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말 중에 '후킹(hooking)'이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을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필자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사소한 비밀을 하나 고백하자면 필자에게는 올해 초부터 남몰래 쓰는 웹소설이 있으며, 이것을 현직 웹소설 작가들을 포함하여 웹소설 관계자나 시나리오 작가 등 몇몇 지인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리 오래 전에 창작판을 떠났어도 그 경험이 어디 가겠냐며 제법 자신있었다. 그러나 나의 소설을 보고 난 후 공통적으로 들은 것이 곧 "네 소설에는 후킹이 없어."라는 말이었다. 조금은 뜨금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쓴웃음도 함께 나왔다. 이것은 그 자체로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나 자신을 죽이고 독자를 위한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다는 본심을 들킨 것이다. 그렇다. 나의 소설은 단지 나의 오랜 판타지 향수와 더불어 그려내고픈 심상(心像)을 웹소설의 형식으로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작가답지 못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내 웹소설은 후킹의 부재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그들이 한결같이 필자의 소설에는 없다고 가슴아프게 지적한 '후킹'이 도대체 뭘까. 후킹(hooking)은 본래 '낚다, 갈고리질하다, 걸다'라는 사전적인 뜻을 지녔으며 이것이 후킹 포인트(hooking point)라는 마케팅 용어로 자리잡으면서 '소비자의 정서나 마음을 사로잡는 마케팅의 심리적 전략'이라는 뉘앙스로 의미확장이 이루어졌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후크송(hooksong)' 역시 중독적이고 반복적인 멜로디로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다는 맥락에서 발생한 신조어로 이런 개념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후킹은 사람들의 마음을 낚으며 소비자들로 하여금 상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마케팅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식과 용법은 웹소설로 옮겨가면서도 그리 다르게 쓰이지 않는다. 다만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후킹은 과거의 장르소설 문법에는 없었으나 웹소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장르소설에 후킹 포인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긴 호흡 즉 '한 권'의 길이로 결정되었기에 작가에게 그리 주목되는 테크닉은 아니었다. 장르문학의 이십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념적 맥락이 언어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해당 테크닉의 비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래서인지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장르문학에 도전해온 작가 지망생들이 웹소설 판으로 새로 진입하게 될 경우에 흔히들 저지르는 실수가 있는데, 이는 웹소설=장르소설로 이해하고 장르소설의 호흡으로 웹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전형적 오류이다. 단순히 장르문학을 집필하는 방식에서 좀 더 문장을 짧게 만들고 글을 빠르게 전개한다고 해서 감쪽같이 웹소설로 변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볼때 창작의 관점에서 후킹의 등장은 웹소설 서사 양식을 근본적으로 뒤엎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 후킹 테크닉이 전면화된 데에는 웹소설이 지니고 있는 매개적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웹소설은 한 편씩 끊어 결제하는 시스템으로, 매 화마다 4~6천자 남짓한 분량으로 수용자에게는 약 오 분내외로 소모되는 킬링타임 콘텐츠이다. 그러다보니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다음 화를 강제할만한 내부적 경쟁력을 요구당한다. 그것이 구체된 것이 곧 '후킹'이라는 작가의 창작 테크닉이다. 그러므로 이 테크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양분되는데, 첫째, 매 화마다 독자가 끊이지 않게 붙잡으며 다음화의 결제로 유도하는 방식으로서의 후킹이 있으며 둘째, 독자가 최초에 이 작품을 선택하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후킹이 있다. 물론 둘 모두 비슷한 의미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양상이 다소 다르게 재현된다는 점에서 각각을 구분하여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대청호 따라 걸어가는 길
우선 첫번째로서의 후킹은 모든 웹소설 작가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테크닉이다. 기본적으로 웹소설은 회당 결제 시스템이며, 하루 내지는 이틀 간격으로 연재되는 매 화마다 끊어 읽는 구조이기 때문에 독자는 한 편의 콘텐츠 향유에 기승전결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다음 화를 읽는데 이전 화의 정보들이 많이 활용하여 독자에게 읽는 부담을 가중시켜서는 안된다. 웹소설의 대전제는 언제나 전적으로 독자의 소비경험, 즉 만족에 초점을 맞춘 콘텐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한 화에서조차 작은 '기승전결'의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가 해소되어 정서적 만족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있다. 한 화에서 '기승전결이 완료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독자의 손가락을 다음 화로 이끌어낼 힘이 부재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비로소 '후킹의 테크닉'이 등장한다. 작가는 한 편에서 작은 기승전결을 완성시켜 완전한 해소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이 카타르시스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여운의 영역) 후반부에 얼마간의 호기심을 생성한다. 작가는 이 호기심을 '문장'으로 만들어내거나 혹은 '사건'이나 '인물의 행동'으로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혹은 특정한 암시를 통해도 이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후킹은 작가의 관점에서는 '서사를 지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독자의 관점에서는 '다음 편을 계속해서 이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힘인 것이다.
두 번째, 작품 자체의 선택을 강제하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후킹이 존재한다. 앞서 살펴본 것이 '독자-작가' 사이에서의 밀당이라고 한다면, 이 두 번째 의미의 후킹은 '작품과 타 작품' 간의 경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맥락으로서 존재한다고 하겠다. 즉 플랫폼의 바다에 있는 무수히 많은 작품들 중에서 자신의 작품이 선택되기 위한 '구분되기의 전략'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작품에서 가장 흔하게 수행되는 전략이 초반부에 주로 성(性)적으로나 폭력적으로 강렬하고 말초적인 자극의 사건들로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오랫동안 웹소설을 봐왔다면 예컨대 특정 공간에 있는 전원이 사망하는 잔혹한 장면으로 사건을 전개한다거나, 섹스 혹은 강간을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 경우를 많이 봤을 것이다.) 이러한 후킹 전략은 어떤 히트작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이끌었던 전독시 역시 초반부 에피소드는 '지하철 살해 퀘스트'라는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전개함으로써 독자들을 붙잡아놓으려고 한다. 결국은 이런 의미에서 후킹 포인트는 다른 말로는 '작품의 차별성'이라는 말로 치환될 수 있겠다. 물론 여기까지의 내용은 웹소설을 평소에 자주 읽는 편이라거나 웹소설 창작자, 혹은 웹소설 현장의 종사자라면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두 번째, 즉 작품-작품 간의 투쟁 전략으로서 후킹에 대해서는 좀 더 파고들어 말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보다 구체화하자면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우선은 특정 웹소설 콘텐츠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무수한 콘텐츠들 중에서도 차별되는 어떤 것일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그 다음으로 그때까지 쌓여온 '독자의 독서 경험'과 관련하여 낯설게 경험되는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게다가 문제는 웹소설 콘텐츠의 독자는 매우 이중적인 심리를 보여주는데, 바로 독자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작가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 이 말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익숙함과 새로움이 콘텐츠에서 작동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여기서 '익숙하다는 것'은 장르적 관습을 충실히 재현하며 독자의 독법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독자의 독서 피로를 줄인다는 의미로서 기능하며, 아울러 '새롭다는 것'은 이러한 관습이 요구되는 내에서 감각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새롭게 전달되는 지점들을 가리킨다. 즉 독자들은 기존의 장르 내에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자극'을 받고 싶은 것이다. 말 그대로 '전형성 속의 낯설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탁월하게 쓰인 작품이 곧 싱숑 작가의 '멸망 이후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평소 인터넷에서 글을 검색하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웹소설 작가들의 독자에 대한 불만 토로는 바로 이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후킹의 두가지 방향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결국 '후킹'은 웹소설 콘텐츠의 결제 방식이 근본적으로 뒤집히지 않는 한 웹소설 작가 지망생에게는 꾸준히 요구될 기술이라 하겠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웹소설 콘텐츠의 결제 시스템과 소비문화에 대해서는 소비자와 플랫폼이 서로 만족할만한 적정 수준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러한 독서 방식이 상당 부분 문화화되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최근 후킹 테크닉과 관련하여 짚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조짐이 보이는듯 하다. 요약하자면 '자극적인 사건'이 더 이상 독자들에게 자극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듯한 낌새다. 아직까지 이 느낌을 명시화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최근의 독자들은 사건 자체의 자극에 점차 내성이 생겨나면서 웹소설 작가들에게 고난도의 새로움을 요구하는듯 보인다. 웹소설 작가들이 이에 어떻게 응답할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만약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면 웹소설 콘텐츠들의 완성도도 전체적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있다. 결국 익숙한 형식을 쓰길 강요하면서도 경험적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독자들의 미묘한 심리이며, 독자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웹소설은 그 기대에 답해야만 하는 의무를 강제당한다. 웹소설 작가들에게는 몹시 어려운 고민이겠지만, 결국 후킹은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라는 요체를 이해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왜 제목에서 후킹을 '미적 장치'로 바라보았는지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그와 관련하여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후킹의 '테크네(techne)'으로부터 웹소설의 미학(美學)적 가능성이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참고문헌
나의 기억 및 나의 생각
박성봉, 대중예술의 미학 - 대중예술의 통속성에 대한 미학적인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