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니스의 현장에서 볼펜을 고르다

대한항공 vs 아시아나

by 나로살다

이런 피드 보셨나요?


- 고등학교 때는 온갖 펜 굵기별 컬러별로 애지중지 모시고 다니다가

대학교 되면 모나미 볼펜 하나만 들고 다닌다.


공감 백만개!


맞아요.

저도 대학 들어가서는 공부는 꼴도 보기 싫더군요.

내가 왜 그렇게 필기와 필기구를 좋아했나,

그 때 깨달았습니다.


네, 다른걸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좋아해서도 안되는 거였죠.

해야 하는 것 안에서 그나마 애착을 가질 대상이 필요했던 거에요.

그래서 대학 때는 다른거 한다고 바빴습니다.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요.


그러다 다시,

해야 하는 것을 해야 하는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대기업 신입사원.


회사에서는 물론 컴퓨터로 일을 했지만,

그래도 할 일을 기억하고 지시사항을 기록하는데는 필기만한 것이 없더군요.

쓰는 습관이 이미 들어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으로 쓰면 머릿속에 쓰는 느낌이에요.

필기한 것을 나중에 보기 위해서도 있지만,

필기하는 그 과정이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것 같아요.


어쨌든,

신입사원의 신분으로 부장님과 단 둘이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동남아 지역으로 떠난 3박 4일의 출장이었는데,

제가 끌고 나타난 캐리어를 보고, 부장님은 한마디 하셨죠.


- 신혼여행 가냐?


부장님은 기내 반입 가능한 소형 캐리어.

저는 화물로 부쳐야 하는 대형 캐리어.


첫 출장이니까, 뭐 그리 챙겨야 할게 많은지요.

결정적으로 우리 집에는 큰 캐리어 밖에 없었다구요.


츤데레 부장님은 말씀은 저렇게 하셨지만

저를 비지니스석에 같이 태워주셨어요.

밀리언 마일러인가 그런 귀한 신분이셔서 뭐 그런 게 가능하셨던 것 같습니다.

3시간 반 남짓의 비행 동안

저는 진짜

미팅 준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니,

비지니스 석 왜 이렇게 편해요?

완전 숙면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화장실을 다녀오는 부장님과 눈이 마주쳤네요.


아, 이런.



도착해서 다음날 아침 미팅이 있었어요.

거래선의 좀 높은 사람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시간이 도오저히 안된다고 해서 조찬미팅(!) - 네, 맞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거요 - 조찬미팅을 7시에 하기로 했어요.

무슨 호텔 레스토랑에서요.


저는 프로젝트 실무를 챙기고 있던 터라

혹시 미팅 중 디테일한 질문이 나오면

노트북의 자료를 뒤져 대답하려고 했는데

조찬미팅에 노트북을 꺼내놓기에는

테이블이 너무 꽉 차 있더라구요.


어찌해야 하나 허둥지둥하는 사이 미팅은 시작되었습니다.

부장님과 그 거래선 높은 사람은

웃으면서 농담처럼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사회 초년생 비지니스 초짜인 저의 귀에도

그 대화 속에 부딪치고 있는 두 자루의 검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부장님이 챙! 공격하면

그 높은 사람이 방패로 깡! 하고 막고,

그 높은 사람이 창으로 훅- 찌르면

부장님은 몸을 옆으로 굴리며 휙! 피하고요.


아주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질문과 대답을 그렇게 하시더군요.

조찬은 먹을 새가 없었습니다.

저는 테이블 밑 무릎 위에 업무 수첩을 놓고

제가 듣고 있는 내용을 최대한 많이 적어놓으려고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죠.


대화로 이어가던 미팅이 갑자기 양상을 바꾸게 된 건 그 때 였어요.

부장님이 갑자기 커트러리를 올려 놓은 테이블 매트(지만 종이재질의)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는 안 주머니에서 대한항공에서 가져오신 볼펜을 검을 뽑듯 꺼내시더니

그래프를 쭉쭉 그리고, 숫자를 써가면서, 그러면서

지금까지 한 대화를 재확인하고,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다시 한번 하고 싶은 모양이셨어요.


말로 하는 것보다는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 언제나 확실하니까요.


그 높은 사람도 참 프랙티컬한 사람이라,

자신의 몽블랑 펜을 꺼내더니

그래프를 수정하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뭐라고 막 숫자를 써가면서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결국은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 싸게 줘, 근데 좋은 제품을.

- 왜 그래야 돼? 얼마나 살건데?


회사를 10년도 넘게 더 다닌 지금도

저는 그 조찬미팅의 치열함과 긴장감,

그리고 형식을 다 빼버린 실용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고, 핵심만 이야기하는 미팅은 아주 드물더군요.


영업을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 이라고 한다지요.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구린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더라구요.

그 한시간 남짓한 미팅에서 전 영업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맛본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전투의 흔적 (테이블 매트)을

미팅 후에 소중히 접어 들고 나왔습니다.

부장님은 작은 수첩에 몇 줄 적으시고는


- 일어나자.


하셨어요.


나중에 호텔 방에서 가져온 그 테이블 매트를 펼쳐보니

높은 사람의 만년필은 막 번져있고

부장님의 대한항공 볼펜은 꾹꾹 선명하게 잘 써져 있더군요.


저는 그 부장님의 글씨가 몽블랑 만년필보다 더 멋있었어요.

만년필로 무슨 일을 합니까. 계약서에 싸인할 때나 좋죠.

치열한 영업 현장에서는 번지지 않고 마구마구 써내려 갈 수 있는 볼펜이 와따입니다.


심지어, 너무 바빠서 미처 필기구를 챙기지 못한

유능한 영업사원이

출장 가는 길 비행기에서야 한자루 확보할 수 있는

항공사의 볼펜이야말로 비지니스의 상징이 아닐지.


그 후로 숱하게 출장을 다니면서

저는 부장님의 그 필체를 생각하며

열심히 항공사 볼펜을 모았어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대한항공은 디자인이 하나였지만

아시아나는 컬러가 3가지인가 되었어요.

빨강, 그레이, 파랑.

두 볼펜 모두 필기감이 뛰어났고,

명품 브랜드 보다 더 멋져보였습니다.


출장을 준비할 때마다,


- 이번 출장은 어떤 볼펜을 가져갈까?


신중하게 고르고 수첩에 끼워놓는 것이 나름의 의식 (Ritual)이자 즐거움이었어요.


아, 갑자기

츤데레 부장님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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