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개무량은 이럴 때 쓰는 말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부쳐
2023년 2월 10일, 아들 1호 윤슬이가 초등학교의 빛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2017년 3월, (제주)애월초등학교 입학식이 아직도 기억에 선한데, 초등학교 졸업이라니 감개무량(感慨無量)* 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2010년 11월에 태어난 아들은 출산부터 난산이었다. 겁이 많고 아픈 것을 잘 참지 못하는 나는 첫 출산을 맞아 겁에 잔뜩 질려 있었고 무통 주사를 계속 맞아서 다리가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저릿저릿했다(무통 주사의 부작용이었다). 그래서 정작 자궁문이 다 열리고 힘을 줘야 할 때 하체에 감각이 없어 제때 힘을 주지 못했다. 의료진과 나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좁은 산도를 통과하고 나온 아들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다. 탯줄을 자르려고 준비하던 남편은 전쟁통과 같은 분만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장갑 낀 손만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전언에 따르면 의사의 산모 배 밀어내기 신공으로(배에 손자국으로 멍이 들었을 만큼 진짜로 내 배를 눌러 아이를 밀어냈다) 나온 아들의 머리가 빨갛고 오이같이 길쭉해서 너무 놀랐다고 한다.
3.5kg으로 태어난 아들은 성장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젖은 잘 나왔지만 젖통이 너무 작고 함몰유두여서 젖을 물리기가 쉽지 않았다. 누워서 젖 물리다 잠들면 아기 이가 썩기 십상이라던데 그런 걱정이 부러울 만큼 나는 수유 쿠션 없이는 단 한 번도 젖을 먹이지 못했다. 아이가 평균보다 크게 태어났음에도 100일 이후부터 크는 속도가 점점 느려져 키와 몸무게가 하위 10%에 들어서자 내가 잘못 키우고 있나 고민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설소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발음이 좋지 않아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아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조음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어린이집 다니는 내내 선 긋기나 가위질 같은 것을 못해서(가위질은 보통 오른손잡이용 가위를 구비해 두는 탓에 왼손잡이인 아들이 잘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신체 협응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여 운동치료도 다녔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이라도 조금 알고 가야 할 것 같아 학습지 선생님을 불렀는데 두어 달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이 두 손 두 발 들고 못 가르치겠다며 그만두셨다. 내가 퇴근 후에 한글을 가르치다 아이와 자꾸 싸움이 나서(사실 일방적인 나의 화풀이 었지만) 결국 한글을 알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고서도 아이가 보통 아이들보다 한글에 대한 배움이 너무 늦어 수소문 끝에 애월에서 월평까지 무려 편도 28km를 달려 난독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직장을 조퇴하고 애월에 가서 아이를 픽업해 다시 월평을 가야 해서 거의 편도 50km가 넘는 대장정(이라 쓰고 생고생이라 읽는다)이었다. 최소 일주일에 두 번은 수업을 들어야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고 맞벌이 부부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 한 번밖에 갈 수 없어서 아들에게 미안했었다.
2020년 3월, 부산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기게 되어 지금의 초등학교에 전학하게 되었고, 아들이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것 같으니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전학한 학교의) 4학년 담임 선생님과 친정 부모님의 강권에 병원에 갔다가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ADHD 진단을 받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충격을 받겠지만, 사실 나는 진단을 받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들을 키우는 동안 너무 고되어서 내가 엄마의 자질이 없다는 자책을 수없이 많이 했었고, 모든 문제가 태어날 때 너무 힘들게 태어나서, 그리고 내가 엄마로서 부족해서 아이가 잘 못 크나 싶어 문제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렸었다. 그러나 ADHD 진단을 통해 사실은 내 탓이 아니었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찌 되었든 ADHD라는 것이 달가운 병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학습적인 부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또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는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운동치료를 받았었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탁구, 피구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스포츠보이로 거듭났다(지금은 축구에 푹 빠짐). 공부 잘하기는 바라지도 않았고 한글 읽고 쓰고 더하기 빼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역경을 딛고 멋진 청소년으로 자라준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아이와 함께 초등 6년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아이의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찰흙 같은 아이의 미래를 어른의 편협한 사고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의 잠재력을 믿기로 했다. 내가 믿어주는 만큼 아이가 자란다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더 많이 관계 맺고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겠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도 자란다. 나는 오늘 초등학교 학부모를 졸업했다. 그동안 애썼다. 수고 많았어, 나에게 칭찬해 본다.
*감개무량: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동이나 느낌이 끝이 없음. 또는 그 감동이나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