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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Apr 05. 2023

달리기_선을 넘어서

10th GIVE'N RACE 참가 후기

정신을 차려보니 어스름한 빛이 창가에 스며드는 때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황령산 자락이 깜깜해지려는 찰나인지 서서히 빛이 들어 새벽을 여는 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몸이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에 우선 발가락을 까딱까딱 해보았다. 그다음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 몸을 뒤척였더니 몸 곳곳에 근육통이 생긴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5시 40분. 내가 어제 뭘 했더라... 아, 사량도에 다녀왔지! 망했군.


2023. 4. 2. 오늘은 한 달 전쯤엔가 신청한 10km 기부런을 하는 날이다. 자동차 회사인 메르세데스_벤츠 사회공헌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기브앤레이스’는 국내 취약계층 아동과 청소년을 지원하는 달리기 행사로 올해로 10회째 이다. 10억 원의 기부금을 조성하여 5억 원을 부산지역 아동 청소년 의료 교육 지원금으로, 나머지 5억 원은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 미래재단'을 통해 전국 아동 청소년들을 지원하는데 쓰인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5만 원의 기부금을 내고 3k, 8k,10k 코스 중에서 선택해서 달릴 수 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2020년부터 비대면으로 진행하다 3년 만의 대면 행사로 올해는 특별히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기원한다는 취지를 담아 부산의 상징인 광안대교 위를 달리는 코스로 마련되었다. 광안대교 위를 달린다니!


2022년 10월 나의 첫 마라톤 대회였던 ‘부산 바다 마라톤’ 코스가 광안대교 위를 달리는 거였는데, 그때 너무 좋았던 기억에 한 번 더 광안대교 위를 달리고 싶었다. 물론 올해 또 부산 바다 마라톤을 달리면 되지만, 몰랐으면 모르겠으나 이런 기회가 있는 것을 알았으니 신청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대회 전날인 4.1. 에 이미 통영 사량도 등산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사량도를 종주하고 다음 날 10km 달리기는 분명 무리인데 싶었지만, 기부 취지도 좋고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근 몇 달간 열심히 등산 다녔던 터라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신청했던 결과 결국 대회 당일 아침 근육통과 함께 눈 뜨게 된 거다. 이런 컨디션으로 과연 뛸 수 있을까 싶었지만, 가족들에게 피니시 라인(광안리)에서 완주하는 나를 기다리라는 엄명을 내려놓은 터라 이제 와서 모양 빠지게 아이들에게 엄마 못 뛰겠다고 하는 수는 없었다. 어차피 정식 마라톤대회도 아니고 ‘선행을 위한 완주’에 의미를 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 사량도에서 부산으로 돌아가는 배 기다리며 맥주 마시지 말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세수도 안 한 얼굴에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안 감은 머리 위로 모자를 눌러썼다. 기념품 티셔츠에 러닝바지와 야심차게 준비한 카프슬리브(종아리압박밴드)를 신고 빨간색 운동 재킷을 걸쳤다. 새로 산 선글라스도 끼고 싶었지만 장비빨로 너무 잘 뛰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망설이다 그냥 넣어두었다. 오늘은 잘 뛰기 글렀으니까.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집결지인 벡스코로 가는 길에 <대회 안내>를 검색해 보니 물품보관소 운영은 아침 8시 20분까지로 벌써 시간이 지나있었다. 좀 여유 있게 올 것을 구름처럼 모여있는 인파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피니시 라인에 가 있으라고 하고 급하게 운동 재킷을 입은 채 차에서 내려버렸다. 뛰면 금방 더워질 텐데... 어쩔 수 없지. 최대한 가볍게 뛰려고 했는데 역시 조급하니 허둥지둥이다. 10k B조 위치를 찾아가니 사람들이 준비체조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bpm 높은 음악을 듣고 있자니 내 의지와는 달리 몸에 아드레날린이 돌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안돼, 안돼. 초반 오버페이스 하다 중간에 퍼질지도 몰라. 스스로를 달랬지만 몸은 이미 신나게 준비운동을 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준비운동 후 높으신 분들의 축사를 듣고 기념촬영 후 드디어 9시, 출발음이 울렸다. 그러나 사람이 많다 보니 밀려서 출발에 한참 시간이 걸리고 출발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도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어 한동안 뛰지 못했다. 그러다 광안대교에 올라서자 갑자기 2차선 길이 4차선으로 넓어지면서 사람들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차 없이 올라설 수 없는 장소를, 금기의 장소로 넘어간다는 생각에 흥분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이국적인 수영만 요트경기장과 마린시티, 광안리 바다를 수놓은 반짝이는 윤슬, 오전 9시의 보드라운 봄 햇살, 적당히 살랑이는 바닷바람, 바다 위에 놓인 광안대교. 이보다 더 달리기 좋은 조건이 있을까. 와 좋다. 정말 좋다. 자꾸 감탄이 나왔다. 설렁설렁 뛰면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광안대교에서 육지 방향으로 찍을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 실컷 사진을 찍고 블루투스 이어폰의 볼륨을 높여 미리 선곡해 놓은 음악을 들었다. 2만 명이 참가했다는데 나 혼자만 신청해서 참가자 중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는 친구나 가족, 동호회 등에서 단체로 와서 서로 사진을 찍거나 구령에 맞춰 같이 달리거나 특이한 분장을 하는 등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혼자여서 외로웠지만 결코 외롭지만은 않았다. 달리기는 혼자 하지만 모두가 달리니까 다 같이 한 덩어리로 달리는 것 같았다. 안전요원의 파이팅에 나도 같이 힘이 나고 웃통을 까고 달리는 근육질 청년들을 보는 재미에 더 열심히 쫓아가며 달렸다. 대규모의 인원이 함께 한 곳을 달리는 모습에는 어쩐지 같이 달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고 함께 달린다는 사실 또한 감동적이었다. 광안대교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자니 다른 시공간을 향해 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달려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광안대교를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 구간이었다. 6km를 넘기는 지점이라 몸이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계속 나와의 자문자답 시간이었다. ‘너 괜찮니?’,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닌데 걸어도 돼’, ‘아니, 나는 10km를 한 번도 안 쉬고 달렸다고 말하고 싶어.’ 이렇게 피니시 라인까지 내 몸이 괜찮은지 계속 뛸 수 있을지 나와 대화하며 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나와의 대화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오감을 동원해서 내 컨디션을 살피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끊임없이 물어가며 일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대화하면 되는 거였는데.


피니시 라인이 200m 앞에 보인다. 기록 따윈 상관없고 완주나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피니시 라인을 보자마자 갑자기 없던 힘이 솟아났다. 몇 초 뒤에 나는 피니시 라인 뒤에서 기쁨에 차서 서 있겠지, 그런 상상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피니시 라인에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함성 속에서 마지막 선을 넘을 때 정말이지 내 몸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순간, 선을 넘어서 나의 세계가 확장되었다.     


대규모 인원이 함께 한 곳을 달리는 모습에는 어쩐지 같이 달리게 하는 힘이 있다.
피니시 라인, 선을 넘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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