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을 바라보는 문단의 달갑지 않은 시선과 작가주의
웹소설을 바라보는 순수문학의 시선은 마냥 달갑지 않다. 당연한 소리인가? 그러나 이 달갑지 않은 시선에는 복잡한 생각이 담겨있다. 여러가지 말로 열거할 수 있겠지마는 필자는 그것을 다음의 문장으로 환원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읽지 않는 글과 읽혀지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외로움'. 결국 순문학 작가는 이러한 시선과 별개로 사람들에게 읽혀지지 않는 것과 읽히고 싶어하는 작가적 욕망 사이의 길항에서 고독하게 몸부림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이야기적 욕망을 포함하여 무수한 내적 고민과 인간적 성찰을 거듭한 끝에 내면세계가 단단해진다. 그 단단한 대지로부터 피워내는 그 사람의 씨앗(흔적)이야말로 필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문학(文學)'의 묘미가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순문학에는 다른 맛이 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고행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을 진정으로 존중한다. 우리들의 세상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들이 필요하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겠지만 순문학과 대중문학, 특히 순문학과 '웹소설' 사이에는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크나큰 차이가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순문학은 읽는 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재하다. 이것이 상당히 아이러니한 지점인데, 설령 타자를 향한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읽히지 않음으로 생겨난 주체(작가)의 결핍'이지 그 자체로 사람을 향한 궁극적인 이타적 애정(아가페적 사랑)은 아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순문학 작가들은 지독하게 아름다운 이기주의자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언어의, 서사의, 묘사의, 장면의, 의미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추구하는 순수문학과 조금 방향성은 다르지만, 대중문학은 보편적 이야기를 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실제로 김영하 등과 같은 대중문학 작가들의 인터뷰를 자세히 뜯어보면 글에 자신의 '색깔'은 존재하지만 결국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유달리 소통을 많이 하며 사회활동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대중문학 작가들의 목표는 누구보다도 널리 이야기되는 것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읽는 이들 역시 보편적 대중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독서를 취미로 삼는다'고 말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들이 여기에 위치할 것이다.
따라서 기성 작가와 아직 문단에 오르지 않은 작가 지망생들은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곤 한다. 스스로 사람들에게 좋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대중문학 작가가 될 것인지, 혹은 문학평단이나 평론이 선호하는 예술성을 극한으로 추구하여 시대정신과 작가로서의 메세지를 담아내는 순문학 작가가 될 것인지를. 전자는 마땅한 루트가 없기 때문에 각종 공모전에 원고를 들고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며, 후자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문단의 권위를 업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순수문학 작가과 대중문학 작가들은 분명히 고전적 의미에서의 '작가'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내용을 더 덧붙이자. 확신에 가까운 잠재적 생각이지만, 필자는 웹소설은 순문학은 물론 대중문학보다도 좀 더 멀찍한 곳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본 것처럼 순문학과 대중문학 사이에 경계가 있다면, 웹소설은 '대중문학'의 하위 분야에 속해있거나 혹은 그 대중문학보다도 훨씬 더 멀찍한 자리에 위치하여 오락성과 재미, 장르적 관습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이야기 문학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웹소설은 이야기 문학이 아니라 '이야기 산업'이라고 해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순문학/대중문학/웹소설(통속소설)의 삼분법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대중문학과 웹소설을 구분하려 하는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들 사이에는 충분히 존중할 만큼의 정체성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에 대해서는 이전까지의 글을 통해서 어느 정도 논의한 바 있다.
다만 '작가'라는 맥락에서 좀 더 논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우에는 작가의 아우라가 거의 절대적이다. 평론의 권위에 의해, 쌓여진 역사에 의해, 체계에 의해 정해진 <좋은 글쓰기의 기준> 에 의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인문학적 보편정신에 의해 작가의 위상이 종합적으로 결정된다. 물론 그 과정에 그것을 인내한 작가 자신의 고단한 여정과 고뇌도 이 흔들리지 않는 위상에 가미되고 있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굳건한 성(城)이다. 수천년 역사와 작가의 자의식이 더해져서 만들어내는.
더불어 대중문학 작가도 여기에서 비교적 자유롭지만 노골적이진 않아도 어느 정도 작가주의적 전통에 기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극히 일부의 지식인 계층을 제외하고 문학판의 소비 양태를 들여다보면 대체로 '글 자체'를 들여다보고 스스로 선호를 결정하기보다는 문단에 의해 검증된 '작가' 혹은 평론가(문화매개자)를 찾고 그로부터 도움을 받아 가지를 뻗어나가는 형태이다. 워낙에 글을 접하고 '읽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보니, 대중의 입장에서는 '편의의 형태'가 이런 형식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단 문학 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전통적인 장르는 대체로 매개자가 강한 위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웹소설은 형편이 다르다. 웹소설에서 '작가'의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상대적으로 옅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또한 독자들이 부담스럽게 느낄만한 작가의 자의식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웹소설 시장에서 작가란 그저 소비자에게 있어 익숙한 문법이기에 선택의 기준이 될 뿐 그마저도 소비자가 원하던 것이 아니면 곧바로 선호에서 배제된다. 예컨대 필자는 <멸망 이후의 세계>, <전지적 독자 시점>를 쓴 싱숑이라는 웹소설 작가를 좋아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나의 취향에 부합되기 때문일 뿐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웹소설에서는 평론가 즉 문화매개자의 역할도 그다지 의미 없다. 읽는 난이도나 이야기의 접근방법부터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대상을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자의 존재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아마도 이 판에 평론가가 잘 없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의 연장에 있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이 판에 존재할 문화매개자의 역할'은 기성의 문학 사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웹소설 작가들은 스스로 작가라는 고유한 정체성과 자의식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매일 바쁘게 글을 써 내려가야만 하는 소위 '직장인'에 가까운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욕망과 고민을 차분히 풀어가기보다는, 차라리 대중들의 욕망을 써 내려가는 주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웹소설'은 작가 주체의 욕망-대중욕망의 변증법적 종합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웹소설은 그냥 나와 취향이 맞질 않으면 다른 작품으로 미끄러지면 그만이다. 그렇게 온전히 자기의 선호와 취향에 따라 작품이 취사선택된다. 선호되지 않으면 곧바로 거부당하며 시장에서 소외된다. 결국 포스트모던, 혹은 '저자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실현된 영역이 바로 이 웹소설 시장이 아닐까. 물론 여기서 포스트모던은 결코 진정한 의미로 '포스트모던'하지 않다. 거대 질서와 체계의 해체가 50-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던 바이라면, 웹소설 시장에서는 상업성, 즐거움이나 재미, 오락성 따위의 새로운 보편적 질서가 세워지고 있으니까. 어쩌면 대중에게로의 '모더니티 권력의 수평적 이동'(권력 이양)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新) 모더니티의 질서는 이러한 조짐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써보고자 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웹소설 작가는 언제나 대중을 고려해야만 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얼핏 특권으로 오해될 수도 있는 작가의식이 선명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메세지를 담아내기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대중들 역시 의미의 생산보다는 '이야기 소비'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웹소설 시장은 이렇게 작가-대중 간의 상호 합의가 암묵적으로 결정된 시장이다. 따라서 웹소설 작가가 고민하는 지점은 순문학 작가의 그것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며 보는 이의 흥미를 끌어낼 것인지에 온 전력을 쏟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텍스트 역시 전적으로 '독자'를 고려하면서 짜내는, 온전히 소비자들의 만족을 위한 이야기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문학의 잣대를 웹소설에 대는 것은 그 자체로 불공평하며 무의미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웹소설 시장이 유독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흥행공식이 존재하며 또 그러한 책들이 횡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 성공의 공식은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욕망이 수렴되는 보편적 지평이 존재하며, 바로 이 보편이 각자에게 내재된 욕망과도 맞물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콘텐츠학은 궁극적으로 보편학이자 대중학이다. 이전에 본 '리좀학=대중분석'(들뢰즈, 천개의 고원 53쪽)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는데,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설령 대중이 무한한 형태로 뻗어나가는 리좀일지라도 결코 중심축이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한계, 즉 하다못해 생물학적 특징을 공유하는 한 매우 넓은 의미에서라도 옅은 보편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기에 지니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문화콘텐츠학의 가능성을 꿈꾼다. 지금 쓰고 있는 웹소설 시리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낼 '문화콘텐츠 시리즈'는 궁극적으로 그 길을 보조하기 위한, 혹은 하다못해 그들을 옹호하기 위한 나의 외로운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길은 아직도 멀게 느껴진다.
참고문헌
나의 기억 그리고 나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