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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Feb 03. 2023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삶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를 보고

“이 법칙(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에너지이며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무한히 존재하며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에너지고, 나도 에너지야.

그리고 너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는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새로운 것으로 형태가 바뀔 뿐이지.

이론적으로 우리 둘의 에너지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수 백만 년이 지난 후에,

그때 어쩌면 너는 감자가 되거나 토마토가 될지 몰라.”   

   

- <끝없음에 관하여> 대사 중에서 -




어느 날 내가 병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 허무했다. 내가 죽는다면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작은 성취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지만 그건 진짜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이고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야 죽고 나면 그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무던하게 곰 같은 남편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아이들과 함께 꾸리는 ‘내 가정’이 있고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며 ‘내 일’도 하고 있지만, 여기서 그만 죽는다고 해도 그다지 아쉽게 생각되지 않았다. 누구든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사고로, 또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살아오는 내내 내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체감은 없었다. 갑자기 내 삶에 등장한 병의 존재가 나를 갑자기 ‘유한한 존재’ 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병세가 심각하거나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은 아니었지만 평소 병원에 가는 것을 꺼려해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잘 가지도 않았고 주사 맞기 무서워하는 겁쟁이기도 해서 몸에 칼을 댄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공포스러웠다. 건강하다고 생각해 왔고 자각증상이 없어 통증이 전혀 없었기에 내 몸속에 ‘암’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병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내 삶을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듯 3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찾아왔다.


무사히 수술을 받고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를 위해 1인 차폐실에 3박 4일간 입원했다. 차폐실은 의료진도 들어오지 않고 외부와 격리된 시설이었다. 방사능 누출 우려 때문에 유리창은 전면 통창으로 여닫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고, 화장실은 따로 있지만 조그만 세면대만 갖추고 있어 세수 외에 머리를 감거나 샤워도 할 수 없었다. 삼시세끼 밥을 받을 때만 문을 열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문 앞에 도시락을 두고 가기 때문에 사람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72시간을 외부와 차단된 채 오롯이 혼자만 있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다. 말할 대상이 없어 혼잣말을 내뱉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책을 읽다 지쳐서 멍 때리다 보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인지 좋았던 일보다는 부끄러웠던 일, 후회되는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났다. 아마도 행복한 느낌보다 부끄럽고 아쉬운 감정이 뇌에 더 강렬한 자국을 남기기 때문이 아닐까. 그 강렬한 자국들이 되새기며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부끄러워 혼자 이불킥을 날리고,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생각하며 가지 못한 길을 상상했다. 그렇게 나는 이 차폐실을 나가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으리라, 앞으로는 다른 선택도 해보리라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먼지 같이 사라져 버릴 인간의 삶, 의욕도 없고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었는데, 추억과 공상과 망상 끝에 갑자기 삶에 대한 의욕에 불이 붙었다. 이왕에 사라져 버릴 먼지 같은 내 인생, 남은 시간 동안 활활 불타올라 깨끗하게 미련 없이 사라지리라, 혼자서 비장하게 결의를 다졌더랬다.     


차폐실을 퇴원한 지 이제 5년이 지났다. 나는 예전과 같이 지나고 나면 부끄러울 일들을 하고 돌아서면 후회할 선택도 하면서 지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이후로 나의 유한한 삶을 자각하며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을 벌이면서 삶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자각하는 일을 겪어도 삶에 대한 태도는 바뀔지언정 사람의 성향이나 성격 같은 근본적인 부분은 잘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 같은 인간의 삶이 계속 반복되는 것인가.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를 보면 마치 32장면의 사연을 붙여놓은 연작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어떤 남자를 보았다’, ‘어떤 여자를 보았다’라고 하면서 타인의 삶의 한 장면들을 연속해서 보여준다. 32개의 장면들은 밝고 행복한 모습보다는 어딘지 불편하고 거북한 장면들로 이루어져 관찰자의 입장에 놓인 관객들에게 공감을 구하는 것보다는 난해한 그림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의 투병시절에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영화 속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상하고 불편한 일들이 일어나는 인간의 삶과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내 삶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3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우리 모두 자신의 인생에 걸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그저 그렇게 끝없이 과오를 반복하며 그럼에도 다시 잘 살아보기를 결심하며, 그렇게 먼지가 될 인생을 불태워 생겨나는 에너지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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