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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Jul 11. 2022

고급문화과 힙스터문화

대중문화와 거리두는 두 문화적 경향, 그리고 '플랫폼'의 출현과 관련하여

조금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자. 문화콘텐츠 연구자라 하여 맑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등과 같은 거대이론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상에 스며든 영화, 드라마, 뮤지컬, 애니메이션, 음악, 방송 등과 같은 각종 콘텐츠들이 주된 화젯거리다. 어제도 지인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대중문화'와 '힙스터문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논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기서 힙스터 문화는 인디문화를 칭하기도 하며, 학술적으로는 '하위문화'라는 용어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했느냐면, 필자는 고급문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대중문화적 주체이지만, 대중문화 내에서도 유독 비주류인 것을 선호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웹소설'을 좋아하지만 그 웹소설의 대세인 전생물이나 이세계물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웹소설 군(群)에서도 유독 마이너하지만 장인정신이 담긴 그러한 작품들을 애정한다. 그러니까, 필자는 대중문화의 무리에 속해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대중문화의 보편적 취향은 거부하고 있는 힙스터인 셈이다. 이렇게 볼 때 힙스터 문화에 속해 있는 이는 대중문화에 소속되고 그로부터 영향받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분리되려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문화적 소수에 해당하는 힙스터 문화의 구성원은 과거의 '고급 문화'의 구성원과 어떤 차이를 보일까? 물론 옴니보어적 취향이 주류가 됨에 따라 고급-대중 따위와 같은 식별이 더 이상 무용해졌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그럼에도 고급-대중문화의 이분법적 편린은 여전히 우리의 의식에 잔존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순전히 '타자에게 보이는' 용도로서의 콘텐츠 소비가 있어서는 안 될테니까 말이다.


필자에게 있는 오래된 책의 정의를 따르면, 고급문화는 일반적으로 문화적 소수 즉 엘리트 계층들이 향유하는 문화들의 총체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론 무용, 순수미술, 오페라, 뮤지컬 등의 장르를 가리킨다. 반면에 대중문화는 보통의 다수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들의 총체로, 주로 만화, 드라마, 게임, 대중가요, 유튜브, 예능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과 다르게 문화연구에서 다루는 '하위문화'라는 개념이 있는데, 아마도 힙스터문화라는 개념에 가장 부합되는 정의일 것이다. 홀, 헵디지 등에 의해 규정된 하위문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하위문화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지닌 문화에 대해, 그 안에 존재하면서 독자적 특질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소집단의 문화를 가리킨다."


이상의 논의만으로 충분히 각 문화의 위상공간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고급문화를 앞으로 놓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핵심이 되는 것은 단연 대중문화로, 이 대중문화야말로 실질적인 '문화적 중심'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다음으로 대중문화에 길항하는 두 개의 문화적 경향로서 '고급문화'와 '힙스터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먼저 고급문화의 핵심을 짚어보자면, 대중문화와 변별되는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제도권의 권력을 등에 업었다는 점이라 하겠다. 이때 제도권의 '권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계층적/권위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간 인류가 쌓아온 학문, 예술, 역사 등 문화적 압력에 의해 구성되어진 체계와 질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정체성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오랜 전통의 체계와 질서에 근거하게 된다. (신춘문예와 순문학의 권위가 그렇듯이) 부르디외가 제기하는 구분짓기의 욕망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다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제도권의 권력에 의해 보장받지 못하는 힙스터 문화(≒하위문화)의 구분짓기적 행위는 어디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것인가? 힙스터 문화는 발생학적으로 보면 대중문화의 한 양상으로 태어났으되, 한편으로 이러한 대중문화로부터 분리되고 그로부터 저항하는 것을 자신의 스탠스로 삼는다. 왜 그러한가? 힙스터 문화권에 포섭되는 이들을 보면 '최초의 선호'는 대체로 자신들의 취향에 근거하나, 그러한 자신들이 소속된 문화를 대중문화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구분짓기의 행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구분짓기'는 자신들의 문화가 보편다수의 대중문화적 취향과 다르다는 차이의 인식에서 발생되어진다.(그러므로 여기서의 구분짓기는 피동형이다.) 예컨대 오래 전 대중가요와 다른 독특한 음악성을 자랑하는 홍대 인디밴드가 자기네 취향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들이 존재했으며, 나아가 이들은 인디밴드가 대중적 취향으로 포섭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이때 들여다 볼 것은 홍대의 인디밴드를 자신들의 취향으로 삼았던 소수파의 인식에 있다. 그들은 좋고 나쁨을 떠나 자기네들이 대중문화와 차별된다는 '이질성'을 문화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의외로 이렇게 내세워진 근거가 한편 '고급문화의 그것'과도 닮아있다는 데에 주목하자. 다만 고급문화에서처럼 제도권에 대한 보증을 일절 받지 않기 때문에 힙스터 문화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온존하기 위해 '대중성'에 저항하기 위한 여러 당위적 근거를 찾는다. 즉 예컨대 미학적(예술적)이라거나 예술성, 저항성, 마이너적 감성, 독특함 등 여타 의미론적 당위를 찾아 스스로를 무장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중문화는 '다수'가 그 자체로 힘이자 권위가 되므로, 달리 그럴 필요성을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힙스터의 구분짓기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이 미묘한 층위에서 작동하는 셈이다.



사진은 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기서 논의를 끝마쳐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글은 단지 책 속의 문장들을 사유한 것에 불과하기에 실제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앞서 고급, 대중문화에 이어 힙스터 문화의 정체성과 특징들을 대략적으로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으로서의, 명확히 구분되는 경계로서의 서브컬처는 오늘날에 이르러 상당히 옅어진 경향이 없잖다. 오히려 경계짓기의 양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수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과거에는 마치 드넓은 땅에 군데군데 도시가 있다는 느낌으로 집단과 집단 사이에도 충분한 거리가 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수많은 집단들이 하나의 거대한 장이나 도시에 밀어넣은 듯한 느낌의 '시장'의 모양새에 가깝다. 따라서 경계는 집단과 집단을 분리시키는 단절의 맥락으로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한 매개적 장치로서 수행된다. 다시 말해 타자와 구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맥락으로서의 '경계'는 거의 무화(無化)되었으며, 오히려 오늘날의 경계는 해당 취미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상과 정체성을 발화/호명하는 능동적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스스로 헬창, 격빠, 뮤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렇게 변화된 까닭에는 예전과 같은 취미의 경계가 다소 애매해진 까닭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디어적 측면에서 대형 플랫폼이 등장한 것이 거의 절대적 요인으로 작동한 것 같다. 온라인-오프라인과 관계없이 비슷한 취향들이 누적되고 모이는 교집합적 장소(커뮤니티)가 급격히 늘어나고 자생할 수 있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플랫폼의 역할이 지대했다. 유튜브, 넷플릭스, sns 등과 같이 거대한 문화적 교류가 오가는 장(場)으로서의 '플랫폼'은 다양한 '차이'들을 수렴하여 하나의 단일한 '창구'를 지나게 만들어 문화적 혼성화를 일궈낸다. 예컨대, 나 역시 유튜브가 인도하는 알고리즘을 따라 전혀 새로운 세계에 눈뜬 경우가 없지않다. 평생 인연이라곤 전혀 없을 것만 같았던 소위 '헬창'들의 세계를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통해 접했고 각종 운동법과 부위별 근육 명칭을 알게 되었으며 아주 조금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헬창이 되는 것은 요원한 일인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유튜브는 어떤 의미론 인류보편을 향해가는 거대한 문화적 용광로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이전처럼 타자와의 교류가 쉽지 않기에 그들에 대한 '이해'조차 쉽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플랫폼 사회는 타자를 알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너무나도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미디어의 혁신적 변화는 하위문화는 물론 대중문화의 전반적 양상과 정체성을 상당부분 바꿔놓은듯 보인다. 맥루한의 말을 내 나름대로 각색하자면 '미디어가 문화를 뒤바꾼 셈'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고급-대중-힙스터문화의 암묵적인 삼분법이 해체되고, 이렇게 해체된 문화적 파편들은 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경우의 수'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듯 보인다. 일련의 문화적 파편들은 장(場) 내부의 논리를 따라 무한경쟁을 통해 도태되거나 혹은 주류화되어 메인문화로 부상될 뿐이다.

  반면에 현대적 주체들은 자신들의 누적된 경험과 취향, 선호에 따라 이 경우의 수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유로이 자리를 옮겨간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의 '주체'는 대중적 인간인 동시에, 자기 취향과 선호에 따른 선택과 자유로운 이동을 수행하는 노마드적 인간이다. 필자의 오늘 유튜브 행적을 돌이켜 보면, 클래식을 틀고 푸코-촘스키의 논쟁을 듣다가 트위치 방송인들의 클립과 포켓몬스터 pv를 시청하고는, 오버워치 게임 스트리머의 영상으로 마무리하며 컴퓨터를 종료했다. 다른 이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지만 비슷한 루트를 거쳐왔듯, 이러한 과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현대인의 문화적 일상이라는 것이다.



 

마치며. 문화에 대한 내용으로 마무리하려다가 글이 무척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마도 '플랫폼'이 지니고 있는 위상이 이질적이리만큼 막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견식이 미진한 필자로서는 이것이 문화적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좋게 봐야 하는 것인지, 혹은 문화생태계의 독점화라는 측면에서 우려될 성질의 것인지 아직 분간되지는 않는다. 다만, 앞으로 등장할 문화적 인간은 이전과 다르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참고문헌

필립 스미스, 한국문화사회학회 역, 『문화이론』, 이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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