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근 Sep 30. 2022

[시리즈]7. 웹소설과 순수문학(2)

웹소설을 향한 달갑지 않은 시선에 숨겨진 철학적/문학적 전통들

순문학에서 웹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은 애써 분석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전 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개인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순문학 작가들의 이중적 욕망과는 달리,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문학인들의 위기의식과 불안도 엿볼 수 있다. 이미 문단에서도 '문학의 종말' 혹은 '순문학의 위기'이라면서 각종 평론으로 우려를 표명하거나 심지어는 책과 논문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연구 때문에 도서관을 다니면서 그러한 글들을 상당히 많이 읽었는데 그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었다. '오늘날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전통적 의미로서의 문학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으며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담론과 그에 따른 문학적 형태가 요청된다.' 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필자는 이 문구에 나타난 저자의 우려가 현재의 도서시장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을 조금 정정하자면, 문학인들이 생각하는 위기는 기성 문학의 위기이지 결코 문학 일반의 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글의 총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책의 양은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고 다양해졌으며, 구체적 개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사유에 대한 욕구 역시 예전보다 대폭 늘어났다. 따라서 이 문구는 기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즉 전통적 맥락의 문학이 축소된다는 아쉬움에서 오는 심적 토로와 불만을 '인문학의 위기' 혹은 '문학의 위기'라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명제로 치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맥락을 염두에 두며, 이 글에서 본격적인 관심주제로 삼는 것은 이 불만스러운 시선을 뒷받침하는 여러 철학적/문학적 전통들과 그것의 논증들에 있다. 즉 필자가 보기에 웹소설(보다 정확히는 통속소설이나 대중소설)이 기각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여러 논리적 당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가 말했듯이 절대적 진리나 보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진리를 조직하려는 담론의 의도, 즉 그것을 생산하는 '지식-권력'이 있을 뿐이다. 웹소설의 비판은 바로 이러한 지식-권력의 계열체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꾸준히 생산될 것이다. 물론 '웹소설'이라는 특정 분야를 겨냥하는 담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격은 보다 커다란 거대 담론으로부터 온다. 웹소설은 더 크게 보면 '대중문학'에 속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산업'이라는 대분류에 속한다. 달리 말하자면, 대중문학과 문화산업을 향한 비판이 곧 웹소설의 비판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미 문화연구/문화산업 연구/문화콘텐츠 연구에서는 대중문화/문화산업/문화콘텐츠를 비판하는 일련의 지적 계보들을 정리한 바 있다. 다만 필자는 이를 크게 두 개의 거시적 흐름으로 환원시켜 내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번째의 거시적 전통, 맑스주의 계열의 비판.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신주의(fetishism) 비판, 이데올로기 비판, 대중 지배와 착취로서의 문화산업 비판 등등이 이 계열에 모두 해당된다. 아울러 이쪽 분야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비판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역시 맑시즘적 사유를 계승하여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들의 담론 속에 담긴 논리는 오늘날의 웹소설에도 고스란히 통용되고 있다고 하겠다. 문화산업이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하고 있다는 그들의 논리는 뼈아픈 질타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맑스주의 계열의 비판에서는 '이데올로기론'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웹소설은 언제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담지하며,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웹소설의 창작자는 항시적으로 이데올로기 생산의 주체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데올로기론은 모든 콘텐츠를 언제나 구조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생산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논리의 반박 자체를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그 자체로 환원주의적 폭력성을 갖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80-90년대즈음의 문화연구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그것에 저항하는 주체의 길항 등의 역학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이론적 시도도 결국은 문화 행위를 결국 '지배-저항'이라는 이분법적 행위 논리로 귀속시킬 뿐이기에 문화콘텐츠 생산과 기획에 있어 아주 의미있는 담론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낙산공원 성곽길, 아침산책 도중에


두번째 거시적 전통, 플라톤주의의 비판. 이 계통은 근대에 출현한 맑스주의에 비해 훨씬 유구한 전통을 지녔기에 사실상 서양 철학의 전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비약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주의라고 지칭한 것은 플라톤 이래로 근대까지의 철학이 초월성, 완전성을 지향하는 정신적 태도를 갖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철학적 태도가 존재했으며, 이것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다가보면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는 뿌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지적 계보는 특히 철학의 예술적 진술, 즉 미학(美學)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미(美)의 무목적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초월주의적 태도는 그자체로 플라톤주의의 예술적 연장에 다름아니다. 결은 다르지만 해체주의자인 데리다는 이를 '로고스주의'로 명제화하며 언어와 이성의 폭력성을 분명하게 공격하고 있다.(데리다는 음성주의뿐만 아니라 로고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수행했다.)  


이러한 플라톤주의적 전통에서 입각하여 바라볼 때 웹소설은 달리 긍정할만한 면이 없다. 특히 가령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비교할 때 순수예술을 옹호하는 측에서 나타나는 모더니즘 논리는 직접적으로 웹소설 비판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웹소설을 긍정하려는 연구자들이 포스트모던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것(필자를 포함하여)도 일련의 지적 전통과 아예 무관하지는 않다고 하겠다. 소위 저자의 죽음이나 해체주의적 인식을 적용하여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내려는 조류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결국 이 두 개의 거대 전통은 우리들의 가치관을 구성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 차원에서도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이끌고 있는 오래된 고목(古木)들이라 하겠다. 끝이 보이지 않기에 감히 우러러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나무들. 문화콘텐츠학 연구를 자처하는 필자는 학문의 최전방으로 뛰어들 때마다 이 나무의 압도적인 현존과 반발을 자주 체감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언어와 행동으로는 구체화되지 않는 무의식적 층위에서 보내어지는 비(非)이해의 시선으로 체감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에피스테메 아래에서 웹소설은 물론 웹소설이 지상가치로 삼는 재미와 즐거움이 필연적으로 가치 폄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거대한 학문적 체계에서 웹소설이 설 자리는 부재하다. 즉, 진정한 의미로의 긍정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활용하여 새로운 학문적 인식을 세우는 길 외에는 달리 없어 보인다.





참고문헌

나의 기억 및 나의 생각

마단 샤럽,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욱동, 문학의 위기

박유정, 미의 본질과 플라톤주의 - 서구 사유의 전통에서 드러나는 미적 본질의 초월주의적 성격(논문)




이전 08화 [시리즈]6. 웹소설과 순수문학(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