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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Apr 06. 2023

[시리즈]19. 판타지소설의 근원적인 욕망1

웹소설과 드라마의 환상성에 대한 가벼운 고찰

요즘 생각하는 고민이 있다. 사람들은 왜 판타지소설의 '판타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검과 마법, 그리고 정령이 도사리는 세계를 좋아하는가? 이 물음은 보다 일반화하면 다음의 질문으로 정정할 수 있다. 판타지소설의 '판타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옛날의 나는 판타지를 검과 마법으로 어우러지는 상상 속의 세계로 한정하여 생각했고, 고전적인 판타지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장르소설에서 말하는 판타지'와 '문학에서 말하는 판타지'의 차이가 있다고 본 것 같다. 필자는 한때 전자의 판타지만이 진짜라고 생각했지만, 논리적으로 사고해보면 이는 다분히 앞뒤가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검과 마법으로 된 장르소설의 세계관은 길어봐야 『반지의 제왕』이나 <던전앤드래곤> 이후로 정립된 세계관이며, 판타지의 원형은 이보다 훨씬 오래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시대 이래로 꾸준히 존재해왔다. 즉 오늘날 판타지 소설의 구체적 기원은 『반지의 제왕』 등에서 찾을 수는 있어도 근원적인 뿌리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특정 작가에 의해 빚어진 세계관이라곤 하지만 『반지의 제왕』조차도 어딘가에 있었던 가상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빚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도달해보니, 장르소설로 인해 평성된 판타지의 고정관념은 일단 분리해놓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질문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판타지란 무엇인가?'


우선 판타지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들의 정의를 살펴보자. (지금부터 판타지는 환상과 동의어로 쓰고자 한다.) 흔히들 환상에 대해 정의할 때 크게 참고하는 연구자가 몇몇 존재하는데, 토도로프, 캐서린 흄, 로지 잭슨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각각의 판타지에 대한 정의를 간추려 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편의를 위해 토도로프 외 두 명에 대해서는 박정아 연구자의 정리를 일부 가져왔다.


토도로프 : 환상은 '친숙한 세계에 설명할 수 없는 법칙이 발생하는 현상'이며 이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상상으로 여기거나 혹은 현실의 일부로 여기느냐를 놓고 망설이는 시간에 있다.
캐서린 흄 : 이야기의 두 가지 본질, '대상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에 대응하여 '현실을 변형하고 싶은 환상'이 존재한다.
로지 잭슨 : 환상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생산되기에 현실과 분리될 수 없으며, 현실의 속박에서 야기된 결핍과 상실을 보상한다. 환상은 그 욕망의 표현이다.


이들의 정의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지만 판타지의 본질을 생각하기에는 충분한 함의를 담고 있다. 비록 각자의 정의는 상이하지만 토도르프, 흄, 잭슨에 있어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이 곧 '현실'이라는 것과 그것의 대응으로 '환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환상이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문화사회적 맥락들을 가리킨다. 18세기 이전의 과거에는 이러한 구분이 선명하지는 않았기에 이야기 내에 환상성이 섞여들어가는 경우가 보통이었으나(예를 들면 중세문학들이나 호메로스 시대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곳에 신화적 혹은 환상적인 요소들이 이야기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데카르트와 뉴턴 이후 과학적 세계관이 구축된 이후로는 리얼리즘(사실주의) 문학이 서서히 주류화되고 이러한 리얼리즘과 구분하여 환상문학을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시선이 자리잡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환상문학은 과거에는 대체로 우리가 하는 이야기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시대가 흘러 문학양식이 체계화된 이후로 사실주의 문학과 구분하는 장르군 개념으로 정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환상은 훨씬 오래전 고대에서부터 있어왔을 것에도 불구하고 '환상문학'이라는 문학군은 19세기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를 시사하고 있다.


만개한 벚꽃, 생각보다 빨리 지는 바람에 봄을 만끽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렇다면 이번엔 앞서 추출된 인자에 주목하자. 환상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어떤 현상'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말 그대로 ① 초자연적이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혹은 좀 더 포괄적으로 ② 지금은 이뤄지지 않은 실현하기 어려운 인간적 꿈도 포함할까. 전자를 환상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의 경우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듯 보인다. 예를 들어 맑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라던가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따뜻한 세상'은 물리적 제약 혹은 법칙적인 제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의 의지와 욕망, 동기에 달린 문제다. 달리 말하자면, 실질적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실현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한다. 이 경우엔 환상이라고 볼 것인가 혹은 아닌가?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것을 특히 탁월하게 구현하는 장르가 드라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후배들의 논문을 지도해주다 느낀 건데, 드라마의 환상성은 대체로 리얼리즘과 환상 사이의 어느 경계지점에 모호하게 머무르며 '아직 이뤄내지 못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어떤 세상'을 상상적으로 구현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대문에 환상성을 내포한 드라마(여기서 말하는 환상성은 욕망에 가까운 의미로서의 환상성이다.)는 실제 인물과 장소를 배경으로 하며 이들 인물을 바탕으로 작가에 의도에 따른, 혹은 대중의 욕망에 따른 작품 설계가 이뤄진다. 따라서 드라마는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대중의 환상과 욕망을 자극하는 형태로, 즉 일반적인 환상문학이나 장르문학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환상을 작동시킨다. 예를 들면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나 이우정 작가의 <슬기로운 의사생할>이 바로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위에서 언급한 두 드라마는 현실에서 일절 못 이루는 성격의 환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얼마간의 환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우리는 통념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실제적 결핍을 대상으로 환상을 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의 환상은 완전한 가상이 아닌, 부분적 리얼리즘에 기반하고 있는 환상이다. 물론 '도깨비'나 '재벌집 막내아들'과 같은 케이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드라마에서의 환상성은 웹소설과 그 궤를 달리한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웹소설의 환상은 어떤 맥락으로 작동할까. 분명한 것은 드라마와 다르게 리얼리즘과는다소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웹소설은 위에서 언급된 ① 초자연적이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다. 즉 웹소설은 이 초자연적이고 불가능한 현상에 기반하여 가상의 상상이 욕망을 충족하는 형태로 설계되어진다. 다시 말해 웹소설의 환상은 특정한 현실성을 토대로 구축되어지기 보다는 독자의 가정적 상상에 근거하여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는 웹소설의 하위 장르에 포괄되는 대체역사물이나 정치물, 재벌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작품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유롭게 뻗어지는 상상'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웹소설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적 상상은 이야기를 즐겨보는 본성, 즉 인간의 유희본능과도 좀 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듯 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이야기를 보면서 상상하고 즐기는 인간의 속성과 깊이 관계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웹소설은 필연적으로 순수한 의미로 '미학적인'이기보다는 좀 더 오락적이고 속물적인 경향을 띌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어쩌면 필자가 웹소설에 매료되어 있는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네이버 웹소설에서 순위권인 '역대급 영지설계사', '회귀한 게이머', '전독시' 등등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초기의 설정에서 현실적인 욕망이나 결핍에 기반하고 있는 점이 없잖지만, 초중반부의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현실적인 욕망과는 관계없이 이야기가 순수하게 오락과 재미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웹소설 주인공의 결핍은 현실 세계의 독자의 결핍과 부분적으로 관계되어 있지만 이것이 서사 전체에 걸쳐 근원적인 메인 서사로 설계되어 있지 않고, 단지 초반부에서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장치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련의 차이는 드라마의 환상성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굉장히 흥미로운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정리하면, 드라마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환상이 정의'되고 있는 반면, 웹소설은 '현실이라는 관점보다는 상상의 영역에서 환상이 정의'되고 있다는 차이가 드러나는듯 보인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다음 편에 이어서 써보고자 한다. 오랫동안 묵혀둔 주제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미있는 고찰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는다면 웹소설-드라마 간 차이를 환상성이라는 측면에서 논문으로 고찰하는 것도 가능해보인다.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매듭짓고 다음에는 욕망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환상성을 구분해보고자 한다.


오랫만에 칼럼을 썼다. 오랫만에 쓰는 분석적인 글이라 퍽 즐거웠다. 그동안 대본을 쓰느라 다소 바빴는데 유감스럽게도 당분간은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따라서 칼럼은 이전만큼은 자주 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적당한 간격을 두고 생각나는대로 업로드할 것이다. 본 칼럼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마는, 그럼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 봐주러 오시는 분들께는 마음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참고문헌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기억

토도르프, 캐서린 흄, 로지 잭슨의 저서들

고영일, 「환상문학의 이론적 고찰」

박정아 외, 「판타지는 어떻게 텔레비전 장르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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