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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Apr 18. 2023

[시리즈]20. 판타지소설의 근원적인 욕망2

환상의 충동과 미메시스의 충동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지난번 글에서 미처 깜박한 내용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그걸 다뤄보고자 한다. 어쩌면 조금 딱딱할수도 있는 원론적인 생각들이다. 도대체 '환상(판타지)'이란 뭘까? 즉 이번 글의 목적은 '환상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지를 고민해보는 것이다.





지난번에 썼던 도식을 가져와보자. (본 글에서는 환상과 판타지를 구분하지 않고 서술하고자 한다.) 필자가 보기에 토도로프, 잭슨, 흄 이렇게 세 사람이 환상론을 논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자들이다. 이 외에도 톨스토이 등 환상을 정의한 연구자가 몇 사람 더 있으나 필자기 미처 알지 못하거나,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들이라 기각하였다.(꼭 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세 사람의 환상에 대한 정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토도로프 : 환상은 '친숙한 세계에 설명할 수 없는 법칙이 발생하는 현상'이며 이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상상으로 여기거나 혹은 현실의 일부로 여기느냐를 놓고 망설이는 시간에 있다.
로지 잭슨 : 환상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생산되기에 현실과 분리될 수 없으며, 현실의 속박에서 야기된 결핍과 상실을 보상한다. 환상은 그 욕망의 표현이다.
캐서린 흄 : 이야기의 두 가지 본질, '대상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에 대응하여 '현실을 변형하고 싶은 환상'이 존재한다.


이들의 정의는 환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각기 상이한 고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처음에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연구를 각각 대략적으로 살펴본 이후로는 캐서린 흄에 가장 무게가 기울어졌다.왜냐하면 앞선 두 연구자는 환상에 대한 구체적 정의를 시도했으나 설명되지 않은 잔여들이 남아있게 된 반면 캐서린 흄은 이러한 환상론의 구체적 약점을 숙지하고 환상에 대한 '포괄적 정의'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 시도는 몹시 대담하면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흄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캐서린 흄은 토도로프와 로지 잭슨 등을 포함하여 그동안의 연구자들이 정의한 환상론이 갖는 한계들을 제시하면서, 환상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으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흄에 의하면, 문학은 본래 ① 미메시스를 향한 충동과 ② 환상을 향햔 충동으로 양분된다. 미메시스가 현실에 의한 모방, 투사, 재현 등 리얼리티에 몰두하는 욕구라면 환상은 그 반대로 탈출, 놀이, 환영 등 탈 리얼리티에 초점이 맞춰진 욕구이다. 다시 말해 흄은 환상적 욕망의 반대 척도로 미메시스적 욕망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놀랄만큼 과감한 기획이지만, 이로써 지금까지의 문학사나 이야기들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그리고 배격되어져 왔던 지점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토도로프는 환상을 특정한 '장르'로 규정하면서 구체성을 확보했지만 정의된 범주를 명백하게 벗어나는 예외사례들을 환상문학에 넣을 수 없게 만들었고, 로지 잭슨은 '전복'에 집중하면서 그와 관련한 일련의 내부적 양식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포괄하기 어렵게 된다는 난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잭슨은 그 자신이 이야기하듯, '충동' 내지는 '지향성'으로 환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1쪽) 달리 말하자면 환상을 지향하려는 충동만 존재한다면 내부적 양식이 존재하지 않더라도(잭슨),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더라도(토도로프) '환상문학'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록 흄의 정의가 다소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존재할 순 있지만 그것은 흄의 시도가 환상의 근본 원칙을 설정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함이다.


필자 역시 판타지의 본질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충동과 욕망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없다면 애초에 우리가 판타지를 볼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충동은 현실을 모방하려는 이야기의 본능과 현실을 벗어나려는 이야기의 또 다른 본능으로 나란히 존재한다. 즉 모방과 환상은 나란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리얼리즘에 천착한 지금까지의 문학 담론은 환상을 거의 다루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흐린 날의 서울숲


그렇다면 미메시스의 충동은 무엇이고, 환상의 충동은 당최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미메시스의 욕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놀랍게도 이 담론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무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언급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4장에서 시의 기원을 설명할 때 인간은 천성적으로 인간은 무언가를 모방하면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모방하는 능력으로부터 시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이 때부터 시는 현실을 재현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의 사상적 원천은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그의 스승 플라톤에게서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 개념을 통해 예술론을 이야기하면서, 이데아의 모방이 현실이고, 현실의 모방이 그림이라는 식의 설명을 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열화된 현실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시인추방론)고 주장한다. 즉 '문학은 모방이다'라는 관점은 이렇게 두 사상가에 의해서 형성되어졌으며 이것이 현대까지의 문학론의 사상적 저변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내려왔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환상의 충동은 무엇인가? 아쉽게도 앞서 역사가 오래된 '미메시스'에 비해 '환상'은 담론의 축적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현상학적으로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재현한다'는 욕망에 비해 '없는 것을 소망한다'는 욕망이 더욱 강하게 작용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상상한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상상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부재한 것에 대한 강한 의지'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보기에 환상의 충동은 사실 문학의 지배적 충동으로 간주되었어야 했다. 문학의 모방론 이면에 탈주 욕망이 존재한다는것 역시 사실이니까 말이다. 상당히 아쉬운점이 아닐수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환상의 욕망이 훨씬 압도적이라면, 미메시스의 담론과 달리 환상과 관련한 담론은 왜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축적되었을까. 많은 가설이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현실이라는 구체적 대상이 존재하는 '모방'과 달리 '환상'은 보이지 않는 실체(상상, 가상, 추상)에 기반하기 때문에 담론의 강도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양태'의 차이는 초창기엔 큰 차이가 있지 않았지만 점차 시대가 발전하고 진보됨에 따라, 특히  데카르트 이래로 사유철학, 회의주의, 과학의 출현 등을 거치면서 담론의 양과 질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리얼리즘 담론이 이례적으로 많이 출현했던 시기 역시 18~20세기였던 것도 이러한 짐작을 뒷받침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날에는 그 역으로 리얼리즘적 지향의 콘텐츠에 비해 판타지적 지향의 콘텐츠가 이례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것은 단지 인간이 지닌 또 다른 본성의 발현일 뿐이며, 지금까지는 단지 지식-권력의 헤게모니에 의해 담론적으로 억눌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판타지소설, 웹소설 연구자들은 단순한 환상성의 연구를 넘어 '미메시스'와 리얼리즘에 대응하는 담론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더 많은 담론적 축적이 요구되며, 그런 점에서 환상과 미메시스가 나란히 서는 것은 아직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짧은 글을 마치며. 생각보다 '환상과 판타지'에 대해서 할 말이 많구나라는 걸 오늘 간단한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만약 이런 방향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판타지의 위상을 복구하는 데에 힘써봐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또한 문화콘텐츠가 그간 '잃어버린 환상성'을 표상하는 구체적 양태라는 맥락에서도 의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볼수도 있고, 여하튼 여러가지로 관점을 열어주는 재미있는 고찰이었다.





참고문헌

캐서린 흄, 『환상과 미메시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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