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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an 27. 2020

변론가들을 위한 변론

나루의 직업상담 칼럼 001 - ENTP들을 위하여

MBTI를 위한 서론

MBTI는 발명되고 표준화된 이후부터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왔다. 나 역시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MMPI나 Big-5와 같은 차원론적 성격검사가 아닌 MBTI와 같은 유형론적 성격검사가 갖는 여러 부작용들을 우려한다. 예컨대 유형론의 일반화된 설명이 불러일으키는 강한 바넘 효과, 정규분포를 무시하고 양극단으로 나눈 설명은 사실상 복잡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 별로 타당한 설명능력이 없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단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실제 삶의 장면에서 유형론 성격검사의 효용을 반드시 기각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MBTI가 그럭저럭 잘 들어맞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반드시 신년 운세나 사주팔자 따위의, 실질문맹들이나 즐길 악취미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우세한 성향, 우세한 성격특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적어도 금세 드러나게 될 만큼의 강한 성격특성이라면 미리 드러내어 유형화하는 것도 충분히 해봄직한 일이다. 제한된 비용으로 빠른 의사판단을 해야 하는 기업이나 조직 장면 등에서 수십 개 정도의 짧은 문항으로 인격의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MBTI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예전의 혈액형 성격유형이라든가 별자리 성격유형 같은 것이 그나마 대체되고 있는 듯하여 기쁘기도 하다. 세상은 그래도 이렇게 쥐꼬리만큼씩이라도 진보하는 것이다.


뜨거운 변론가들

가끔 재미로든 아니면 자기계발 관련한 이슈로든 나도 이런 검사를 해 볼 때가 있다. 나도 이번 기회에 보게 되었는데, 지난 몇 년간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ENTP-A형이라고 한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과 안으로 향하는 마음 중에서 외향형(E), 직관적으로 사용하는 에너지와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에너지 중에서 직관형(N),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성향과 규칙을 준수하는 성향 중에서 자신의 판단을 믿고(T), 계획하기보다는 탐색한다(P), 그리고 신중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주장을 드러낸다(A). 마이어스-브릭스 재단에서 이 검사를 수입한 한국 심리학자들은(어느 회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ENTP-A 성향을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 라고 이름붙인 모양이다.

언젠가 내가 처음 이 ‘귀하는 뜨거운 변론가입니다’ 라는 결과지를 받아들었을 때, 사실은 기분이 복잡했다. 사람은 사진이 실물보다 멋지게 나오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심리검사는 정확하게 나오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반대로, 사진이 잘 나올 때 놀라는 것만큼이나 정말 이렇게 자신을 잘 대변하는 결과지가 나올 때에도 놀라고는 한다.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 나는 정말 이런 삶을 살아왔다. 사실 우리와 같은 변론가들이 입만 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은 입 터는 것을 제일 잘 하고, 좋아하고, 입의 칼집에서 혀의 칼을 뽑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똑 같은 이유로 달려나온 다른 ‘변론가’들과 끝장을 보곤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이 성향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험한 말을 잘 하지만 겉보기에 참 예의바르고 조용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나도 정당에서, 세미나에서, 학회에서, 노동조합에서 이런 변론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과 지난 몇 년을 보내면서 내가 품게 된 한 가지 가설은, 이 성격은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성격은 성장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성격은 더욱 더 ‘만들어진’ 성격이 강하다. 무엇으로부터? 인간의 고통과 사회적 참사로부터. 즉 변론가들은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 낸 성격이라는 가설이다.   



‘아무 흠도 없는 세상’에서는 충실이니 아량이니 하는 것들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p. 262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우는가

 나는 지난 오륙 년간, 몇몇 페미니즘 동아리와 진보 학회의 동료들과 함께했다.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 그리고 해고노동자들을 위해 일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울분이다. 남편에게 칼 맞고 죽는 아내들, 여성혐오의 거대한 공모 속에서 자살하는 여성들, 아무것도 모르고 지옥 같은 착취를 당하는 탈가정 청소녀들, 정규직에게는 주고 비정규직에게는 주지 않은 열차신호기 때문에 기차에 깔려 죽은 노동자들, 팀원 없이 일하다 기계에 몸이 잘리고 쇳물에 빠져 죽은 노동자들…. 그들의 영정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한 것은 터진 호스에서 뿜어나오는 것 같은 울분을 먼저 틀어막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를 찌르기 전에.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사자성어 마부작침(磨斧作針)처럼, 우리는 인간과 민주주의의 적들에게 꽂아버리고 싶은 칼을 갈아 펜촉을 만들고, 그들의 피 대신 잉크를 찍어 글을 쓴다. 그렇게 우리는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가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분노를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래서 나는 만난 변론가들의 사나움을 보며, 결코 그것이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 물결은 타인의 인격과 가치를 폄훼하고 그런 동시에 그들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괴물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그 괴물을 잡는 괴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 종류의 적들과 싸운다. 변론가들이 이른바 ‘프로 불편러’들이고, 사회의 통합과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 아마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얼마나 뼛속 깊은 능력주의자에 산업화주의자들인지 모를 것이다 – 공산주의자이며, 조직에 적합하지 않은 고자질쟁이에 이단아라는 ‘중도주의자’들의 낙인과 싸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사실상 거의 보이지 않는 정치인들이나 법률가들과 같은 의사결정자들과 싸운다.

 나머지 하나의 싸움은 자신과의 것인데, 마음 속에 서서히 드는 멍과 치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득바득 이를 갈며 사회의 적들에게 규탄과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응성 우울증이라는 말처럼, 우리도 반응성 울분을 칼집에 넣고 다닌다. 그래서 심리학회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 성격은 아마 ‘반응성 성격’일 것이라고 평한다.


이거 놔라 이놈들아 내가 저 멱살을 잡아야겠으니

그래서 변론가들은 허술한 면이 있다. 그들의 동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고, 그래서 불타는 집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급하다. 그래서 물불가리지 않고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향해서 돌진한다. 그것을 점잖게 말하면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목적과 가치를 (그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원칙이나 전통이나 합의를 경우에 따라 무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로 협업이 마비될 위험이 있다. 특히 규범형 인간들 –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 관례와 규범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수용하지 못한다. 이들은 변론가들을 자극한다. 그래서 내분이 일어나고, 화가 난 변론가들은 그들을 ‘혁명의 적’ 과 같은 식으로 규정하고 끝까지 축출하려 할 수 있다. 물론 규범형 인간들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변론가들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단순 반복 작업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 혼자서 조직을 운영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조직에는 충실하고 조용한 실무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충실하고 조용한 실무자들은 보통 규범형 인간들이 먼저 사랑하고 먼저 채어 간다. 변론가들이 끔찍이 싫어하지만 사실 필요할 수밖에 없는 조직의 규율도 규범형 인간들이 먼저 세운다. 변론가들은 규칙이 없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하지만 합리적인 지름길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혼자 움직이며 조직생활과 별로 맞지 않다. 변론가가 조직과 함께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은, 리더가 되는 것이다. 맨 처음부터 조직의 이니셔티브를 쥐는 길뿐이다. 변론가가 규범형들과 맞붙거나, 아니면 좀 둔한 사람과 맞붙는다면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축출되어야 상황이 끝난다. 보통은 변론가가 축출된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화나서 떠드는데, 이것은 멀리서 보면 그들을 무책임한 비판자라고 보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조직에서 튕겨져 나온 데는 반드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변론가들은 참을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망이 없다고 판단할 때 빠르게 그만두기 때문이다. 

둘째로 변론가는 이상과 상상력이 현실을 앞서나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상적인 목표와 달성 가능한 목표를 별로 구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언젠가는 다 이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첫 술에 배부르려고 하며, 전반적으로 최고급 자원을 다 투자해서 영웅적인 효과를 거두려 한다. 실제 업무에 들어가서 어떻게 첫 삽을 떼야 할 지 말문이 막히거나, ‘이거랑 이거랑 이게 다 필요해’ 라고 하면서 마구 주문한 다음 엄청난 청구서를 받기 전까지는. 그들은 현실감각을 버린 대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여는 능력을 가진 몽상가들이다. 물론 INFP형 사람들도 ‘몽상가’라고 불린다. 하지만 쓰는 돈은 ‘변론가’들이 훨씬 많다. 왜냐하면 변론가들의 관심은 항상 지금 이곳 구체적 문제상황에 있고, 그래서 현안에 개입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이언맨>의 자비스와 같은 냉철한 한계설정자가 없다면 그들이 투고하는 사업계획서는 전부 과대망상으로 취급되어 탈락할 것이고, 사업을 맡게 된다면 1년짜리 계획의 첫 달에 모든 사업비를 탕진할 것이다.

셋째로 변론가는 전통적인 의미의 ‘계몽주의자’이다. 그들은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도 노력하며, (하지만 사생활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수 있음) 공부를 많이 하고, 일반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말을 한다. 그리고 항상 ‘한낱’ 인간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타인이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기와 옳은 말 하기가 상충할 때 그냥 대놓고 옳은 말을 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가치가 구현되는 것이 한 사람이 기분나쁜 것보다 중요하니까. 게다가 자신이 바로잡아 준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이 마땅히 고마워해야 하기까지 하니까. 당연히 실제 세상은 그런 바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치적 경쟁자들이 정적으로 돌아서는 것은 물론이고 중간의 구경꾼들도 변론가들을 단지 시끄럽고 위험하게 취급한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에는 사약을 먹거나 화형당했고, 지금은 SNS로 몰리고 쏠려서 분풀이를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윤리랄지 진리 같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원래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겨눈 악마를 위해 변론할 준비를 하라(Devil’s Advocacy)

그들이 자기들마저 조직할 수 있는 탁월한 조직을 갖게 된다면, 그들의 가치에 공감하고 그들이 설칠 수 있도록 신뢰를 제공하는 실무가들과 협상가들을 갖게 된다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이 충분한 실력과 전문성을 갖게 된다면, 변론가들은 이 사회를 개혁할 걸어 다니는 레버리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관습을 탈피하고 비전을 열어보이는 조직의 리더에 어울린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기술적으로 책임질 충분한 전문성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변론가들은 현실에서 뭔가를 자꾸만 행동에 옮기는 바쁜 이상주의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변론가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은 아무리 튼튼한 뒷받침이 있어도 독 씨앗이 든 맛있는 사과가 될 수 있다.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카리스마 넘치는 ‘뜨거운 변론가’ 리더가 조직 구성원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가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해서 유능하고 잠재력 있는 수많은 구성원의 인생을 낭비시키는 경우는 정말로 많다.

최근 큰 기세를 떨치고 있는 기독교 소종파인 신천지나, 계급혁명이 올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좌파 단체, 통일이 올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통일 단체, 탈핵이 정말로 가능할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환경 단체는 모두 견고한 변론가 리더들과 목숨마저 바치는 충성스러운 실천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천재 변론가들이 이끌었던 조직들이 모두 합리적으로 공공성을 향해 협력하였다면, 유토피아는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일부는 실패했고, 일부는 사이비 조직이 되었다. 그들의 리더들이 확고한 신념으로 구성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이끌어도 그 리더가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신념의 실질성과 구체성이 의심받지 않는다면, 큰 이상을 품고 수만 명의 기여를 받아 공들여 띄운 거대한 조직도 몇 년 만에 무력화될 수 있다.

ENTP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들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주인 없는 황소(Maverick)들이고, 또한 구습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믿는 이상적 올바름을 위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강점을 능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숨쉬듯이 자기를 의심하고 검증하며 끊임없는 과학적 · 공학적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진리를 넘어서 도리어 이 지상의 구체적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합리성에 자신의 기준점을 맞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상주의에 가장 잘 맞는 짝은 과학주의이며, 이념에 가장 잘 맞는 짝은 과학기술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싫어하지만 가장 많이 해 봐야 하는 일은 자신의 적을 변호해보는 일이다. 그것은 황소의 고집을 꺾는 일이 아니라, 그 뿔을 꽂아넣을 최적의 각도를 재는 훈련이다.

그리고 이 으르렁대는 황소(실제 황소는 으르렁대지 않지만 이 미노타우르스 같은 양반들은 그렇게 한다)들의 친구들은, 사실은 이들이 가슴 안에 자신이 감출 수 없는 증기기관을 가지고 산다는 점을 좀 불쌍하게 봐 주고, 그들이 현실감각을 가지도록 계속 계산서와 나침반을 눈 앞에 들이대어 주는 것이 좋다.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래야만 할 때에, 계산서를 찢고 나침반을 깨고 달려나갈 것이다. 그들이 그 지점에 도달하여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 친구들은 그들이 헛된 곳에 헛된 꿈을 쏟아버리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 한다. 당신은 그들의 덕을 못 볼 수도 있지만, 아마 당신이 자녀를 낳는다면, 그 자녀의 자녀들은 당신이 지켜 준 황소가 뚫어놓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암살당한 민주주의자들과 사형당한 공산주의자들이 흘린 쿠키 조각을 따라 걷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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