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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Oct 27. 2022

[시리즈]9. 웹소설의 미적 장치로서 '후킹'(2)

후킹의 현상학적 접근과 그를 바탕으로 한 수용자 고찰

이번 글에서 후킹의 미학적 가능성을 이야기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후킹과 관련하여 좀 더 논의해보고자 한다. 사실 지인으로부터 지난 글에 대한 피드백이 있었다. 그이의 말을 정리하자면 후킹은 좀 더 미시적이고 수용자적인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확실히 수용자 경험을 배제하고 후킹을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해보고자 한다.





흔히들 웹소설을 읽다보면 아무 생각없이 펼쳐보다가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무작위로 여러 편의 웹소설을 선정한 후, 그것을 읽는 나의 반응을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이러한 방법론을 조금 있어보이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현상학적 분석'이라고 하겠다.


처음에는 늘 그렇듯이 첫 문장부터 시작하여 별 생각없이 미끄러지면서 읽어나갔다. 문득 어떤 지점에 '탁' 걸리면서 내 안에서 '최초의 파문'이 일어났다. 그 느낌이 오는 순간, 나의 의식에서는 "오?"하고 첫 흥미가 일어나거나 "어? 이거 궁금한데?"와 같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연이어 빚어졌다. 이전까지는 익숙했기에 무심코 예상하고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예상치 못한 문장을 맞딱뜨리며 호기심이 생성된 것이었다. 이른바 낚시의 성공, 즉 소위 말하는 '후킹'이었다.


그런데 눈여겨 볼 점은 그 다음에 일어난 나의 반응에 있었다. 순간적인 호기심이 생겨나면서 나의 내면에서 기대치가 생겨났는데, 이 기대감이 채워지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향후의 읽기가 결정되는듯 보였다. 생성된 기대치만큼을 웹소설이 채워준다면 내 안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일어나 큰 만족감이 형성되었으며, 반대로 이 기대치만큼을 웹소설이 채워주지 않는다면 '에이, 이게 뭐야.'라고 실망하고 다음 편으로 나아갈 의지를 얻지 못했다.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과 무관하게, 읽으면서 어떠한 걸림돌조차 없이 끝까지 흘러간 경우도 있었다. 후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예컨대 앞서 무작위로 뽑은 웹소설 중 하나였던 로맨스물이 그러했는데, 작가가 어떤 장면에서 특별히 의도적으로 힘을 주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속에서 어떠한 파문도 일지 않았다. 이는 선험적 차원에서 로맨스와 관련하여 내부적으로 결핍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는 듯 보인다. 대략적으로 추출한 내용을 바탕으로 후킹의 과정을 정리해보자면 ① 어떤 특정 지점에 맞딱뜨리면서 '최초의 호기심'이 생성되며, ② 호기심과 함께 생성된 기대치를 채우느냐 혹은 마느냐에 따라 향후 읽기가 결정되는듯 보였다. (호기심과 기대치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찰해볼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학적 분석은 어떻게라는 과정을 잘 보여주지만, 특정 지점에서 '왜' 호기심이 발생하며 어떻게 만족감이 해소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시말해, 새로운 관점의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현상학적 접근(어떻게)을 바탕으로 '왜'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자세한 분석을 위해 임의로 두 가지 층위로 나눠서 살펴보자. 필자가 생각하는 층위는 ① 수용자의 무의식(욕망)과 ② 이를 바탕으로 한 구체화 전략(테크닉)라는 맥락이다. 실제 우리가 잘 아는 의미로서 후킹은 ②에서 보여질 것이나, 그것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수용자의 무의식 즉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후킹(hooking)'이 도대체 뭘까. 지난 글에서 후킹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포인트'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후킹의 포인트는 웹소설을 읽는 모두에게 일괄적/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데, 쉽게 예를 들자면 남성독자가 선호하는 판타지물과 여성독자가 선호하는 로맨스물을 비교해봐도 둘이 자극하는 포인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성별이나 개개인의 감성, 각자의 독서 경험이나 결핍 그리고 전사(前事)에 따라 독자들의 요구가 상이해지기 때문에 후킹은 온전한 의미로 '보편론적 전략'이지는 않다. 다만 그럼에도 후킹은 개별 독자들에게 내재된 특정한 지점들을 일일이 겨냥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수 취향의 교집합적인 포인트를 저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웹소설로서 대중성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보편성을 포기하고 아예 특수한 지점들을 겨냥하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몹시 마이너한 계통인 경우가 많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후킹의 가장 쉽고 전형적인 테크닉으로 '섹스와 폭력'이 활용되는 것은 단순히 웹소설의 말초적 성격으로 인한 까닭이 아니라 애초에 그것이 '우리들에게 내재된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후킹의 일환) 이때 중요한 것은 '자극'이 아니라 작가가 주는 어떤 자극으로 인해 '흥미가 일어난다는 사실'에 있다. 즉 후킹의 본질은 '흥미가 일어나게 하는' 데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후킹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 접근이 이뤄질 수 있다.


만약 후킹이 원초적 본능을 건드림으로써 흥미가 생성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것을 건드림으로써 흥미를 일으킨다고 간주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인간은 '문화적 동물'이기에 우리에게 내재된 문화적 기호나 결핍 혹은 판타지를 건드리는 것으로도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올 초부터 웹소설판에 '이혼물'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으레 그렇듯이 자신을 배신한 결혼 상대와 이혼하고 철저하게 복수하는 전개가 주를 이룬다. 이는 최근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들의 결혼기피 현상과 남녀혐오 문제 그리고 결혼에 성공한 기혼자들에 대한 부정적 시선 등이 결부되어 소위 '설거지론'이라는 담론으로 굳어져 있던 것이 웹소설과 연결되면서 '이혼물'이라는 구체적 장르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 웹소설 소비자들이 주로 30-40대임을 고려해본다면 이혼물의 흥행은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요점은 이때 웹소설이 수행하는 역할이 '문화적 맥락 솟에서 빚어진 결핍의 발견과 그것의 카타르시스 수행'라는 데에 있다. 결국 후킹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있는, 혹은 무의식적으로 감춰진 결핍을 해소해주는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가다 찍은 들꽃, '미국쑥부쟁이'라는 희한한 이름이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소재를 '단순히 다루기만 한다'고 해서 그대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즉 여기에서 소재의 차원을 넘어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흥미롭게 잡아당기는가'에 대한 현실적 이슈가 나타난다. 여기부터가 앞서 이야기한 ②의 문제 즉 후킹 즉 구체화의 테크닉에 관한 전략이 나타난다. 앞의 문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 즉 장기적인 목표에 해당된다. 따라서 만약 작가가 정상적인 고민 과정을 거쳤다면, 아마도 시장 연구와 더불어 사회문화 흐름을 파악하여 '분명히 먹힐 것'이라고 판단되는 특정 소재를 선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재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 이 부분에서 비로소 작가의 능력, 즉 독자에게 내재된 욕망을 웹소설의 형식에 맞추어 테크니컬하게 풀어내는 무수한 전략들이 재현된다. 작가들의 실질적인 역량이 발휘되는 부분이 바로 이 지평에서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필자 나름대로 짚히는 바가 있으나, 이미 탁월한 웹소설 작가들이 언급한 바 있기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앞서 말한것처럼 웹소설을 읽다보면 문득 "오?"하고 떠오르거나 "어, 다음 내용이 궁금하네?"라고 말하게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이는 전형적인 클리셰의 순간적인 '비틀기'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순수하게 소설적 매료를 통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궁금함은 전혀 아무런 맥락이 없이 단순한 테크닉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내재된 이전의 경험 즉 일종의 '기대지평'을 매개삼아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매력적인 후킹 테크닉을 쓰더라도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 '걸리지 않고' 쭉 미끄러질 뿐이다. 앞서 현상학 분석에서 말한 것처럼, 아주 잘 만들어지고 인기가 있는 로맨스 웹소설이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내게는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로맨스적 판타지나 그와 관련한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물론 남녀간의 감성적 차이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나 이에 대해서는 향후 웹소설의 남녀 감성 고찰로 따로 다뤄볼 예정이다.) 따라서 필자는 설령 로맨스를 접하더라도 '그저 잘 만들었네' 라는 감상만을 일으키고 더 이상 다음화를 볼 의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독자는 이미 사회문화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웹소설의 트렌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웹소설에서 이러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해당 웹소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지'도 함께 기대한다.


①이 없이 ②만 있다면, 읽는 그 순간 발생하는 흥미는 있을 수는 있어도 소설 전체에 걸친 장기적인 목표가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잃는 순간 하차할 수밖에 없다. (섹스나 폭력적 씬이 끝나면 곧장 하차할 위험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곧바로 다음의 흥미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반대로 ①만 있어도 소설로서 경쟁력이 없기에 애초에 별 의미가 없다. ①, ② 모두가 존재해야 비로소 경쟁력을 갖춘 웹소설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정리해본 필자의 짧은 생각이다.


다음 글에서는 의도했던대로, 후킹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나의 기억 및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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