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성이 아빠 Jul 25. 2021

그가 휩쓸고 간 자리

휴직 451일째, 민성이 D+700

'엄마, 저는 준비됐어요. 마스크 3개면 충분하겠죠?' / 2021.7.24. 우리 집


더위와 코로나의 환상적인 컬래버레이션 탓에 이번 주 내내 집돌이 신세였던 아들을 위해, 오랜만에 국립생태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른 시간이면 더위와 코로나, 둘 다로부터 조금 안전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9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고, 30분 뒤 생태원 문이 열리자마자 표를 끊고 들어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생태원은 매표소에서 에코리움이라 불리는 실내 전시관까지 거리가 꽤 멀다.


평소 그 길은 좋은 산책로였다. 하지만 7월 말엔 얘기가 좀 달라진다. 길은 여전히 훌륭했지만 날씨는 친절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대여해준 양산에 겨우 몸을 감추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실내 전시관으로 향했다.


어제(24일) 생태원에서 민성이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극지관이었다. 극지관은 열대관이나 사막관과 달리 살아있는 동식물을 보기 어렵다. 살아있는 북극곰을 그곳에 데려다 놓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인지 민성이도 극지관엔 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아이는 그곳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극지관 안으로 전력질주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도 더웠던 것이다.


오랜만의 외출에, 그리고 더위에 지쳤는지 민성이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잠들었다. 아내와 나는 시내 식당에서 점심으로 먹을 돈가스와 볶음밥을 포장해서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우려대로 잠에서 깨어났다.


점심을 먹고 1시쯤 아내가 민성이를 업고 낮잠을 재워보려 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되려 그가 아내를 재웠고, 설마 우리 둘 다 자는데 혼자 계속 놀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나도 침대에 누웠다.


비몽사몽 간에 간간히 민성이가 아내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고, 장난감 통을 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3시,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민성이는 혼자 놀고 있었다. 집은 뭐랄까, 어벤저스의 최종 악당 타노스가 손가락 하나로 전 우주의 절반을 없애버린 것처럼, 우리 집의 절반도 먼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돼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에 내가 넋이 빠져있을 때, 우리 집 아기 타노스는 기저귀에 응가를 한 채로 날 향해 웃고 있었다. 타노스에게 건틀렛이 있었다면 민성이에겐 귀여움이 있었다. 무엇이든 녹여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귀여움이. ###

매거진의 이전글 기저귀를 갈다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