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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31. 2024

영화와 불교9_<사랑의 블랙홀(1993)>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만드는 방법  




 코로나시대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은 ‘일상의 소중함’이었다. 관계가 차단된 일상은 마스크를 쓰고 숨 쉬는 것처럼 갑갑하고 울적했다. 마스크를 벗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일상이란 단어는 어느새 뒷방으로 밀려난 듯하다. 생각해 보면 타인과 접촉이 없다고 해서 일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상이 소중하지 않은 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형태의 일상을 보냈을 뿐 일상은 늘 존재했으며 언제나 소중하다.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더라도 결국 돌아올 곳은 일상이고, 여행이 계속된다면 여행 자체가 일상이 되어버린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현재 세계 인구는 약 80억 명이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는 80억 개의 일상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80억 개의 일상은 80억 개의 관점과 80억 개의 선택을 낳는다. 여기에 전생·현생·후생 그리고 과보라는 변수까지 넣으면 삶의 다양성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 무한히 확장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의 형태나 경험, 감정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80억 개의 일상을 분석하여 비슷한 것을 묶으면 몇 개로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다르면서도 엇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1993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야 하는 주인공의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사진 1. <사랑의 블랙홀> 포스터




 <사랑의 블랙홀>의 원 제목은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이다. 그라운드호그는 마멋, 우드척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다람쥐과에 속하는 설치류로 다람쥐보다 훨씬 크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매년 2월 2일 그라운드호그를 이용해서 겨울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점친다. 그라운드호그가 굴에서 나와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간 더 이어지고, 그림자를 보지 않으면 봄이 온다고 한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영문도 모른 채 사람 손에 이끌려 나온 그라운드호그는 경황이 없어 자기 그림자를 볼 틈도 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1887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시작되어 2023년 137회를 맞이한 유서 깊은 기념일이다. 


사진 2. 그라운드호그(좌)와 2017년 펑수토니의 그라운드호그 데이(우)



 기상캐스터 필은 촬영감독 래리, 프로듀서 리타와 함께 이 행사를 취재하러 펜실베니아 펑수토니에 간다. 불평불만과 짜증이 일상인 필은 4년째 가는 행사가 지겹다며 도착하기도 전부터 빨리 피츠버그로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거려 동료들조차 질리게 만든다. 행사 당일인 2월 2일, 무난하게 촬영을 끝내고 피츠버그로 돌아가던 중 폭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펑수토니로 돌아온 일행은 하룻밤을 묵는다. 다음날 아침, 6시 알람소리에 일어난 필은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흘 연속 똑같은 하루가 계속되자 필은 리타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하소연해보고, 병원에도 가보지만 결국 자신이 2월 2일에 갇혔음을 인정한다.

   

 무슨 짓을 해도 책임을 안 져도 되고, 다음날이 되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아마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해보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나쁜 짓 말이다. 필은 한 여자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음주운전도 해보고, 경찰과 추격전도 펼쳐보고, 현금 수송 차량에서 돈을 훔쳐 비싼 차를 사기도 한다(15세 관람가인 영화이므로 심각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는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던 필이 유일하게 실패한 일은 리타를 꾀는 일이었다. 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리타는 그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못된 장난도 리타 유혹하기도 따분해진 그는 이 진절머리 나는 상황을 끝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해 죽지만 번번이 아침 6시를 알리는 시계 알람소리에 깨서 또다시 2월 2일을 보내야 한다. 


 죽지도 못하고 허무함과 지겨움에 몸부림치던 필은 다정하고 긍정적인 리타에게 감화되어 생전 안 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건성으로 하던 촬영에 열정을 다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얼음 조각을 배우며 필은 다재다능한 사람이 된다. 그뿐이랴. 그간 지나치기만 했던 노숙자에게 가진 돈을 전부 준다던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돕는 등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필은 사람들을 돕는 이타적인 필이 되어 마을의 명사이자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 물론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리셋(reset)되지만 말이다. 평소처럼 선행으로 바쁜 오후를 보내고 리타와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낸 어느 2월 2일 밤. 필은 그녀에게 말한다. “내일이나 남은 내 인생에서 무슨 일이 닥친다 해도 나는 지금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리타 역시 자기도 행복하다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필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다음날, 필은 리타와 함께 2월 3일 아침을 맞이한다.


 필이 얼마나 오랫동안 2월 2일에 갇혀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피아노를 전혀 못 치던 그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연주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몇 달이 아닌 몇 년이 족히 흘렀을 것이다. 수년째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라니... 생각만 해도 지겹지 않은가. 필은 책임을 안 져도 된다는 생각에 나쁜 일을 벌이고, 지겨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죽기도 하지만 결국 그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택하는 건 선행이었다. 좋은 과보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선행을 한다고 2월 2일에서 벗어난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리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선행을 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왜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했을까. 악행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선행도 매일 똑같이 반복한다면 지겨우리라. 그래서 그는 선행을 찾아 나선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하고, 타이어 펑크가 난 차를 수리하고, 스테이크를 먹다가 목이 막힌 사람을 구하는 등 그는 홍길동마냥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동네 곳곳에서 제때 도움을 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하루와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피아노를 능숙히 연주할 정도의 긴 시간 동안 그는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선행을 실천했을 것이다. 다음날이면 지겹도록 해온 선행을 다시 반복해야 하고, 주위 사람들은 그의 선행을 그저 우연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필은 도대체 왜 선행을 하는가? 답을 찾다 보면 결국 하나에 도달한다. 선행이 즐겁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다면 도돌이표 같이 이어지는 나날들을 버틸 수 없었으리라.  



사진 3. 2월 3일을 자축하는 필과 리타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필의 2월 2일과 우리의 인생은 같다. 우리의 하루는 필의 2월 2일처럼 매번 똑같지 않지만 비슷하게 반복되기에 그냥 흘려보내기 쉽다. 일상에서는 티끌 같이 하찮던 시간들이 어느 순간 태산이 되어 우리를 내려다볼 때 짧았던 하루가 기나긴 일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갈망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여행자에게 1요자나는 멀며
참된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윤회는 한없이 길다  



 위 게송은 《법구경(담마파다)》에 있는 60번 게송인데 여기에는 빠세나디 왕과 얽힌 배경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 빠세나디왕은 그녀를 차지하고픈 욕망에 잠 못 이루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여인의 남편은 자신의 목숨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왕이 요구한 물건을 구해 부지런히 성으로 향하지만 길은 한없이 멀기만 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왕은 이상한 비명소리를 듣는데 이 소리는 놀고먹느라 인생을 낭비하여 지옥에 떨어진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원래 이야기는 길고 등장인물도 많지만 게송은 그중 위의 세 인물과 관련이 있다. 

 

길고 짧음과 멀고 가까움은 절대적이지 않다. 욕망에 눈이 먼 왕에게 밤은 한없이 길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밤이 짧게만 느껴질 것이다. 여인의 남편에게 1 요자나(유순由旬이라고 하며 약 13.5km)는 가도 가도 끝없는 삼만리처럼 먼 거리지만 사형수에게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이다. 같은 1겁이라 하더라도 지옥에 있는 이들과 극락에 있는 이들이 느끼는 시간은 다르다. 한없이 반복되는 2월 2일은 퉁명스럽고 삐딱한 필에게는 무상하고 긴 하루였지만 선행을 베푸는 필에게는 짧지만 보람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하루였다. 하루의 길이와 일상의 충만함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 보니 2월 2일이라는 감옥의 문을 연 열쇠는 ‘나는 지금 행복해요’라는 말 한마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이끌어낸 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반복되는 선행이었다. 무기력함과 무의미함에 잠식될 뻔했던 필의 하루는 선행의 힘으로 매일 빛을 발하였다. 


 일상에 지칠 때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것을 배움으로써 일상을 잠시 떠나 있곤 한다. 이렇게 일상 밖으로 나가는 방법도 좋지만 일상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뉴스나 SNS에 언급될 만큼 커다란 선행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말, 온화한 눈빛,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나와 다른 사람의 하루는 따스하고 즐거워진다.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선행의 조각들은 일상을 바꾸고, 한없이 긴 생사윤회의 고리를 끊는다. 






(2023년 9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월간 봉은판전> 게재)





사진출처

1. TMDB, '사랑의 블랙홀, 2024년 1월 31일 접속.  https://www.themoviedb.org/movie/137-groundhog-day/images/posters?image_language=ko&language=ko

2. (좌) VARMENT GUARD, 'Groundhog Control & Identification', 2024년 1월 31일 접속

https://ent.sbs.co.kr/news/article.do?article_id=E10005909294

(우) CBS NEWS, 'Groundhog Day: Punxsutawney Phil predicts more winter,' 2017년 2월 2일

https://www.cbsnews.com/news/groundhog-day-punxsutawney-phil-predicts-more-winter/

3. Medium, 'Groundhog Day(1993)', 2016년 1월 9일 

https://medium.com/thumb-thumber/groundhog-day-is-one-of-the-best-films-ever-made-there-i-said-it-if-you-disagree-you-are-wrong-c121164926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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