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웹소설에서 많이 보이는 '환생' 모티프에 대해 알아보자. 필자는 '환생'과 '전생'이라는 단어를 번갈아가면서 쓰곤 하는데, 듣자하니 전생(戰生)은 환생의 일본식 표현이라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환생물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 많이 다루었던 듯 싶으며 그 역사도 좀 더 오래된 걸로 안다. 오죽하면 개나소나 트럭에 치이면 이세계 전생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렇듯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은 문화적으로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는 지점이지 않나 싶다. 환생물에 내재된 코드와 그 위로방식으로 인해 각 문화권에 따라 독자들 간 유의미한 수용 방식의 차이가 드러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문화권에 따른 분석을 시도해봐도 좋을듯 싶다.
이번 글에서는 '환생'에 초점을 두고 회귀물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에 내재된 무의식이 무엇일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대체 왜 환생물은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을까. 독자들이 환생물을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환생물은 그에 화답하여 어떤 서사방식을 전개하며 카타르시스를 이뤄낼까.
기억나는 범주 내에서 최초의 환생물은 『아린 이야기』라는 2000년대의 판타지 소설이었던 것 같다. 『아린 이야기』는 어떤 고등학생이 자살 후 계약을 통해 이세계의 '헤츨링 드래곤(새끼 드래곤)'으로 환생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위키에서 알 수 있듯이 논란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작품이었지만, 당시에는 큰 파급력과 인기를 이끌었던 1세대 작품 중 하나였다. 아마도 이 작품이 거의 최초로 환생이라는 모티프를 다루면서 많은 독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필자도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엄청 위안이 되었다는 기억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만큼 이 작품, 보다 정확히 말해 '환생물'에는 여타 다른 작품에는 없는 각별한 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각별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본격적 논의에 앞서 눈여겨 볼 점은 환생과 회귀라는 두 모티프의 기원이 훨씬 더 오랜 '차원이동' 모티프로부터 착안되었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출발한 상이한 대안이 각각 '회귀'와 '환생'이었음을 기억해두자. 차원이동은 지금은 그리 많이 쓰이는 모티프는 아니지만, 사실 우리가 판타지 세계로의 공상을 시도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발상이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에는 이세계로 넘어가는 상상을 자주 했듯, 우리는 일상에서 판타지물을 보며 이세계로 모험을 떠나면 어떨지를 꿈꾸곤 한다. 그러나 '차원이동'이라는 가정을 서사로 풀게 되면 현실적인 제약이 많이 걸리게 되는데, 말 그대로 지금의 몸을 갖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면 놀랄 만큼의 능력이나 활약을 보이기 쉽지 않다. 지금의 웹소설은 물론 그 전신(前身)인 장르소설까지도 모두 독자의 '카타르시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장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차원이동 모티프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환생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전 글에서 살펴본 회귀 모티프와 비교해보면, 환생 모티프에는 중요한 특징적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회귀의 무의식이 곧 '후회'에 있으며 그 후회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고 바로잡으려는 욕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대조적으로 환생물의 독자들은 그러한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금의 삶이 지긋지긋하기에 현재의 세상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환생물을 읽는 독자들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차이는 웹소설의 진행에 있어서도 상당한 내용적 차이로 표상된다.
환생물의 주인공은 대체로 환생 이전과 동일한 인격을 갖고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나며, 태어나게 되는 육체도 해당 세계에서 강력한 위상인 드래곤이나 마족, 혹은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인간나 엘프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원래의 인격은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운 세계의 강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에 따라 흔히 일반적인 영웅 소설에서 수행되는 고난이나 수행과 같은 지루한 부분들을 뛰어넘고 카타르시스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낸다. '강한 능력'을 통해 주인공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손쉽게 풀어내고 먼치킨이 되는 과정에서 독자는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환생물에는 ① 지금의 현실에 대한 미련이 없고, ② 다른 세상에서 '쉽게 살아가고 싶어한다는' 독자들의 욕망이 혼합되어 있다. 이를 분리하여 우선은 전자(①)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환생물을 선호하는 이들은 대체로 지금의 현실이 몹시 불만족스럽고 억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에 판타지를 읽었던 이유가 무엇보다도 숨막히는 학교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며, 판타지 소설이 그것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던 까닭이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독자들은 사회와 학교라는 억압적 질서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어한다. 중요한 것은 너무 지긋지긋한 나머지 현실에 대한 '미련'이 부재하며 따라서 지금의 삶을 끊어내는 데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환생물은 자발적인 자살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 등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의식이 전이되는 과정이 이행된다. 즉 환생은 과거와의 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기길 바라는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눈여겨 볼 점은 ②의 쉽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있다. 이것이 없다면 사실 환생물은 차원이동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맥락이 작동하고 있는데, 첫째 웹소설은 철저하게 독자의 만족을 위한 장르이기 때문에 고난과 성장이라는 지루한 단계는 가급적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독자에게 부재한 '우월한 능력'과 '쉽게 살아내기'의 결핍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환생물은 이러한 두 가지를 너무나도 간단히 그리고 쉽게 충족시켜준다.
이와 비교하여 볼 때, 회귀물은 대체로 도피적 성향을 보이기보다는 현재의 어느 지점에서 특정 과거로 돌아가는 비교적 능동적인 선택을 취한다는 점에서 그 차별점이 있다.(물론 넓은 범주에서 보면 둘 다 현실로부터의 도피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이 선택은 보다 현실참여적이며,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여 잘 풀어내고자 하는 독자 주체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현실 회귀물은 좀 더 리얼리즘에 가까우며 보다 인물들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진다. 결과적으로 환생물은 회귀물과 비교하여 서사진행이나 캐릭터 그리고 욕망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이 지점이 '회귀'가 유행하는 한국과 '환생'이 유행하는 일본과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는 데에도 주효하리라 짐작한다.
두타산 삼화사의 어느 절간
수신자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환생물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 과에서 자주 다뤄지는 '도피주의'라는 개념은 환생물을 설명하는 데에 중요한 함의를 제공하는데, J.G.카웰티에 의하면 도피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 욕망이 존재한다.
1) 현실의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삶으로부터 강렬한 체험의 세계로의 도피하려는 욕망
2) 일상의 끝없는 불안과 압박 그리고 초조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
얼핏 보면 같은 욕망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권태로부터 자극을 찾으려는 욕망이며, 후자는 스트레스로부터 회피하려는 서로 상반된 욕망이다. 환생물은 '환생'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양쪽의 욕망을 얼마 간을 충족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수용자의 세대에 따른 상이한 욕망 충족이 이뤄지는듯 보인다. 매일 동일한 리듬을 반복하는 학생이라면 일정하고 무미건조한 삶으로부터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는 전자의 욕구가 크게 활성화되며, 대조적으로 취업이나 돈, 부동산, 결혼 등 많은 현실문제에 시달리는 성인은 후자의 욕구가 크게 활성화된다.
이렇듯 비록 수신자들의 욕망에는 차이가 있으나 환생물의 이행 전략 즉 문제 해결방식에 있어서는 대체로 유사한 카타르시스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환생물에서의 주인공은 강력한 능력을 바탕으로 영웅처럼 추앙받으며,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하렘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전개는 위에서 제기된 상반된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보편전략이다. 환생물의 수요가 크고 만족도가 높은 까닭은 여기서 나타난다. 아울러 환생물은서사 역시 쉽고 유치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대적하는 적들도 역시 어딘가 어설픈 사고력(thought)을 보인다. 이는 결국 환생물에게 '캐릭터'나 '탄탄한 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것을 보는 독자의 욕망을 얼마만큼 만족시켜주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가의 기준을 작품에 국한시키지 않고 욕망 충족이라는 측면에까지 넓혀 사고를 확장해본다면, 사실은 오히려 환생물만큼 독자의 만족도를 끌어올리는 장르도 드문 셈이다.
지금까지 웹소설의 모티프로서 '환생'을 살펴보았다. 사실 최근의 환생물 트렌드를 보면 이런 분석 자체가 무의미해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변주가 시도되고 있다. 누구나 아는 클리셰로 굳어지는 만큼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움을 주려는 작가들의 시도들이 이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환생물에 내재된 본질적인 욕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겉보기에 큰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독자의 욕망을 해소시킨다는 맥락에서 볼 때 '환생물'과 '회귀물'은 커다란 서사적, 캐릭터적, 내용적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환생물에 내재된 카타르시스 방식은 거꾸로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하고픈 독자들의 어떠한 결핍을 표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비단 웹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의 결핍과 억압된 무의식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글을 매듭짓고자 하며, 다음 번에는 웹소설과 관련하여 좀 더 가볍고 새로운 주제를 갖고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