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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성이 아빠 Oct 07. 2020

나는 도망쳤다, 한마디 사과도 없이

휴직 160일째, 민성이 D+409

아담한 코와 통통한 볼, 보드라운 머리칼까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저 자그만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다. / 2020.10.06. 집 근처 빵집


직장 생활을 논외로 하면, 어른이 되고 나서는 누군가에게 사과할 일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버스나 지하철에서 실수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거나 몸을 밀었을 때 정도일까.


말도 안 섞는 남인데, 미안하다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애 아빠가 되고 나니, 말도 안 섞는 남에게 미안하다 할 일이 생겼다. 그런 날이 올 줄은 알았는데, 그게 어제(6일)가 될 줄은 몰랐다.


민성이가 어린이집을 다녀온 뒤, 여느 오후처럼 아파트 놀이터로 산책을 나갔다. 놀이터 미끄럼틀 위엔 민성이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와 놀고 있었다.


민성이는 슬금슬금 그녀 옆으로 다가가더니, 누나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 미끄럼틀 위에 달려있던, 긴 홈을 따라 동그란 플라스틱을 이곳저곳으로 옮길 수 있게 만든 기구 - 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이좋은 남매 같았다. 그녀의 엄마도 딸에게 "동생도 가지고 놀게 해주자"라고 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다 순간, 민성이가 여자아이의 마스크를 손으로 낚아챘다.


나는 얼어붙었다. 마스크 너머, 여자아이의 자그마한 얼굴에서 놀람과 당황, 약간의 공포가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녀의 엄마는 담담하게 "마스크 써야지"라고 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내나 내가 마스크를 쓰고 민성이를 안으면, 아이는 우리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낚아채곤 했다. 아이는 그게 잘못된 행동인지 아직 몰랐을 것이다. 


아이에겐 차차 가르쳐주면 된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내 행동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민성아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며 아이를 들어 올렸고, 그 길로 도망치듯이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아니, 도망친 게 맞다.


사과를 못했다. 여자아이에게도, 그녀의 엄마에게도 아이가 어려서 잘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정중히 얘기했어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일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왜 그렇게 도망쳤을까.


30대 중반, 생면부지의 남에게 사과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내 잘못도 아닌데. 처음이라 당황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부턴 망설임 없이 머리를 숙이자. 앞으로 그럴 일 많~~~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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