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이 걸어온 길과 그 흥망성쇠
지난 글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겸 장르소설의 행보를 간단히 정리하고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이어가려고 했는데, 글을 다시 곱씹어보니 '계보학적 탐색'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블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웹소설과 장르소설의 계보학적 탐색'이라는 제목으로 두 세편의 글을 더 게재하고자 한다. 다만 진짜 연구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관을 바탕으로 서술하는 글인 만큼 몇몇 정보와 그에 기반한 통찰에 대해서는 부정확할 수 있는 점 양지 바란다.
지난 글에서는 웹소설의 시초가 '장르문학' 그리고 그 이전의 PC통신 게시판에 올라왔던 소설들이라고 간단히 이야기한 바 있었다. pc통신 즈음 등장한 작품이 『드래곤라자』와 『퇴마록』 등으로 사실상 한국형 장르문학의 시발점 격인 1세대 작품이라 하겠다.
아울러 장르문학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지킨 사건으로 필자는 ① 도서대여점의 출현 ② 라이트노벨이라는 신장르의 출현을 손꼽았다. 전자의 경우에는 해당 문화가 단독으로도 수요-공급의 경제활동이 가능하게끔 할 수 있게끔 하는 최소한의 지지선 형성 다시 말해 '시장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판타지/무협이라는 장르적 한계에 머물러 있었던 장르문학의 자유도와 상상력을 대폭 올려 주었다는 데에서 장르문학의 발전에 큰 의의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상이 장르문학 시장 '바깥'에서 안으로 충격을 끼친 대표적 사건이라면, 이번에는 그 반대로 내부의 변화 즉 '장르문학'이 어떠한 발전을 거쳐왔는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간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초창기의 판타지소설과 후기의 판타지소설은 분명히 다른 결이 있다. 이 '다른 결'에 주목하여 논의를 섬세하게 확장한다면, 장르문학은 몇 세대로 나눠 부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다만 서술의 편의를 위해 본고에서는 장르판타지에 한정할 것이며 세대 구분에 관해서는 임명묵 선생님의 기준을 참고하고자 한다. (자세한 내용은 출처 참조)
1세대 : pc통신 연재 소설과 초창기 소설과 개막 - 정통판타지
2세대 : 차원이동, 이고깽, 퓨전 판타지로 요약되는 본격적인 대해적 시대
3세대 : 게임판타지라는 신장르와 장르문학 시장의 쇠퇴
사실 필자는 이러한 시대적 구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무수한 카오스가 혼재되어 있는 다양체에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국면 파악을 단순화시키는 폭력적인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세대구분은 장르문학의 세월과 그 흥망성쇠를 설명하는데에는 최선의 방법이라 하겠는데, 이 세대 간 경계마다 선명한 '불연속'이 존재하며 바로 그 불연속을 추동하게 한 여러 유의미한 변인들도 그 지점에서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다.
1세대로 대표되는 소설은 크게 <드래곤라자>, <세월의 돌>, <퇴마록>, <룬의 아이들>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주로 PC통신을 통해 연재되다가 인기를 이끌어 출판화가 이뤄진 케이스들로, 놀랍게도 지금의 시장에서도 적게나마 나름대로의 수요를 확보하며 여전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작 고전들이라 하겠다.
특히 필자는 이 중에서도 전민희 작가의 <룬의 아이들>을 각별히 좋아하는데, 여러 장점들을 열거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섬세한 묘사로 캐릭터들의 애환과 깊이를 살려냈다는 점이 단연컨대 최고였으며 스토리 전개도 매우 탄탄한 편이었다. 오래 전 판타지 소설을 죄다 중고로 내놓아버린 지금에도 필자의 책장에는 여전히 <룬의 아이들>만은 꽂혀있다.
여하튼 이 세대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을 갖는데, 우선 첫째로 순문학적 성격을 강하게 띄어 소재나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는 판타지를 활용했지만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은 오히려 일반적인 문학소설의 그것에 가깝다. 따라서 1세대 소설 애호가들이 내세우는 선호 근거로는 판타지적 모티프를 채용한 소설 즉 '정통 판타지'라는 것, 그리고 작품 전개에 있어 단단한 문체나 묘사 그리고 문학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우리가 흔히들 아는 검술이나 마법의 단위, 작위, 서사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각종 클리셰 등 판타지소설의 장르적 관습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장르 초창기인 관계로 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익숙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말 그대로 '자유로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판타지 세계에 존재할 법한 이야기들을 그려냈다는 특징이 있다.
여하튼 살펴본 것처럼 두 가지 특징은 모두 전환점 즉 기성 문학의 색깔 탈피와 더불어 본격적인 판타지 장르로 유입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판타지 장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도기로 인해 결과적으로 현대 판타지에서는 볼 수 없는 모호성 혹은 독특한 개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독창적인 발상과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엿볼 수 있다. 필자는 초창기의 소설들을 아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자생적인 한국형 판타지 문학 혹은 장르문학으로서 첫 포문을 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작품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최초의 씨앗은 무구한 가능성을 품고 장대한 세계를 발아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1세대에 이어 시기적으로 크게 뒤처지지 않았지만 1세대와 명확히 정체성이 달라 2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비뢰도>, <묵향>, <가즈나이트>, <카르세아린>, <드래곤레이디>, <신무>, <아린 이야기>, <더 크리처> ... 외에도 무수히 열거할 수 있는 대다수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다분히 장르판타지의 관습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평이하여 1세대에 비해 상당히 진입장벽이 덜하다. 쉽게 말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진 지금 읽는다면 상당히 유치하다고 느끼겠지만, 어렸을 적에 읽었던 필자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순전히 재미있고 좋은 기억들로 남아있던 것 같다.
이들 작품들은 1세대에서 제시한 공통점을 정반대로 지니고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 문학성보다는 재미, 오락성이 훨씬 강조되고 있으며 전형적인 클리셰나 말초적이라 할 수 있는 위로 방식을 중심으로 서사 전반을 이어나간다. 달리 말하자면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글의 힘'에서 '읽는 이의 재미'로 수평 이동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설정의 측면에서도 드래곤, 엘프와 드워프, 소드마스터, 서클과 클래스 개념, 공후백자남, 정령의 계급과 이름 등 장르판타지 공용 문법이 적용되는 가운데 작품별 오리지널리티가 나타나는 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은 2세대 작품들은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로 명명하며 일종의 멸칭처럼 사용한다. 이 시기에는 확실히 다른 작품의 설정이나 클리셰를 복제하여 차용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최소한의 소설적 기준도 지키지 못한 작품들도 수두룩했다. 실제로 당시 양판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글은 무수히 많으며 심지어 위키에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 멸칭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좋은 씨앗, 다시 말해 기껏 무구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장르문학의 잠재성을 망가뜨렸다는 불만과 비판적 의식이 담겨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비판들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시장 몰락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당시에는 출판사도, 작가도, 독자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최저의 기준과 그것을 성찰하고 다음으로 이어갈 수 있게끔 하는 내부적 담론의 활성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더군더나 도서대여점의 쇠퇴라는 물리적 변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시장은 지속할 수 있는 동력 자체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장르문학의 시장은 확실히 몰락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3세대는 앞서 이야기한 대여점 쇠퇴 등 여러 전반적 조건들로 인해 장르문학의 쇠퇴도 본격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가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이기도 한데, 필자는 2세대 후반에 이르러 시장의 황혼을 예감하고 라이트노벨로 노선을 옮겨갔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살펴본 여러 문헌이나 자료들을 바탕으로 구성해보자면 '게임판타지 그리고 달빛조각사'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달빛조각사와 소드아트온라인 등으로 대변될 수 있는 한일 양국의 게임판타지는 이후 오늘날의 웹소설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스테이터스', '상태창' 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필자 역시 웹소설을 다시 접하게 되면서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상태창'이나 '시스템창'이었는데, 달리 말하자면 1, 2세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 이질적 요소가 지금의 웹소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 장치는 이미 게임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층에게 별 부담없이 다가올 뿐만 아니라(전형성) 효율적이고 속도감 있는 전개를 요하는 웹소설에 더할나위없이 부합되는 서사적 장치였던듯 싶다. 극단적으로 말해 장장 몇 문단, 못해도 몇 줄의 묘사를 요하는 국면들을 시스템창 단 한 줄로 정리해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쉽게 말하자면 소설 진행과 서술에 있어 많은 부분을 전담시킬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무척 보기 편했다는 것이다. 이 서사적 장치가 곧장 장르적 관습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기표 이상으로 다분히 의미심장한 함의를 주는데, 이에 대해도 기회가 된다면 추후 '웹소설 - 시스템창의 미학'이라는 글로 다뤄보고자 한다.
이상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장르문학 1~3세대에 걸친 시장의 흥망성쇠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맥락만으로도 충분히 웹소설 시장의 전사(前事)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본다면 왜 하필 지금 웹소설이 흥했는지 분명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형 장르문학에 영향을 끼친 외부 요인(첫 번째 글)과 내부의 변화(두 번째 글, 본 글)와 별개로 제 3의 요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지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기억
임명묵, "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slownews, 202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