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근 Dec 01. 2022

[시리즈]14. 웹소설은 정말로 '진지'하지 않은가?

웹소설과 진지성과의 관계에 대해

웹소설의 속성을 이야기하게 될 때 항상 이야기되는 것 중 하나가 '가볍고 통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굳어진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고자 한다. "과연 웹소설은 진지하지 않은가?" 웹소설은 마냥 저렴하고 속물적인가? 수십년 간 무수한 장르소설과 웹소설을 향유해온 입장에서 이러한 인식은 무엇인가 간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비단 웹소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콘텐츠 전반에도 고스란이 통용된다. 질문을 구체화해보자. 예컨대 대중을 겨냥한 콘텐츠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과연 진지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중팔구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예술, 나아가 웹소설에 진지성이 결여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진지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진지성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달리 말하자면 진지하다고 일컫어지는 일련의 속성들이 대중예술에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지성'에 대한 고찰은 불가피한듯 보인다.





'진지성(眞摯性)'의 사전적 정의는 '참되고 착실한 특성이나 성질'을 가리킨다. '진지성'과 연관한 키워드를 떠올려보면 대체로 의미있는 것, 가치있는 것, 무거움, 진리, 진실성, 진정성 등이 떠올리게 되는데 어쩐지 모두 관련되어 있는듯 보인다. 물론 이 느낌은 아주 틀리지는 않다. 진지성은 결국 그것이 어떠한 맥락으로든지 '나름대로 의미있다는 인식'을 동반한다. 그런데 생각해볼 점은 그 다음에 있다. 도대체 이 '의미있음'을 누가 정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의미있음'을 결정하는 사유의 틀을 인지해야만 한다. 이 사유형식은 우리가 세상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구조적으로 결정되어져 있는 틀이다. 필자는 이를 오래 전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플라톤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의미있는 것을 찾으려는 경향성은 비단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타고난 경향에 가깝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로부터 '알지 못함'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해소한다. 아주 오래 전의 '최초의 지식'과 '최초의 종교'는 그렇게 해서 빚어졌다. 아울러 진지성은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파생된, 개념적 맥락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의미있음'은 포스트모던 사회에 이르러서 해체된 지 오래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진지성'은 전통이나 역사가 보증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벤야민은 아우라 Aura개념을 철학적으로 다룬바 있다. 그러나 벤야민 자신도 지적했으며 우리도 이미 경험적 사실로 알고 있듯이, 고전주의적 맥락의 진지성은 기술복제시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면서 무용(無用)화된 지 오래이다. 다시 말해, 진지성에 관한 생각 자체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다지 의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자. 만일 '진지성'이라는 용어를 허용해야한다면, 도대체 '진지성의 건너편'에 무엇이 놓여있는가. 대중예술을 진지하게 연구하시는 몇 안되는 국내 연구자 중 한 분이신 박성봉(필자가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시다)은 대중예술에 존재하는 속성을 '통속성'으로 판단하고, 그 너머에의 순수예술에 존재하는 것이 '진지성'인 것으로 바라본다. 요약하자면, 순수예술이 '진지성'을 지향한다면, 대조적으로 대중예술은 '통속성'을 지향하며 그것을 속성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박성봉은 진지성은 지적 통찰, 윤리적 가치 그리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심오한 비전 등을 포함하며, 대조적으로 통속성은 널리 애호되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순간적인 인상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통속성은 웃음, 눈물, 성, 폭력 그리고 백일몽으로 가득차 있는 충동적이며 비합리적인 말초적 자극과 판에 박은듯한 관습들이 어우려져 있는 만화경 같은 세상이다. 이렇게 볼 때 진지성은 무어라 단정할 수 없지만, 대체로 '지루하고 따분하며 딱딱하고 무거운 것'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진지성은 웹소설과 참 안 어울리는 단어인 듯 보인다. 얼핏 보면 웹소설에는 지루함과 따분함이 거의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모두가 잘 아는, 전형적인 왕도 판타지소설이라고 일컫어지는 몇몇 사례들을 살펴보자. 누구나 알고 있듯이 『반지의 제왕』은 이미 그 자체로 선과 악의 장대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 '진지한 이야기'이다. 아울러 어린아이들도 읽는다는 『해리 포터』는 한 등장인물의 7년을 그려내며 그 안에서의 성장과 인간적 승리를 그려냈기에 결코 가벼운 작품은 아니다. 그 외 무수한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웹소설은 아니지만 앞에서 예시로 들은 OTT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진지성의 잣대를 들이대보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웹소설을 규정할 때 제기되는 '진지함과 가벼움'이라는 기준이 몹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 진지성은 결코 웹소설에서 배제되는 영역이 아니다.


사연이 있어보이는 돌탑들. 어떤 소망이 깃들어있을까.




사실 필자가 이 테제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웹소설이나 대중예술이 삶의 어떤 지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 다루는 방식 역시 사뭇 진중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취급하는 방식이 순수문학과 크게 상이할 뿐이다. 웹소설은 순수문학과 전혀 다른 맥락으로 현재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룬다. 문화콘텐츠는 그 태생상 끊임없이 대중들과 상호작용해야만 하며, 조금이라도 대중과의 접점에서 떨어지는 순간 시장경쟁에서 낙오된다. '상업성'이라는 꼬리는 웹소설에 항상 따라붙는 부정적인 인식이지만,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반응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이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곧 웹소설 전반의 트렌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지난 해 연말에 이대남-알파메일의 담론이 커뮤니티에서 활성화될 즈음에 곧바로 웹소설에서는 이혼물과 그와 관련한 복수물 등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커뮤니티에서 극화된 갈등은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해소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웹소설은 대중의 현재적 지평에 무엇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것의 결핍을 채우는 형태로 이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웹소설에서는 순수문학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는 삶의 공백을 자기들의 홈그라운드로 삼는다. 눈여겨 볼 점은 이 영역들 중에는 진지성으로 포섭될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순수문학이 전적으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단의 차원 혹은 작가 개개인의 의식적 차원에서 가볍거나 혹은 경박하다는 이유로 기각되는 부분들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상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충분히 웹소설과 관련하여 진지성을 고찰해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만 진지성을 다루고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이 기존의 주류 문학과는 크게 다를 뿐이다. 일례로 필자가 무척 좋아하는 싱숑 작가의 '멸망 이후의 세계'는 주체와 세계와의 대립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판타지 세계로 승화하여 풀어내고 있다. 소재와 내용은 몹시 철학적이나 그것을 전개하는 서사적 테크닉은 웹소설의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무척 진지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분명히 웹소설의 그것을 띤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사실 웹소설에서 다뤄지는 이혼, 삶, 도피, 나아감, 도전, 반복 등의 주제들은 결코 가벼운 무게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은 웹소설만의 방식으로 가볍게 그리고 경쾌하게 다뤄짐으로써 작품은 그 자체로 쾌락적으로 승화된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어떤 의미로 웹소설은 코미디(희극)이 만들어지는 맥락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코미디언은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생성한다. 마찬가지로 웹소설은 작가의 자의식을 감추고 대중들의 결핍을 충족하고 카타르시스를 생성한다. 진지성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사유될 수 있다.





지금까지 웹소설을 진지성과 관련하여 고찰해보았다. 퍽 오래 전부터 웹소설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말에 퍽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향유하고 또 마음껏 누리며 꿈꾸고 있는 이 세계에도 분명히 의미있는 몸짓과 위로와 실천이 이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이러한 불만을 어느 정도 풀어볼 수 있는 계가기 되었던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가능하다면, 웹소설의 양산성에 대한 이슈를 다뤄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박성봉, 대중예술의 미학



이전 15화 [시리즈]13. 웹소설의 모티프, 빙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