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 0.3
네,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찾아왔습니다.
먹고 자고, 그 다음엔 공부만 해야 하는 그 시절이요.
청춘예찬이니, 나의 빛나는 십대이니,
다 뭘 모르는 소리들입니다.
정말 빛났을까요? 우리의 십대는요.
저의 십대에게 저는 그저 한 마디, 한 마디 말만 해주고 싶습니다.
- 애썼다.
정말 저는 애를 썼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과, 그리고 부모님들까지두요.
애썼다라는 말 외에 어떤 형용사가 어울릴까요.
본격적인 입시가 시작되기도 전인 중학생 시절에도
저는 먹고 자는 것 다음으로는 공부를 했습니다.
예체능 과목조차도 저에게는 공부처럼 느껴졌어요.
어쨌든 시험을 보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니 그게 다 공부지 뭐에요.
몸으로 뛰는 공부, 노래로 하는 공부.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좋은게 있었어요.
바로 바로 바로,
비싼 펜을 쓸 수 있다는 것!
샤프도 쓸 수 있다는 것!
왜냐면, 중학교로 올라오면서 이사를 해서
더 이상 훈장 할머니에게 필통을 검사받지 않아도 되었거든요.
이제는 검소함과는 거리가 먼, 세상에서 제일 럭셔리한 필통을 확보했습니다.
학교 앞 아파트 단지 상가 문방구는 늘 아이들로 북적였어요.
계산대 바로 앞이 필기구 자리였습니다.
샤프는 천 원, 비싼건 천 칠백원 이었는데요.
(어떤 샤프는 샤프심에서 꽃냄새가 나기도 했어요!)
필기구 중 끝판왕은 일본에서 건너 온 하이테크 시리즈였습니다.
그 동안 써본 펜 중에 가장 가늘게 써지는 펜이었죠.
이렇게 가늘게 잘 나오는 펜이 있다니! 이것은 펜촉인가 바늘인가.
거기다 하이테크는 가격도 넘사벽이었습니다.
한 자루에 이천 이백원이라니요!
사치스러운 중학생에게도 한 자루 이천 이백원짜리 펜은 너무 과했습니다.
깔별로 쟁이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참고 참아 검정색 한 자루만 겟 했었습니다.
하이테크로 필기를 하면, 교과서 귀퉁이나 줄 사이에도 깔끔하게 글자를 적어넣을 수 있었어요.
제 글씨는 제가 봐도 참 정갈하고 야무졌습니다.
빼곡히 필기가 된 교과서와 노트를 보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저의 손글씨란. 캬!
쓰는 게 좋아서 그 오랜 공부시간을 버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펜으로 필기를 하며
이 펜은 필기감이 어떤가, 뒷장에 번지지는 않는가, 똥은 안나오는가, 이리 저리 관찰하고
한 줄 한 줄 채워져나가는 노트를 보는 것.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이야말로 아주 말초적인 기쁨이었죠.
하이테크 0.3은 제가 만났던 수많은 펜 중에서도 가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 불릴만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한자루 한자루마다 필기감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펜촉이 너무 가늘다보니, 어떤 것은 잉크가 뻑뻑하게 나오고, 어떤 것은 아예 안나오구요.
이천이백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장만했는데 그런 펜이 걸리면
그 심정이야말로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0.4 미리를 쓰면 균일하게 잘 나올까 해서 사보았는데요,
또 0.4 미리는 0.3 미리로 필기했을 때의 샤프한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결국 꾸준히 잘 나와줄 0.3 미리를 만나는 것은
하늘이 점지해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멋진 하이테크 0.3 을 만나면,
중성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필로 쓸 때 처럼 사각 사각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잉크는 뭉치거나 끊김없이 균일한 굵기로 솔솔솔 흘러나왔구요.
바디는 너무 길거나 짧지 않고, 굵기도 쥐고 쓰기에 딱 적합했습니다.
표면은 미끌거리지 않도록 엣칭이 되어있어 핸드크림을 발랐어도 필기에 문제가 없었죠.
많이 각지지 않아 오래 쥐고 써도 손이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하이테크는 정말 오랫동안 쓴 펜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하이테크와 함께 했어요.
(물론 후반부에는 필기고 뭐고 정신줄을 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요)
연필을 예쁘게 깎아 필통에 넣어 놓고 싶은 마음이
그런데
하이테크에게는 왜 들지 않는 걸까요?
0.3 미리의 심으로 수없이 써내려갔던
국어 영어 수학 물리 지학 생물 한문 도덕 사회 가정 음악 미술 체육 시간이
같이 떠올라서 그런걸까요.
지금도 깔끔하고 엣지있는 글씨를 써야할 일이 있으면
하이테크를 꺼내들곤 합니다.
깨끗한 글씨를 드립니다.
하이테크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