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으로 지닌 반항적 기질 탓에 메인스트림 콘텐츠는 잘 안 보는 편이지만, 웹소설만큼은 유독 다양하게 챙겨보고 있다. 장르문학을 향한 필자의 애정이 각별한 까닭이다.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챙겨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네이버 시리즈에서 각별히 애정하는 웹소설을 손꼽으라면 크게 <전독시>와 <화산귀환> 정도를 들 수 있다. 참고로 이 두 작품은 국내 웹소설 시장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각각 각각 1억뷰와 3억뷰라는 어마무시한 조회수를 자랑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웹소설은 결코 느닷없이 출현한 장르가 아니다. 웹소설은 1990년대 이후로 출현한 기존 판타지/무협소설의 흥망성쇠 그리고 대여점의 성쇠와 결부된, 그야말로 미디어 변천사와 장르의 지각변동이 겹치면서 일궈낸 예상치 못한 흥행이라 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2010년 즈음부터 국내 장르소설 시장이 서서히 쇠락하게 된 이후로는 더 이상 양지에서는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재미있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구사하더라도, 소설의 태생이 '활자'인 이상 영상 콘텐츠의 화려한 시각성과 자극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당시의 내가 내놓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장르소설은 보란듯이 웹소설이라는 탈로 바꿔 쓰고 우리에게로 되돌아왔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에 이르러서는 만화, 드라마, 영화 등 각종 IP를 제공하는 원천 소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또한 <전독시>나 <화산귀환>은 물론이고 지난 해에 완결된 <나혼렙>은 일본 만화와는 또 다른 독자적 정체성을 갖고 나아갈 수 있는 한국 웹툰의 가능성과 신경지를 이끌어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현재까지의 성적과 잠재력만을 놓고 보더라도, 앞으로가 매우 유망한 콘텐츠 장르라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 흥행과 달리 학술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심도있는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는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가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으로, 문화콘텐츠가 갖는 특유의 가벼움과 오락성을 이유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을 꺼리는 탓이다. 필자는 이 풍토가 썩 불만스럽지만, 백번 양보하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왜 이렇게 흘러갔는가를 조망하는 작업은 분명히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리즈는 오늘날의 웹소설과 과거의 장르 소설 전반에 관한 두없는 생각을 체계화하여 간단하게 연재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시리즈는 다분히 나의 기억과 느낌에 의존한 것이며 별도의 연구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 만큼 철저하게 주관적인 글이 될 것이다. 현생이 바빠 자주 업로드는 못하는 점은 양해바란다.
사실 필자는 한국형 장르문학을 그 초창기부터 꾸준히 즐겨왔던 독자다. 0세대는 아니지만 아마 1세대쯤은 될것이다. 2000년도 초반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무렵 즈음 연재되었던 <드래곤라자>나 <세월의 돌>, <룬의 아이들>, <퇴마록> 같은 고전적인 판타지 명작은 물론 이후의 <아린이야기>나 <가즈나이트>, <SKT>, <묵향>, <황제의 검>, <비뢰도> 등의 일반 판타지/무협소설도 재미있게 읽으면서 입문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건대 장르소설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도서대여점의 등장, 둘째, 라이트노벨이라는 신장르의 등장 등등.
첫 번째, 도서대여점의 등장은 소수의 서브컬쳐였던 장르소설이 단숨에 물리적 기반을 갖고 외연 확장을 성공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라 하겠다. PC통신 시절의 인터넷 연재 문화가 사실상 장르문학의 시발점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창작자가 아닌 일반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동의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분명히 Pc통신은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이고 즐길 수 있는 모임의 장이었다지만 이는 당시의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과 같은 인터넷 형태에 익숙한 당시의 신세대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불특정 다수의 잠재적 소비자들에겐 커다란 진입장벽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제 우리가 생활하는 활동 반경에 '대여점'이라는 직접적인 문화매개자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게 된다. 다시 말해, 인터넷의 특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던 마이너 문화가 단숨에 문화적 지평을 확장하며 메이저 문화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 도서대여점의 존재가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때마침 근처에 백원~이백원으로 소설 한 권을 빌려볼 수 있는 도서 대여점이 생긴 것이 본격적인 입문으로 이어진 케이스였다. 도서대여점의 등장은 PC방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현상'이었다. 물론 도서대여점의 공과 과는 따로 논할 필요가 있겠지만, 적어도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의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오락거리이자 문화적 기반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두 번째로 눈여겨보는 것은 '라이트노벨'이라는 신장르의 등장이었다. 당시는 일본 서브컬쳐계로부터 <스즈미야 하루히>, <작안의 샤나> 등 유명한 작품들이 대거 유입되어 국내 시장을 뒤흔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현상은 도서대여점 같은 물리적 기반의 변화는 아니지만 장르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작가층과 독자층에 지대한 정신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론 더욱 중요한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라이트노벨'은 판타지소설과 마찬가지로 장르문학의 한 유형으로, 대체로 독자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킬 수 잇는 애니메이션적 서사를 지향하며 삽화를 삽입하는 소설 전반을 가리킨다. 명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헤비한 일반 소설의 반대적 개념으로 가볍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는 취지에서 새롭게 호명된 편의적 용어라고 하겠다. 이러한 라이트노벨의 등장 이후 장르문학의 지형은 크게 바뀌었는데, 판타지/무협 소설의 판이 다소 주춤하는 한편 일본 라이트노벨에 영향을 받은 시드노벨 등 한국형 라이트노벨 등이 대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 이 때 나타난 한국형 라이트노벨로 <미얄> 시리즈나 <나와 호랑이님> 시리즈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번역되어 수입된 무수한 명작 라이트노벨들로 인해 매우 눈이 높아져 있었던 필자로서는 이 작품들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를 시발점으로 더욱 많은 작품들이 후속을 이어 꽃피워내리라는 은근한 기대는 있었다.
물론 라이트노벨의 출현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국내 장르소설의 정형화된 양식과 그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독자들에게 장르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음을 보여준 라이트노벨의 세계는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웠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정형성을 암묵적 모범으로 삼았기에 소재나 주제, 서사 전반에 걸쳐 형식이나 소재의 파괴는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다. 혹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인식의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즉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그것은 분명히 판타지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범주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트노벨이 인기를 끌게 된 즈음부터는 장르문학 작가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동원해 양식과 장르성의 탈피를 시도하면서 점차 경직된 판타지소설의 고정관념들을 족족 해체하고 그 외변을 조금씩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틀과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하던 라이트노벨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필두로 양산형 장르소설의 그것과 유사하게 점차 틀에 박힌 이야기만을 하게 되었다. 생생하고 입체적이었던 캐릭터들은 점점 단순해지고 주인공의 욕망을 위한 매개적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서사의 방향성 또한 단순해지면서 그 내용도 섹스판타지 혹은 현실도피적 판타지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극히 실망스러운 시장의 방향이었다.
지금에야 어느 정도 연구자적 입장이라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대중을 따라가야만 하는 문화콘텐츠의 장(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처음 시장이 만들어졌을 초창기에는 다양한 기법과 주제,신선한 전략이 시도되다가 점차 완연한 성장기에 접어들음에 따라시장의 '해답'이 구축되면서 그 해답에 충실한 콘텐츠들을 중심으로 양산된다. 가령 '비행기'라는 개념이 막 만들어졌을 19세기 초창기에는 다양한 유형과 컨셉의 '날개'들이 구상되다가, 최종적으로는 라이트형제의 비행기 모델이 채택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이 완연한 성장기 시기로 접어들면 매력과 작품성이 넘쳤던 초창기의 다양한 작품들은 단지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 둘씩 경쟁력에 밀려 탈락하고 특정한 양상의 콘텐츠와 서사들을 중심으로 생산된다. 결국 그것이 더욱 잘 팔리기 때문이다. 내가 창작을 완전히 그만두자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시장의 변화를 두 번이나 경험하고 난 이후였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낭만과 이상은 시장과 맞지 않았다. 그렇게 장르문학의 세계는 내 삶에서 조용히 사라져가는 듯 했다.
그런데 2010년도 후반에 접어들면서 흐름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웹소설에 대한 소문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려오던 것이다. 당시 웹소설에 푹 빠진 전 여자친구가 일일대여권 때문에 나의 폰을 뺏어가곤 했지만 그건 단순히 그이의 독특한 취향일 뿐이겠거니 싶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필자는 웹소는 '그냥 옛날의 장르 소설들을 웹화한 것이겠지.' 하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학과에서의 토론이나 여러 모임에서도 웹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으며, 심지어 잘 아는 어떤 지인은 웹소설 작가로 성공적인 변신을 일궈내기도 했었다. 이러한 개개인들의 변화를 보며 필자는 몇몇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의 흐름이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마도 이 시장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일어난, 매우 때늦은 감지였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것이 '시대적 흐름'이라는것을 깨달은 필자는 즉시 유행하는 웹소설들을 켜 보았으며 그 날 이후로 몇몇 작품들을 꾸준히 챙겨보게 되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고,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은 그대로였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서술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