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시리즈를 쓰면서 줄곧 써보고 싶었던 주제가 있었다. 과연 웹소설에도 미학(美學)의 정립이 가능할까? 이전의 글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웹소설을 향한 비판 근거 중 하나가 곧 심미성, 즉 미학적 가치의 부재이다. 결과적으로 웹소설은 예술적인 면모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성적 자극이나 폭력성 등과 같은 통속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천박한 장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예컨대 국문학도들이 개론서로 읽었을 법한, 필자에게로 어쩌다가 흘러들어온 『小說論 』에도 이런 문구가 있다.
현대의 청소년들에게는 외설적인 내용의 소설과 누드 그리고 포르노물이 무절제하게 제공되고 있으며, 이러한 말초신경의 순간적 쾌락을 목표로 하는 저급문화와 잦은 접촉은 한창 탐구의욕이 왕성한 청소년들이 인생의 폭이나 깊이에 대한 관심을 방기하도록 만들고 있다.
굉장히 오래된 책이기 때문에 저자가 웹소설을 염두에 두고 쓰진 않았겠지만, 아마도 여기서 웹소설은 소위 말하는 '외설적인 내용의 소설'로 포섭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웹소설은 누드, 포르노와 동일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웹소설 시리즈를 줄곧 써오면서, 그리고 웹소설을 죽 읽어오면서 이 생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웹소설이 상업적이라는 데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것에 미학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다분히 문제적인 테제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지난 두 번의 글에서 살펴본 '후킹'론을 바탕으로 웹소설의 미학적 가능성을 논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소설의 가치를 논할 때에는 소설에 일종의 '장인정신'이 존재한다는 암묵적 전제를 한다. 즉 소설은 작가의 사상을 언어로 형상화(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기법적 숙련도가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작가의 사상(思想) 즉 '표현하려는 내용'이 작가의 숙련된 테크닉을 거쳐 정제되어 표현된다는 데에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실의 다양성이 응축되어 소설이라는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형태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작가의 특정한 미적 인식과 그것을 구현하는 테크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소설은 사상과 표현, 이 두가지를 통해서 완성된다.
그런데 이는 비단 순수소설뿐만 아니라 웹소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웹소설에도 방향은 다를지언정 나름대로의 명확한 목적성이 존재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유형의 테크닉(작가적 노력)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까지 줄곧 봐온 '후킹(hooking)'이라는 기술적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외에도 웹소설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술적 테크닉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로부터 소설과 웹소설의 차이점이 역산된다는 점이다. 알려진 것처럼 소설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현실을 표현하는 예술, 즉 생활과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반영이 미적 인식과 언어의 재조직화에 의해 창조된 예술이다. 그렇다면 웹소설은 '무엇'을 표현하는 예술인가? 필자는 그 '무엇'에 들어갈 수 있는 여러 기표 중 하나가 '판타지(Fantasy)'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소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 묘사에 집중한다면, 반대로 웹소설은 그 반대의 척도에 서서 대중들이 꿈꾸고 있는 판타지를 더욱 잘 느끼고 그것의 충족을 이룰 수 있도록 탁월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러므로 결국 문학소설과 웹소설 모두 기술적 테크닉 즉 장인정신이 이행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소설과 웹소설은 단지 표현하려는 내용에만 차이가 있을 뿐 웹소설에도 특정 목적을 재현하기 위한 맥락에서의 기술적 집약과 고도화가 이뤄지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웹소설에도 '미(美)적 가치'나 '심미성(審美性)'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낙산공원의 어느 이름 없는 꽃
여기에서 조금 더 논의를 심화시켜보자. 기술적 고도화나 장인정신을 토대로 웹소설에도 '심미성(審美性)'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심미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심미성일까. 앞서 단편적으로 '판타지'라는 기표를 제시했지만 그보다 좀 더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기표가 따로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아쉽게도 지금의 웹소설 판으로부터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단서를 찾기 어려운듯 보인다. 그러므로 시야를 넓혀 외부의 연구로부터 단서를 찾아봐야할 듯 싶다.
흔히들 웹소설을 다르게 쓰는 표현 중 하나로, 비록 거의 안쓰이긴 하지만 '통속소설'이라는 정의가 있다. 이는 웹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 하나가 '통속성(通俗性)'이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물론 통속성은 웹소설에만 쓰이는 표현이 아니며, 순수예술과 대조되어 대중예술 혹은 저급예술에서 찾아지는 속성 중 하나가 '통속성'이다. 우리 과에서 자주 다뤄지는 대중예술 연구자인 박성봉은 '통속성'을 순수예술의 '진지성'과 비교군으로 삼으며 대중예술의 미학적 핵으로 삼은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대중예술의 범주에는 '웃음, 성, 폭력, 환상, 감상성' 총 다섯가지로 수렴된다.(대중예술의 미학 323쪽)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웹소설은 완벽하게 이 다섯가지를 포괄하며 위상적으로 동등한 장르라고 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위 다섯가지가 웹소설의 지배소로 나타나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성과 폭력적인 장면으로 자극적으로 재현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독자들의 결핍을 판타지로 승화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코미디적 혹은 감상적으로 사건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웹소설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내부적 차원에서 존재하며 맞물린다. 결국 순수문학과 달리 웹소설은 웹소설 나름대로의 지향적 가치가 존재하며, 아울러 그것을 위한 기술적 고도화가 이행된다는 점에서 엄연하게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기성의 문학평론가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웹소설은 무가치하고 저열한 장르가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가치지향과 그것을 위한 작가적 투쟁이 존재하는 당당한 하나의 예술로서 존립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웹소설의 미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다소 주저했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논리적으로 문제될 부분은 없어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별 고민없이 '고급문화'에 관례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 '미학'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웹소설의 미학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망설여왔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은 단순히 낯선 상황에서 오는 정서적 주저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래저래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얼핏 쉬어보이는 '웹소설 판'도 사실 그 이면은 처절한 투쟁이 이뤄지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 투쟁의 방식은 쉬움과 재미, 접근성을 지향하며 대중을 사로잡아야하는 형태로 이행되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나도 해볼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해보면 정말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되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있다. 결국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웹소설에도 순문학이나 여타 예술 장르의 그것과 동일하게 작가들간의 처절한 경쟁이 있으며,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작가들의 독창적인 고민과 사유들이 과거에도 지금에도 피어나고 있다고 하겠다. 후킹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이 지점으로부터 장차 '웹소설의 미학(美學)'을 구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조심스레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