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모티프가 곧 '회귀'와 '환생'이다. 흔히들 여기에 '빙의'까지 덧붙여서 '회빙환'을 웹소설의 삼대장 코드로 손꼽는다. 빙의와 환생은 각각 별도의 글에서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회귀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자. 왜 웹소설은 유독 회귀라는 코드를 많이 활용할까.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은 '회귀물'을 보고 싶어할까.
사실 필자는 회귀물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판타지 소설판을 한동안 떠나고 나서 다시 돌아왔을 때에 영 달갑지 않았던 현상 중 하나가 '게임 상태창'(게임물)과 더불어 '회귀물과 환생물' 코드의 홍수였다. 그리고 이 '달갑지 않음'에는 이 코드들이 실제로 웹소설의 난이도를 대폭 낮춰준다는 것을 알지만 한편 '판타지'를 판타지답지 않게 만든다는, 이른바 낭만의 소멸에 대한 내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 여하튼 회귀물의 주류화는 상징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이 현상이 만연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사회에 대한 불만, 개인적 좌절의 투영과 극복, 결핍 충족으로 인한 대리만족...' 등등 많은 연구들이 있으니, 그와 관련하여서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회귀를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 일차적으로 우리가 회귀물/환생물을 논의하려 할 때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대부분, 아니 모든 경우에 있어 회귀와 환생은 반드시 '첫 화'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빙의는 좀 독특한 면이 있기에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사실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회귀와 환생은 필연적으로 서사 구조상 매우 중요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회귀/환생은 주인공의 실패와 좌절을 극복할 수있게 하는 전환점이자 매개로 기능하기 때문에, 보통은 주인공의 성장과 관련하여 중요한 국면을 겪고 크게 실패한 후에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웹소설에서는 실패와 좌절과 관련한 전사(前事)의 부분은 생략되고 '처음부터' 회귀와 환생으로 곧장 시작한다. 이는 플롯의 관점에서 보면 몹시 기형적인 구조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회귀를 하는 사람의 전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며 첫 시작부터 곧장 회귀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대한다. 이른바 '회귀 과정에서 나타나는 카타르시스'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회귀는 서사의 극 초반에 전제로서 세팅되는 것이기에 사실은 작품 전체를 포괄하는 컨셉으로 '회귀물'로 설정하는 것은 사실 적절하지 않다. 이후 연재될 수백화 중 단지 첫 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작품의 전체 컨셉을 '회귀물'이라고 표현하는 아이러니를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우리는 거리낌없이 회귀물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사실은 몹시 기묘하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 표현에 있어 본질은 다음과 같이 바라보아야 한다. 회귀물에 있어 중요한 것은 '회귀라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회귀라는 전제 하에서 이뤄지는 주인공이 지닌 앎의 상태와 그것을 활용한 사건의 극복들에 있다. 이것이 특히 잘 드러나는 작품이 이미 연재종료된 '전지적 독자시점'이라고 하겠는데, 전독시의 회귀자는 작중 주인공으로 설정된 유중혁이지만 실제 우리가 보고 있는 '전독시'의 실제 주인공 김독자는 과거로 회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주인공 김독자는 과거의 소설을 통해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미리 읽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실상 그의 행동으로부터 전형적인 회귀물의 주인공을 보는 듯한 경험을 받는다. 다시 말해, 전독시는 회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회귀물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즉슨, 회귀물의 본질은 주인공이 다른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아는 상태에서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고(If, 선택의 가능성) 그로부터 극복의 서사를 이뤄나간다는 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핵심임을 의미한다.
묵호항에서 만난 어느 꽃
환생과 관련해서는 이후에 다루겠지만, 사실 회귀와 환생은 서로 닮은 꼴 다른 선택이다. '회귀'는 과거의 선택에 후회하기 때문에 지금의 지식과 정보를 알고 과거로 되돌아가서 이전의 실패를 극복하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에 '환생'은 현재의 삶 자체에 대한 괴로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인격과 기억을 갖고 차라리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떠나고 싶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회귀에서 중요하게 설정되는 if의 서사는 '만약 내가 이미 알았더라면' 미래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 그리고 그 깊숙이에는 후회의 무의식이 자리함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회귀물의 주인공은 '이전과 다른 선택'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다른 선택을 통한 인생의 전환과 그 성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는데에 있다. 대부분의 독자는 어떤 형태로든지 현재에는 만족하지 않으며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판타지이다. 우리의 행동에 결정을 내리는 인간의 '합리성'은 수십년 간 쌓여온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구성된 만큼 생각 이상으로 잘 작동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 행해졌던 나의 선택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약 '그때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으면'하고 언제나 후회한다. 회귀물은 바로 그러한 가상성의 후회를 겨냥하여 if의 가능성으로 구축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맥락과 연결하여 눈여겨볼 점은 회귀 이후의 플롯은 일반적으로 묵힌 고구마가 풀리게 되는 서사인 경우가 일반적이라는데에 있다. 달리 말하자면 독자들은 이야기의 질을 높이는 데에 필수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고구마'를 배제하고 '사이다'만을 끊임없이 마시고 싶어한다. 즉 회귀물은 어찌되었거나 이전보다 무조건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야만 하며, 독자는 비록 그 선택이 환상일지라도 '다른 선택'으로 인한 사이다 체험 이른바 카타르시스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싶어한다. if의 대리만족 그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웹소설의 작가는 이러한 욕망에 맞추어 '고구마는 최소한으로 줄이되, 연이어 색다른 맛의 사이다만을 터뜨려야 한다'는 지극히 고도의 작업을 요구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결국 '회귀'는 일반적인 소설의 후반부에 이뤄지는 '해소와 그로 인한 카타르시스'라는 지점을 극단적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특수한 서사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설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과정을 거친다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지루할지라도 소설을 발단-전개-위기의 과정의 필요성을 인지하는데, 웹소설은 반대로 극단적으로 독자주의를 지향하는만큼 앞의 지루한 부분을 생략하고 절정-결말의 카타르시스에 초점이 맞춰진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회귀' 모티프는 서사의 중간을 비약하고 곧장 이야기의 '위기 혹은 절정'의 지점에서 시작되었음 알리고 이제부터는 갈등을 풀어내는 서사가 전개될 것임을 알리는 선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문제적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데, 이는 결국 웹소설과 독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 같다. 만약 웹소설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본다면 결코 미적으로 좋은 구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독자가 '현실 사회'에서 무수한 사회적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그것의 해소가 웹소설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기존 소설에서는 갈등이 소설에서 생성되어 소설에서 해소되는 구조였다면, 웹소설은 현실에서 독자에게 생성된 내부적 갈등이 이야기를 통해 곧장 해소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독자와 웹소설 사이의 독특한 변증법적 관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회귀 모티프와 관련하여 간략적으로 다뤄봤지만 생각보다 많은 함의가 내재되어있음을 볼 수 있었다. 흥미로운 시도였던 것 같다. 다음 번에는 환생, 그리고 빙의에 대해서도 차례대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언젠가 이를 논문으로 구체화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다.
참고문헌
나의 기억 그리고 나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