를 쓰고, 펜촉을 많이도 세척하고 공을 들였습니다.

날씬하고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제 맘에 쏙 드는 만년필이었어요.


그 후에는 우연히 엄마의 책상에서 발견한 Parker 의 빈티지 만년필.

일본에서 생산된 삼천원짜리 만년필 (이것은 혁신이었다!)

프랑스 봉막쉐 백화점에서 산 Recife 만년필 (그 눈부신 바디라니! 하지만 무거움)

그리고 LAMY 가 상륙한 후에는 가장 우월한 필기감을 선사해주었죠.

가벼운 바디, 안정적인 펜촉, 균일하게 흘러나오는 잉크 등등

LAMY 제품은 자그마치 네 자루나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글을 만년필로 주욱 써내려 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잉크가 마르는 것을 여유롭게 기다리면서

한 문단을 쓴 다음에는

창 밖을 내다 보면서 다음 구절을 생각하고

차를 한 찬 천천히 마시며

내가 쓴 문장을 되짚어 읽어보고,

그렇게 글을 쓰는 그림에

만년필은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요?

아이들을 재우고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어

'15분만 쓰고 자자' 하는 마음으로 타자를 두드립니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제 머릿속을 떠다니는 '쓰고 싶은 글'들이 증발될까봐 초조하네요.


아직도 제 보물상자속에 잘 담겨있는

소중한 만년필들은

언젠가 그 여유로운 장소에서 꺼내들겁니다.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구요.

비도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라면 더 좋겠네요.


그 날을 꿈꾸며,

자,

워킹맘은 이제 자러 들어가야겠습니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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