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탐스러운 필통

Playcolor 24

by 나로살다

- 안녀엉.


아담한 키에 예쁘게 화장을 한 대학생 선생님이었습니다.


와, 예쁘다.


속으로 생각했어요.

큰 외삼촌 댁의 작은 사촌오빠 방에서 보았던

'클루리스' 라는 영화의 포스터,

그 센터에 서있던 여배우를 꼭 닮은

내가 본 일반인 중 가장 예쁜 여자 사람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그녀는 저의 수많은 과외 선생님 중 하나.

수학이었나 영어를 가르치러 일주일에 두 번 우리집에 왔습니다.

정말 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선생님은 자신감이 없어보였습니다.

조금 통통할 뿐인데도 늘 자신은 뚱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요.


선생님은 첫 수업만 멋지게 자켓과 풀메를 차려입고 오시고,

그 다음부터는 쌩얼에 츄리닝 바람이었습니다.

츄리닝 위에 블랙 롱코트를 입고는 단추를 목 아래부터 꽉꽉 잠가

자신의 실체를 원천 봉쇄하는 듯 했죠.


열정적이던 그녀의 수업도 시간이 지날 수록 느슨해져갔습니다.

학생인 저는 꼿꼿이 앉아 집중력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선생님인 그녀는 책상위에 엎드려 축 쳐져있기 일쑤였습니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청춘인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거리가 있었을까요?


제가 나중에 과외 선생님을 해보니

수업을 하러 가는 그 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길 같았어요.

월급을 받을 때만 좋고

아이와 씨름하며 두시간을 보내기는 정말 싫더라구요.

그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만면에 홍조를 띄는 순간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그녀의 필통을 개봉할 때였습니다.


사실, 필통이라고 하기에는 커다란 파우치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미국 국기를 모티브로 한 그 길쭉한 파우치안에는 Playcolor 수성펜이 한가득 들어있었어요.


와,

그 형형색색의 컬러들이라니.

(무려 총 24 컬러)


색감도 하나하나 어찌나 특별하고 예쁜지,

거기다 두껍게 나오는 곳과, 가늘게 나오는 곳, 양면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당시에는 정말 혁신적인 (저에게는) 펜이었습니다.


- 선생님, 이 펜은 뭐에요? 진짜 예쁘다~

- 그치? 이거 Playcolor 야. 이걸로 필기하면 진짜 예뻐. 볼래?


그녀는 파스텔톤의 연한 컬러는 두꺼운 촉으로 교과서에 줄을 치고

그 같은 계열의 진한 컬러로는 필기를 하는

'그라데이션 필기 공법' 을 선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레몬컬러로는 줄을 치고, 오렌지 색으로 그 근처에 필기를 하는 식으로요.


저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아트의 경지였습니다.


기억하시죠?

어렸을 때부터 캘리그래피의 맛을 알고

깔끔한 필기가 주는 쾌감까지 경험했던

사치로운 학생이 저였다는 걸요.


제가 찾아낸 가장 멋진 필기 공법은

파스텔 형광펜 (형광펜인데 좀 톤다운된 - 스타빌로?에서 많이 나왔어요) 으로 줄을 치고

같은 계열 하이테크로 필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가방 한가득 필통을 짊어지고 오는 나의 과외 선생님의 필기는

한차원 높은 수준이었어요.


- 역시 대학생이구나! 대학생의 필기는 다르구나.


그녀는 최고의 과외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과외를 그만둘 시점이 되자 이별 선물로

그녀의 보물 파우치를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그 너그러움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선생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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