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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Jul 05. 2022

『천 개의 고원』 서론을 읽으며, 간단한 감상

문화콘텐츠 연구의 단초와 관련한 짦막한 사유

  나는 철학전공자들만큼 들뢰즈를 잘 알지 못한다. 문화콘텐츠 연구자이니 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구상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은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여러 텍스트들 중에서도 나는 『천 개의 고원』을 참 좋아한다. 여타 다른 들뢰즈의 책은 철저하게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 '천개의 고원'은 그때까지 정립한 자신들의 철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여태까지의 정치경제문화사회를 '다르게' 읽어내려 한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적 실천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담론적 노력은, 비철학 분야의 수많은 전공자들에게 지적 영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담론의 지평들을 개척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나 역시 들뢰즈의 책을 읽고 크나큰 인식의 변화를 겪었다.


 


  이 책은 도합 열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챕터가 의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백미는 단언컨대 서론이라 하겠다. 사실 서론만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히 맛볼 수 있다. 다만 천개의 고원에 관한 해설은 나보다 훨씬 공부를 깊이 하신 분들의 주해참조하길 바란다. 그것들을 풀어내는 것은 나의 능력을 한참 웃도는 일일뿐만 아니라 애초에 이 글의 관심사는 거기에 있지 않다.


  내가 유독 흥미로웠던 부분은 들뢰즈들의 목적이었다. 들뢰즈/가타리(이하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을 쓴 목적이 “다양하다는 것(다양체)이 어떻게 실사(특정한 구체성)의 상태로 넘어가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데에 있다고 설명한다.(5쪽) 실제로 천 개의 고원의 서론을 제외한 나머지 텍스트들은 다양체(사건)를 고스란히 보여주려는 시도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의 층위에서 사건은 셀 수 없이 무수한 복수로 이루어진 사건선들의 종합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단선적으로밖에 파악할 수밖에 없다. 즉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 작업을 통해 ‘현상을 단순화시켜 일면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서 많은 사건 내용들이 배제될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그러한 단순화의 이면에 특정한 의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서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책'의 비유는 궁극적으로 총체성의 실체를 자각하라는 들뢰즈의 제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고원들의 나머지 텍스트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총체성의 한계와 더불어 불가피성을 느낀 것 같다. 각 다양체로 이루어진 고원들은 사건의 복잡성을 가감 없이 투과하여 보여준다. 들뢰즈는 세상의 사건은 이러한 양태로 전개되나 우리는 특정한 계열만을 읽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러한 다양체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들뢰즈의 텍스트들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천의 고원이 지니고 있는 난해함은 그의 필연적인 귀결이자 자가당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모종의 총체성으로 매듭지어진 채 주어진 사건들은 얼마나 일목요연한가. 그런 점에서 총체성은 확실히 다양체를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인식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즉 우리는 한 번에 하나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체 자체’를 그대로 수용할 방법이 없다.


  우리의 인식 한계로 인해 다양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가?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열린다. 차라리 우리의 색깔(헤게모니)에 맞는 새로운 총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가? 어쩌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양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총체성에 대한 ‘전면적 교정’일 수 있다. 오히려 이 쪽이 훨씬 합리적이며 승률이 높은 담론의 전략일 것이다.


  들뢰즈의 논의에 따르면 문화콘텐츠 연구도 사실상 '다양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양체 그대로 다루는 방법은 (심지어 들뢰즈의 방법론을 계승한 최근까지의 연구를 보더라도) 현실적이지 못하다.(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러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인식에 준하는 나름의 가치관 혹은 효용성과 내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다양체를 해석해나가는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가 펼친 이상론과 달리 현실적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오히려 어떠한 '담론적 계열'이 우리네 사정에 유효하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새로운 문화콘텐츠론의 출발점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 지점에서 진리를 담론의 투쟁으로 해석한 푸코의 논의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는듯 보이나, 그것은 다음 기회에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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