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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Dec 20. 2022

[시리즈]15. 웹소설과 양산성

웹소설의 양산성,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흔히들 웹소설의 고질병으로 제기되는 것 중 하나가 양산성이다. 그런데 양산성은 비단 웹소설만의 문제가 아니다. 웹소설의 전신(前身), 그러니까 판타지 소설의 시대에서도 양산성은 언제나 문제시되어왔다. 지금도 자주 보이는 용어인, 소위 말하는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가 이 즈음에 등장한 멸칭이었다는 점은 판타지를 애정하는 오랜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이렇게 시간대를 확장해보면 '양산성'은 결국 웹소설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양산성의 문제는 미디어(매체), 하위 장르, 독자의 성별 따위를 초월하여 장르적 본질 즉 판타지-웹소설이라는 계보 자체에 내재한 고유한 속성에 가깝다. 본고는 그런 의미에서 '양산성'의 를 다르게 살펴보는 글이고자 한다.





예나 지금이나 판타지 소설을 향한 주된 비판 중 하나는 곧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된 패턴'이었다. 대부분의 판소는 드래곤이나 엘프, 혹은 강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갖고 하렘 왕국을 만들며 이야기를 쉽게 풀어간다. 서사 전개도 주로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을 무시할 때 주인공인 직접 엄청난 활약이나 능력을 선보임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거나, 혹은 위기에 빠진 히로인을 구함으로써 영웅이 되는 양상이 주를 이뤘다. 그렇다 보니 독자들은 조금씩 이야기에 익숙해지며 그 다음을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특정한 이야기 패턴의 반복이 몇몇 작품을 넘어 시장 전체로 확산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독자들은 이러한 작품과 현상을 향해 양산형 소설 혹은 '양산된다'고 비판하기에 이른다. 양산성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작가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작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 작가는 생각보다 시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내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생물이다. 그것은 설령 저자의 죽음을 종용하는 웹소설 시장이라도 해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지나간 판타지 소설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 세계를 그려내고자 하는 독창적인 작가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실상 판타지 소설의 시초 격인 <드래곤 라자>나 <퇴마록> 등과 같은 1세대 작품 이후에도 기존의 판타지 장르와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는 작품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워낙 본 지 오래되어 기억이 흐릿하지만 이질적인 컨셉의 <드래곤 레이디>나 <SKT>와 같은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독자와 대중 사이의 간극은 왜 발생하는가? 물론 필자는 작가에게 면죄부를 제공하거나 독자에게 비판을 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봐야 할 점은 '그럼에도 이러한 작품들이 주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이 작품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그저 그런 부수만을 판매하는 데에 그쳤다. 오히려 대부분의 부수는 '전형적인 양판소'에서 나타났다. 달리 말하자면 독자들은 양판소를 욕하면서도 꾸준히 그것들을 '읽었다'.


요새 집 주변에서 종종 보이는 볕 쬐길 좋아하는 괭이, 나는 삼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실은 '양산성'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양산성을 둘러싼 시선들, 예컨대  '작가가 창의성이 없다,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시장의 요구다, 대중이 그런 것만을 읽는다..' 이런 요인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이는 독자나 작가가 시장과 마주하면서 촉발되는 경험적 차원 즉 일차적 반응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느낌과 별개로 특정한 코드들이 반복적으로 양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산성은 달리 말하자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코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코드들은 대중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쓰여온, 그래서 지나치게 익숙하고 지겹기까지 한 코드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는 얼마든지 이러한 코드를 피해서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원하는 글을 쓰는 자유가 있듯이, 독자에게도 온전히 원하는 글을 읽을 자유가 있다. 다시말해 작가가 스스로 마이너한 취향과 장르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독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의 창구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스로 먹고살 만큼의 수익을 내는 대형 작가는 메이저 장르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뿜어낸다는, 절묘한 밸런스를 기막히게 유지한다. 이를테면 누구나 아는 환생이나 빙의 코드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생산한다는것이다. 대표적으로 '전독시'가 그런 케이스다.


이렇듯 양산성을 결정하는 기저에는 보편적 공감대가 존재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보편성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하는 듯 싶다. 보편성은 시대적 경향이나 트렌드로서 대중의 선호도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간이 갖고 있는 선험적 선호 역시 다수 취향의 교집합으로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은 두 유형의 보편성을 능숙하게 다룬다.


이 중 우선 첫 번째, 트렌드로서의 선호를 살펴보자. 특정한 패턴이 시장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은 곧 대중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웹소설의 창작은 전적으로 작가 개개인의 작가에 달려 있지만, 그것을 읽는 것은 독자'들'이다. 독자가 아니라 '들'을 강조하는 것은, 이 트렌드가 '다수성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몹시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 개인 혹은 독자라는 구체적 개인과는 무관하게 차라리 구조적 요인에 가깝다. 조회수는 결국 대중 선호교집합을 의미한다. 리고 작가는 다수성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가를 분석하여 '어떤 작품'을 쓸 것인지를 판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웹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트렌드는 결국 대중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이혼물'이나 '복수물'의 급작스런 유행은 곧 사회에 이와 관련하여 생겨난 결핍을 작가들이 읽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양산성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웹소설, 보다 정확히 말해 '문화콘텐츠'는 후행적 지표에 가깝다고 하겠다.


둘째,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게 또 다른 맥락에서 양산성의 원리가 존재한다. 예컨대 섹스, 재미, 즐거움 등은 누가 시켜서 알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게되는 즉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이처럼 교육이나 문화적 학습 등 사회문화적 영향과 무관하게 인간이 갖고 있는 고유한 본능은 앞서 본 트렌드와 무관하. 이러한 맥락에서 섹스와 관련한 산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는 르노, AV라는 이름의 산업으로 존재했지만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춘화나 포르노그래피가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웹소설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자신의 테마로 삼는다. 남성 독자들이 보는 장르에 하렘물이나 권력욕을 자극하는 작품이 많은 반면 여성 독자들이 보는 장르에도 아름답고 잘생긴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판타지를 그려내는 유형의 로맨스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웹소설은 이러한 인간의 감춰진 욕망을 건드리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웹소설은 사실 과거의 '춘향전 경판(京版)' 혹은 '춘화(春畵)'의 역할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당시의 소설이나 춘화는 흔히들 양반들이 읽는 사서삼경 등의 '대설(大說)'과 달리 대중이 세책가에서 빌려와 읽으며 시시덕거리는, 그들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콘텐츠'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콘텐츠들은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을 잘 대변하고 위로하고 있는 만큼, 결코 천박하다거나 저열하다고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박성봉의 말을 빌리자면 '섹스, 웃음, 판타지, 폭력성, 감상성' 등의 통속성을 적극적으로 승화하는 부류의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니, 아무래도 한번쯤은 통속성이 갖는 함의를 진지하게 다뤄볼 필요가 있는듯 보인다. 언젠가 '웹소설의 미학'을 다룰 때에도 한 번쯤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웹소설의 미학적 지향성이 순수문학과 분명히 결이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그것을 나름대로의 언어로 정제화시켜 언어화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오랜만에 올린 글이다. 학기말에 유독 논문이나 발제 등이 겹치기 때문에 본 칼럼을 거의 쓰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웹소설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시도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글을 깊이 묵혀둘 시간도 함께 만들지 못했던 듯싶다. 개인적으로는 매번 쓸 때마다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논리를 찾아보고자 하는데 이번 글은 유독 그렇게 하지 못해서 무척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제는 가볍게 드라마와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면서 간단하게 리뷰하는 형태로 재미있게 글을 써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나의 생각 및 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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