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웹소설의 전신인 장르소설의 흥망성쇠에 대해 다뤄보았다. 장르소설은 1, 2, 3세대에 걸쳐 크나큰 정체성의 변화를 겪었으며, 대여점의 축소 등 여러 외부 변인으로 인해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제기가 가능해진다. 장르소설 시장이 쇠퇴했는데 어떻게 '웹소설'로 탈바꿈하여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른 웹소설 인식 변화
이 질문은 당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을 도출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디어 환경으로서의 웹 공간의 출현이 장르소설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주목함으로써 구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은 물리적 여건부터 살펴보자. 아시다시피 2009~2011년도에 이르러 대한민국에 독특한 사회문화적 현상이 벌어졌는데, 때마침 스마트폰이 출현하면서 너나할 것 없이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갈아타기 시작한 것이다. 스마트폰의 이례적인 보급 속도로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소지하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는데, 위키에 의하면 2009년도 말 스마트폰 소지자가 2%에 불과했던 것이 2013년에 무려 75%에 도달했다고 한다. 온라인 접속이 가능했지만 미묘하게 까다로운 절차와 은근한 비용을 내야만 했던 피처폰 시절과 달리 스마트폰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인터넷 즉 웹과 상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장르소설의 쇠퇴는 pc방이나 만화방 등과 같은 2000년대의 놀이거리보다도 훨씬 간편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대체재가 등장한 것과 관계가 아주 없지 않다. 실제로 필자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스마트폰이 없었던 학창시절의 주된 놀잇거리는 대체로 야구나 축구같은 운동, 소설, 동활, 만화, 그림, 카드게임, PC방 등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에는 대부분의 놀이는 간편하게 한 손으로도 수행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안에서 이뤄졌다. 어찌 보면 일상적 생활반경에는 위치하지만 다소간의 공간적 제약(향유하기 위해 찾아가야한다는)이 존재하는 대여점은 그 시점에서 몰락이 내정된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장르소설 시장이 '웹'이라는 미디어 환경의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곧장 흥행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 다다르기까지에는 몇 가지 중간과정이 있었다. 아마도 당시 웹소설 시장의 관계자들이 참고했을 선행사례가 '웹툰'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는데, 다만 웹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웹툰의 경우 웹소설처럼 오프라인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국내 만화의 경우 일본 만화의 강세로 인해 저명한 일부 화백들을 제외하면 별다른 공급이 없었으며 대중들의 실질적인 수요나 시장 현황도 매우 미약한 상태였다. 때문에 초창기에서는 여러 커뮤니티에서 아마추어 만화가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만화가 올라왔던 것이, 점차 포털사이트 춘추전국시대가 벌어지면서 사용자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으로 각 포털에서 웹툰 서비스를 개설함으로써 조금씩 본격화되었다. 이 즈음에서 시장 형성과 더불어 웹툰의 초기 수익 모델도 만들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웹툰 등용문도 대체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인기를 끈 만화가들과 계약을 맺어 포털에 연재하는 식이었다. 즉 웹툰은 웹소설처럼 '오프라인 -> 온라인'이라는 미디어 전환을 거치지 않았고, 계보학적으로 보자면 이전 출판만화시장의 온라인적 전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터넷 환경에서 자생한 만화연재 문화가 포털 사이트들의 시장화에 맞물려져서 덩치가 커진 결과에 가까웠다. 우리가 잘 아는 강풀이나 조석이 바로 이 세대에 출현하여 대대적으로 히트한 웹툰 만화가들이며, 실제로 초기의 웹툰 작가들은 대체로 만화가적 기본기가 상대적으로 빈약했으며 그것을 대중의 감성이나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보완하곤 했다. 일본만화와 변별되는 한국 웹툰의 독자적 정체성도 이 지점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 전반에서 만화는 공짜로 본다는 인식이 강했다는 데에 있다. 또한 당시의 웹툰은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어 포털 서비스의 연장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수익과 관련한 객관적 지표를 산출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웹툰의 인기는 포털의 인기에 힘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의 시각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웹툰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콘텐츠 단독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음을 공인받은 전환점이 곧 '레진코믹스'라는 웹툰 플랫폼의 출현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화 전문 플랫폼과 부분 유료화을 시도한 레진의 대대적 히트는 웹툰 콘텐츠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시장성과 수요가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었다. 이 결정적 사건은 웹툰 뿐만 아니라 여타 콘텐츠를 향한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었으며, 네이버나 카카오 등 대형 플랫폼에서도 본격적으로 웹소설 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졌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웹소설의 전신(前身)으로서의 장르소설
미디어 환경이 이처럼 변화함에 따라 웹 시장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라는 인식이 생겼으며, 엉덩이가 무거웠던 기성 플랫폼들도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웹소설로 나름대로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던 조아라나 문피아, 북큐브 등에 이어 네이버웹소설과 카카오페이지까지 참전한다. 이것이 2010년도 초반 시장의 움직임이었다. 바야흐로 콘텐츠 플랫폼 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렇게 시장의 그림이 대략적으로 짜여짐에 따라 그 장(場)을 채울 콘텐츠가 필요했던 플랫폼들은 기존 장르소설 작가들을 대거 계약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인 등용문을 적극 활용하여 시장의 수요와 공급 균형을 얼추 맞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르소설은 웹소설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웹소설의 전신(前身)을 장르소설로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의 갑론을박이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장르소설의 문법이 웹소설의 문법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허나 필자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이를 반박하고자 한다. 첫째, 초창기 웹소설의 생산자/소비자가 이전 장르문학의 생산자/소비자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 둘째, 장르소설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재미/쾌락적 성격과 그것을 제공하는 방식이 웹소설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공유한다는 점 등등.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웹소설과 장르소설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의 차이는 미디어 즉 매개체의 변화와 그 적응에서 오는 표현적 차이에 가깝다.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이야기인데, 동일한 소재라고 할지라도 '한 권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장르소설과 '한 편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웹소설은 각각에 맞는 콘텐츠 전략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몇 가지 차이점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웹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매 편마다 구매하여 읽게끔 하는 수익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시간대는 출퇴근 그리고 잠들기 직전의 시간이다. 이 말은 즉슨 웹소설은 우선 매 편마다 다음 화가 궁금해지도록 서사를 구성해야 하며, 출퇴근길의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도 부담없이 짬내어 가볍게 읽을 성질의 것이라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장르소설과 웹소설은 콘텐츠 전략은 필연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연장선상에서 웹소설의 문법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웹소설은 문단이나 문장 묘사도 장르소설에 비해 훨씬 짧고 단순명쾌할 뿐만 아니라 시각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유치하게 보이나 이는 몰입의 평이성을 위한 것이다. 아울러 웹소설은 특정 장면에서는 묘사하거나 멈추어 천천히 가는 것보다는 속도감 있는 전개로 새로운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전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system창이나 상태창은 묘사나 전개를 비약적으로 줄이고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곧장 웹소설 문법에 흡수될 수 있었다.) 웹소설 작가로 입문하면 반드시 숙달해야 하는 '절단신공'도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일련의 콘텐츠들을 문화콘텐츠 연구에서는 '스낵컬쳐'라는 용어로 명명하는데, 대체로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숏폼 콘텐츠 등 별 생각없이 볼 수 있으며 가볍게 소비되는 콘텐츠 전반을 가리킨다. 웹소설은 이러한 스낵컬처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낵컬처 콘텐츠의 태동은 현대인의 생활양식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결과라는 데에 있다. 결국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 콘텐츠 성격의 차이, 시장의 형태, 소비자의 선호 등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웹소설, 아니 문화콘텐츠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기성 순문학 종사자들에게는 웹소설이 소비자의 욕망이나 요구는 물론 그들의 생활양식에 맞추어 최적화된 콘텐츠라는 점을 간과하고 콘텐츠의 내용(글)만을 들여다보기에, 웹소설이 예술성과 문학성이 부재하며 그저 쾌락적이고 소모적인 저열한 장르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 편의 글을 통해서 부족하지마는 대략적으로나마 웹소설/장르소설의 계보학적 맥락을 탐색해보았다. 크게 세 가지 맥락을 살펴보았는데, 첫째로는 장르소설에 영향을 끼친 외부요인으로서 도서대여점과 라이트노벨의 출현을 논했으며, 둘째로는 장르소설 이십년 역사의 세대 구분을 통해 각각의 특징과 거시적 흐름을 읽어보려 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되는 이번 글에서는 웹소설의 태동을 성립케 한 가능조건으로서의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훝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변화로 인한 웹소설의 진화도 함께 탐색해보았다.
이상으로 웹소설의 과거에 대한 글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의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수 있는 웹소설의 주변부 이야기를 새롭게 논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