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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Sep 14. 2022

[시리즈]4. 장르소설이 장르소설인 이유?(1)

장르(분류체계)인가 장르(genre)인가, '장르'의 정체에 대해서

웹소설 시리즈를 쓰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장르소설은 왜 '장르소설'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을까? 분명히 다른 이름들도 가능했을 것이다. 경소설이나 가십소설, 통속소설, 상업소설, 재미소설 등의 이름도 완전하지 않지만 이들의 특징을 약간은 담아낸다. 따라서 이 명칭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장르'이라는 명칭이 이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이 이름이 해당 작품군들이 지니고 있는 특정한 일면들을 전면화하고 있거나.




일반적으로 이렇게 붙여지는 수식어는 해당 군(群)에서 서로 비슷한 가족유사성을 지닌 특정 집합들을 총칭하기 위한 단어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낭만주의 작품'이라고 일컫어진다면, 인류사 전체에 걸쳐 나타난 무수한 문학작품들 중에서도 시기상 낭만주의 사조에 만들어졌다거나 낭만주의적 주제를 재현하거나 구조적으로나 표현적으로 낭만주의 특유의 감성을 구사하는 작품들로 한정될 것이다. 따라서 '낭만주의'로 포괄된 집합을 분석할 경우 일련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자아의 탐구, 창조성의 찬양, 감상주의적 태도, 인간찬미, 정열적 태도 등을 갖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수식어는 해당 작품군의 본질을 부분적으로 포착하여 이해를 효율적으로 단축시켜주는 개념적 도구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르소설'의 수식어인 '장르'는 '낭만주의'나 '고전주의'와 같은 개념처럼 고유한 함의를 갖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구분적/유형적 용어라는 사실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장르는 '문예양식의 갈래, 특히 문학에서는 서정, 서사, 극 또는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따위로 나눈 기본형'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아울러 토도로프는 장르는 단지 '문학 담화의 탐구를 위한 편리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으며, 유형론과 장르론과의 비교를 통해 '장르론으로 바라볼 때 나타나는 문학연구적 이점'이 무엇인지를 진술한다. 이렇듯 장르는 특정 의미를 가진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차라리 '양식의 분류체계'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장르소설은 이러한 함의를 내포한 '분류적/갈래적 소설'이라는 것인가? 당연하지만 이렇게 이해한다면 장르소설의 의미가 다분히 왜곡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놓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문학에서의 '장르' 개념과 산업 현장에서 말하는 '장르' 개념이 다분히 다르다는 데에서 나오는 차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문학(文學)의 연구에서의 장르론은 대체로 갈래연구 혹은 유형론적 연구를 의미했다. 다만 단순히 시, 소설, 수필 등과 같은 대분류적/형식적 구분을 넘어 보다 구체적으로 작품군의 아이덴티티를 가르는 경계선이 필요했기 때문에 갈래의 분화와 그에 따른 고유한 정체성의 생성을 주목하기 위한 맥락으로 장르론이 대두되어졌다. 다시 말해, (토도로프에 의하면) 장르는 문학/예술 전반에 걸쳐 재현되는 문학적 혹은 역사적 유사성을 경계짓기 위해 나타난 분류적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장르'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익히 봐왔던 '장르소설' 혹은 '장르문학'에서의 통념으로부터 상당히 거리가 먼 개념일 수밖에 없다.




이 사진은 본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상업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장르'는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생겨난 것일까? 짧은 공부로 나름대로 찾아본 결과 우리가 익히 아는 통념으로서의 장르가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곳은 다름 아닌 '영화산업'이었다. 일찍이 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무수히 생산되는 영화들을 카테고리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에 따라 각 영화들에게서 존재하는 내부적 동일성(패턴)에 따라 구획화하려는 일환으로 장르 개념을 도입하여 재개념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창기 영화에서부터 곧장 장르론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아니다. 라파엘 무안에 의하면 장르의 규정은 귀납적으로 수행되어졌으며, 특정 영화군에 대한 담론적 실천이 어느 정도 굳어질 즈음에 이것을 통약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누아르, 서부영화, 로맨스영화, SF영화, 액션영화, 공포영화... 등과 같은 장르들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장르 개념은 전통적인 문학적 맥락을 벗어나 영화에 편입됨에 따라 새롭게 재개념화되어 영화의 제도적 전통으로 서서히 굳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사실 일련의 흐름은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예컨대 어떤 작품이 어떤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의해 생겨난 '특정 장르'라는 말인즉슨 그 작품은 해당 장르에서 요구되는 장르관습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토도로프의 말을 참고하면 이는 자연스레 다음의 두 가지로 귀결된다. 첫째, 작가는 <글쓰기의 모델>을 제공받는다. 즉 해당 장르에서 전형적으로 이뤄지는 일련의 서사구조나 행위, 캐릭터 등에 관한 공통의 상(狀)을 갖고 그를 바탕으로 작가 고유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것이다. 둘째, 독자는 <기대지평>을 갖는다. 즉 독자는 기존의 독서 경험, 즉 해당 장르의 대략적인 이야기 형태를 이미 숙지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향유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해당 작품을 읽기도 전에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예상되는 이야기의 재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클리셰'의 개념이 잠재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캐럴린 밀러가 장르를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수사학적 방식이 정형화된 것'이라고 정의한 것은 깊이 눈여겨볼 만하다. 이 장르관습은 처음 읽을 때에는 상당한 진입장벽이지만 그것을 넘어선 이후로는 정보 전달이나 이야기 압축을 수행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반복적 수행 속에서 정형화된 소설 내부의 관습은 곧 해당 장르의 '정체성'으로 굳어질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 양쪽 모두에게 창작적/소비적 편의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장르관습은 독자에게 읽기의 부담을 경감해준다는 맥락에서 '쉬움'과 '대중성'을 지향하는 문화콘텐츠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는 셈이다.


요점은 이러한 장르 구분이 학문적으로는 불완전해 보일지언정 경험적/산업적으로는 매우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것이 해당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적절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장르'가 생산자/비평자/소비자들에게 각각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반증 가능하다. 가령 비평가들에게는 단순히 영화 유형의 구분을 넘어 해당 영화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척도를 제공한다. 아울러 생산자는 대략적인 지도 그리기와 더불어 장르적 관습 구축 및 클리셰 깨기를 폭넓게 활용할 뿐만 아니라 수요 예상을 통해 흥행 정도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는 기대 지평과 편의성을 제공받는다. 결국 장르론은 산업적 필요와 대중의 이해관계와 일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재개념화 된 독특한 케이스인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도 어느 정도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차적으로 순문학/장르문학의 이분법적 구분은 영화에서의 관습이 고스란히 전이된 결과로 짐작된다. 아울러 그 장르에 내재한 '장르관습'이 해당 문학적 실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데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인으로 기능했던듯 싶다. 필자의 생각으론, 아마도 여기가 '장르소설'이라는 이름의 비밀이 밝혀지는 지점이다. 물론 순문학/장르문학은 학술적으로 통용되는 구분은 아니지만 향유자의 실제 수요(독서자의 요구)에 따른 구분으로서는 무척 유용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독자가 예술성과 심미성,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근원적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싶어한다면 자연스럽게 순문학을 읽게 할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 단순히 재미를 위한다면 장르문학을 읽도록 권할 것이다. 이론적으론 분명하게 가르기는 어렵지만 경험적 층위에서는 층분히 그렇게 구분짓는것이 가능하고 또 무척 유용하다. 다시 말해, '장르문학'이라는 총칭은 순문학과는 명확하게 다른 궤를 지향하며 독자의 수요에 응답하는 하나의 통합된 거시적 경향으로 충분히 기능해왔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본 글을 요약해보면 장르문학은 SF, 판타지, 무협, 로맨스 ... 등 대중문학의 다양한 범주들을 일컫는 개념이지만, 공통점으로는 내부적으로 '장르적 관습'이 존재하며 창작자와 향유자 양 쪽 모두 거기에 기대고 있으며, 그로부터 공통의 집단정체성을 구축한다는 점이 동일하다고 하겠다. 나아가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일상 속에서 이뤄지는 가치판단을 볼 때 장르문학은 비록 각 군마다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장르문학에 속하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속성이 있는듯 보인다. 가령 순문학과 대조하자면 통속성, 재미, 오락성을 지배소로 삼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장르문학이 공통적으로 갖는 속성들에 대해서는 추후 다뤄보고자 하며 본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짓고자 한다.

 



참고문헌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기억

김현 역, 『쟝르의 이론』, 문학과지성사, 1994.

츠베탕 토도로프, 『담론의 장르』, 예림기획, 2004.

라파엘 무안, 『영화 장르』, 동문선,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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