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화곡동은 강서구에 속한다. 강서구라는 지명이 생긴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14년 김포군에 병합되었다가 1963년 영등포구로 편입되었고 1977년 분리되어 강서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1988년 15개 행정동이 양천구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강서구 틀을 갖추게 되었다.(출처 1)
화곡동은 화곡본동과 화곡 1~8동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70년 이후 화곡동은 쪼개지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다가 2008년 화곡1동과 화곡7동을 합쳐서 화곡 1동으로, 화곡5동과 발산 2동을 합쳐서 우장산동으로 통폐합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로 앞서 화곡 1~8동이라고 했지만 화곡 5동과 화곡 7동은 없다. 네이버나 카카오 지도에서 화곡동이라고 치면 현재의 우장산동까지 화곡동에 묶여서 표시된다.
우장산동을 뺀 순수 화곡동을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이를 다시 동별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그림판으로 표시한 거라 삐뚤빼뚤 엉망진창이다.
강서구청 홈페이지에서는 화곡동 동이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곡동(禾谷洞)
땅이 기름져 골짜기 사이마다 벼가 잘 되므로 벼가 익어가는 골짜기 마을이란 뜻의 화곡동이라고 불리워졌다. (옛날 초록동은 화곡본동, 곰달래길의 시원지는 화곡1동, 봉제산 남쪽줄기 아래는 화곡2동, 김촌마을은 화곡3동, 능꼴마을은 화곡4동, 박장마을은 화곡5동, 역말마을은 화곡6동, 새까지 마을은 화곡7동, 더부리 마을은 화곡8동이 되었음)
강서문화원 홈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있다.
화곡동
화곡동은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마치 황금물결의 계곡처럼 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능동, 반곡리, 역촌리, 화곡리라는 4개 마을이 모여 화곡동이 되었다. 능동은 속칭 능꿀이라 불리는 현 화곡4동 신정여상 근방의 봉제산 기슭에 몇가구가 살던 마을이며, 반곡리는 원촌말,김촌말,박장말이 있었던 강서성모병원 근방의 현 화곡3동과 5동에 걸쳐 형성된 원씨,김씨,박씨,장씨 등이 살던 부락을 말하며, 역촌리는 강서구청앞 우장산 기슭에 있었던 역말자리로 추씨집안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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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설명- 신정여상은 2020년 서울신정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강서성모병원은 지금 검색이 되지 않는데 1986년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화곡동 138-16, 1999년 서울시보에 의하면 화곡3동 1065-26으로 주소가 기록되어있다. 폐업했거나 이전한것으로 보인다.(출처 3)
화곡동은 禾谷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과거에 벼농사를 지었고, 계곡(골짜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곡동에는 봉제산과 우장산, 검단산, 까치산이 있다. 조선시대, 아니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봉제산과 우장산의 규모는 훨씬 컸을 것이다.
봉제산 동쪽의 능안마을에는 허씨 후손들이 살고 있었는데 1971년 국군수도통합병원(현 등촌아이파크 부지, 수도병원은 1999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로 이전)이 들어서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통합병원 뒷마을인 백석마을의 허씨집안들만 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석중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60 여기의 묘소가 있었는데 1977년부터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묘소 대부분을 화장하거나 이장했다고 한다.(출처 2) 1970년대 전의 봉제산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 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봉제산은 까치산과 이어져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우장산은 수명산과 이어져있었을지도 모른다. 봉제산과 까치산은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두 산 사이에 낀 화곡8동 일부 지역은 산이나 마찬가지이다. 위 화곡터널 사진 오른쪽 지역이 현재의 화곡8동이다. 언덕에 사는 주민들은 매일 등산하는 기분으로 동네를 오르내린다. 나도 마찬가지다. 화곡3동과 현재 우장산동에 통합된 화곡5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양천군 반곡리라고 했다. '빙 둘러 있는 마을, 굽은 골'이라는 의미이다. 우장산과 수명산이 굽어서 빙 둘러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골짜기라 함은 봉제산과 우장산, 검단산 사이, 즉 화곡6동과 화곡본동을 말하는 것이리라. 1950년대 사진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화곡본동에는 볏골 어린이공원이 있다. 볏골은 벼의 고을이다. 벼농사의 흔적이 지명에 남아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농사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서울의 마지막 벼농사 지역이었던 마곡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식물원 한쪽에 있는 마곡 문화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벼농사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 불과 10~20년 전 마곡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은 없다.
화곡동에는 작은 공원이 많다. 공원에는 옛 마을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더부리 공원, 역말 공원 등이 그 예이다. '말'이니 들어가는 공원 이름이 몇 개 있는데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모르겠다. 언젠가 공원 탐방도 다닐 예정이다. 각 동 탐방 때 동 이름에 대해 더 알아볼 계획이다.
화곡동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의 열기에 싸여있다. 매일같이 변하는 서울처럼 화곡동도 매일매일 변한다. 불변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조금 천천히 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급격한 변화가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나 보다. 6살 우리 딸에게 화곡동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궁금하다.
출처
1. 강서구청, 강서연혁. https://www.gangseo.seoul.kr/gs050705
2. 민족의학신문, 구암 허준의 고향은 어디일까. https://www.mjmedi.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13
3.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41916#home
서울시보, 1999. https://event.seoul.go.kr/snews/data/CN_MST/%C1%A62192%C8%A3.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