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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an 31. 2020

조력자의 무의식

나루의 직업상담 칼럼 002 - 조력자들을 위하여

『배움 중심 수업과 전문가 학습 공동체』 세미나 연수기



인간을 돕는 행위

교육자와 상담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돌봄, 사회화, 교육, 관계 형성, 성장, 통찰…. 많은 단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동시에 낭만적이고 희망을 주는 말일 것이다. 나도 거기에 한 가지를 보태자면 '조력'이라는 말을 주고 싶다. 그들은 삶의 그래프에서 가장 힘든 최저점을 찍고 있거나 가장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하지만 나는 긴 학생 생활과 종종 맡게 된 교육자 역할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상담자를 자처하며 또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며, 더는 교육과 상담에 관하여 낭만적인 느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 상담가와 교육자는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교육자와 상담가의 공통점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교사와 상담가는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그러나 너무나 많은 종사자가 제대로 훈련받지 않고, 또한 아무나 그 시장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교육 장면에서의 학생들과 상담 장면에서의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취약성이 너무 협소하게 고려되고 있으며, 우리는 전문가의 자격과 교육에 관하여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행위의 자격

최근 인터넷에서 한 인터넷 강의 스타 강사가 개인 유튜브에서 '수학 7등급은 호주에 가서 용접공이나 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엄청난 공격과 비난에 맞닥뜨렸다. 물론 인터넷 강사들이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지금의 대중적 공분은 그가 만만한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맹렬해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이 발언으로 방송을 모두 취소하고 사과 영상을 올리는 등의 대가를 치렀지만, 이것보다 훨씬 심하게 성희롱이나 직업 비하를 일삼았던 남성 강사들은 거의 문제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교사의 잘못이 무마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자들의 타락은 명백하다. 그것은 단지 그 교육을 받고 자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만에 악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란 모두가 모인 이 동아시아 사회 전체의 문화와 분위기를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많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회상하는 학창 시절은 체벌과 구타 그리고 이제는 거의 사라진 단어인 촌지로 가득하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요행일 뿐이었다. 많은 교사들은 단지 아이의 신체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자란 부머들의 손에 다시 큰 아이들은, 보다 감시받는 교육현장과 인권 개념의 보급 속에서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신체 · 정신적 학대가 거의 소멸된 것은 냉장고 밖에 내어 놓은 두부가 상하지도 않을 만큼 최근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것은 교사들의 시험 중심 교육에 대한 무의식이다.


내가 이번 『배움 중심 수업과 전문가 학습 공동체』 세미나에서 잊지 못하는 기억은, 한 교사의 공개수업 영상이었다. 그는 중학교 국어 교사였는데, 아이들에게 시(時)의 역설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직관적으로 불쾌감을 느낀 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취하는 전반적인 태도였다. 한국어의 존대-하대 문화는 말은커녕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타인보다 낮은 존재인지 높은 존재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무의식과 의사소통을 위계질서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타인을 존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형식은 낮춤말을 쓰더라도 존중과 배려의 내용을 담아 이야기한다. 그 교사는 낮춤말과 높임말을 묘하게 기분나쁜 방식으로 혼용했는데(한국인이라면 이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교실 전체에게 말할 때에도 말 끝마다 ‘니들은’, ‘니들이’ 라고 칭하면서 ‘너희는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내 말만 들어라’는 태도로 임했다.


그는 오늘 가르치려 한 ‘역설법’ 역시, 시의 전체적인 구성 속에서 역설법의 취지를 알려 주고 그것을 스스로 찾게끔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가장 전형적인 역설법이 담긴 고전적인 시의 일부분만을 가져와서 밑줄을 그으며 ‘이것이 역설법이다’ 라는 취지로 교육했다. 시의 전체 구성과의 조화라든가 다른 역설법과의 차이를 탐색하는 과정은 없었다. 심지어 “말이 안 된다 싶으면 역설법이니 거기에 밑줄을 그어라”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문학적 감수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분노를 금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 교사의 시연 영상이 끝나고 난 후 세미나장은 술렁였다. 


가갈꽁낙의 추억

지금은 은퇴하신 한 교수님은, 학창시절 가정 시간에 배웠던 ‘가갈꽁낙’ 이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가을에 나는 생선은 갈치, 꽁치, 낙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 왜 가을에 나는 생선을 내가 배워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틀리면 두들겨 맞는 상황에서 외우지는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외웠던 것이고, 그게 어쩌다 은퇴를 앞둔 그 때까지도 그렇게 기억이 남는다고 했다. 가갈꽁낙…. 어쩌면, 그 중학교 교사에게 배운 아이들 가운데 몇 명은 나중에 시를 읽을 때 그 말이 기억날지도 모른다. ‘말이 안 되면 역설이지. 역설이 뭐냐면 모순된 단어의 대조를 통해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고 화자의 감정을…….’ 그 학생들은, 역설이 시를 완성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어떤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터져나오는, 문학적인 감정 표현의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 배울 수 있을까?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교사가 나이 지긋한 은퇴 직전의 원로 교사가 아니라 임용 2년차의 새파랗게 젊은 교사였다는 것이다. 세미나를 진행하신 교육학자이자 한국배움의공동체연구회 대표 손우정 선생은, 아이들에게 문학 교과의 내용을 잘 전달하고자 하였던 그 교사의 열정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 교사의 교육방식은 ‘교육자 자신이 스스로의 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무의식에 대한 언급은 거의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교육이나 상담이 단지 훈련과 자격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관점만으로는 같은 세대 또는 같은 코호트에서 자란 교사들이 이처럼 너무 상반된 행동을 하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변동치에 대해서는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과 트라우마가 반영된 무의식이라는 가설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그 교사는 세상이 이렇게 변화할 때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자란 주입식 교육의 끝물을 가슴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성인이 된 지금 끄집어내 자기 반의 아이들에게 펼쳐 보인 것이다. 무의식은 그렇게나 무서운 것이다. 


나를 조종하는 나를 조종하는 것

스스로의 무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문 바깥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집 안에 몰래 새겨놓고 가는 말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일기에 도둑처럼 들어와서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임의의 내용들을 써놓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글들을 나의 진심이라며 타인에게 읽어 주는 것이다. 도둑이 써 놓고 간 무의식은, 주로 적대적인 환경에 대한 부정적이고 신경질적인 대응방식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피하도록 자라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위험은 과대평가되었을지언정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교사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무의식이 반영한 이 전쟁터 같은 세상은 실제로도 어느정도 전쟁터이다. 그것은 즉 점점 양극화되어가는 이 사회다. 획일화된 입시교육은 그것이 얼마나 '불가피한' 선택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교사 전체가 자신의 교육철학에 상관없이 특정한 방식으로 교육하기를 강요한다. 그 입시교육을 요구하는 주체는 학벌주의의 공포에 사로잡힌 거의 모든 한국인이다. 그 학벌주의의 무의식에는 '서울대에 가지 못하면 n포 세대로 살다 단칸방에서 폐지나 줍다가 고독사할 것이다'라는 공포가 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물론 실존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공포가 실제 대상에 대한 것이며 그리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이 합리적인 적응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느낄 공포를 교육자들이 되풀이하고 재생산해서는 안 된다. ‘공부 못하면 용접공이나 된다’ 라고 말하거나 시험에서 ‘역설법’ 문제를 정확하게 변별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그걸 위해서는 니들은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태도로 아이들을 교육해서는 안 된다. 교육학의 입장에서 입시제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나는 아직 모른다. 한국이 흉내내기 위해서 교육연수 목적으로만 연간 1천 명씩 간다는 스칸디나비아식 교육이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대입자격시험이 반드시 평등한 사회를 보장한다거나(애초에 무언가를 ‘보장하는’ 제도나 이념은 없다) 그것이 정말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제반 여건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회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갈 곳은 뉘른베르크 뿐이다

그러나 치닫는 사회에서 무너진 심정으로 말하건대, 교육자는 위선일지라도 선을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이제 평등사회란 다 끝났고 그건 무임승차자를 양산하는 불공정한 것이란다, 정말 공정한 것은 중학교 2학년 성적이 평생을 결정하는 입시-학벌 사회니까 바꾸고 싶으면 니들이 높은 사람이 되어서 바꾸렴 알았지?’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것이 지리산에서 죽염으로 양치하고 고라니와 키스하는 대안교육의 꿈보다 ‘통계적으로’ 현실에 가까운 사례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이들에게 암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두 귀납법에 묶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년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인간은 250만년간 정글을 떠돌았다. 중세는 천 년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과학혁명이 오고 민주주의가 조직되었다. 수천억 마리의 까마귀가 모두 검어도, 내일은 흰 까마귀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나의 내담자,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그 첫 번째 흰 까마귀가 될 수 있다. 그는 사회의 악순환을 끊는 첫 번째 고리가 될 수 있다. 반드시 대입을 거부한다거나,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라도, 기존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장기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적응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의 불안한 무의식을 그들에게 투사한다. 그러나 나의 불안은 나의 마음에서 온 것일 뿐 그의 마음과 가치관에 반드시 그 불안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과거를 재경험하는 마음이 내 의사결정과 행동을 그에 맞춰서 결정하면서 현실은 반복된다. 교육자와 상담가의 – 묶어서 ‘조력자의’ – 무의식은 누군가의 실제 경험을 반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관점과 반응을 제한시키고 반복시키는 것이다.


여절여차 여탁여마 (如切如磋, 如琢如磨)

그래서 결국 필요한 것은 전문가가 자기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고 서로 평가해 주는 전문가의 학습공동체다. 반복되는 역사를 끊으려면, 내 마음의 반복되는 좋지 않은 무의식부터 끊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타인과의 의견 교환 속에서 평균적인 중간 지대, 심화하는 방향, 약화하는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 의견의 규합 안에서 보편성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나 가르칠 능력만 있으면 가르칠 자격이 주어진 학교밖에서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의미의 학교안에서조차 교육자들은 자신의 말과 태도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질 수 있는지, 특정한 단어와 태도의 표현이 피교육자의 취약성과 만나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경고받을 기회가 없었다. 


 전국의 교사들이 자신의 학교가 위치한 각지에서 매달 공개수업을 열고, 참관과 합동 토론을 여는 이 교사 배움의 공동체는 그렇기 때문에 매우 귀중하고 특별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식별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의 특성과 그 특성의 표현 방식에 대해서, 비슷한 직업적 능력을 가진 동료의 눈으로 논평받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무의식을 비추어 점검하는 교육의 기준은 무엇인가? 교사의 전문가 학습 공동체 활동이 추구하는 수업의 형태는 ‘배움 중심 수업’인데, 손우정 선생은 배움 중심 수업의 세 가지 철학을 ‘공공성, 민주주의, 탁월성’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정말로 누구나 절실히 느낄 만하고, 어느 하나라도 누락되면 모두가 큰 고통을 받는 가치들이다.


공공성, 민주주의, 탁월성의 트릴레마 극복하기

 현대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사회들은 탁월성이 추구되지만 민주주의는 있으나마나 하며 공공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고통받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사회는 공공성뿐만 아니라 나름의 탁월성도 있었으나 민주주의가 매우 부실했다. 한편, 공공성과 민주주의가 있지만 탁월성이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 곳에는 누구도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숭배하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는 가치는 공공성도 민주주의도 아닌 탁월성이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20세기의 고속 성장 독재 정권에서 사람들이 탁월한 부의 증대를 얼마나 호의적이고 보상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경험해 보았다. 그래서 진보 활동가들이 탁월성을 놓아버릴 때, 또는 입시교육에 대한 적응과 같은 기존 사회에 대한 탁월한 적응성을 아예 포기할 때 그 운동의 실패는 예견된다. 


 나는 이 세미나를 전국의 모든 교사들이 임용 전에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과정으로 넣고 싶었다. 교사뿐만아니라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진정으로 중요하고 절실한 내용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이 세미나의 내용을 상담가들에게도 적용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담가는 교사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심리상담사’ 라는 말이 갖는 뉘앙스와 의미는 너무 많은 오명과 남용의 역사 때문에 이제는 거의 모욕에 가깝다. 나 역시도 상담가가 되는 길에 있는 사람이지만, 어딘가 ‘상담을 해 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보면 마음의 가시부터 세우게 된다. ‘또 무슨 약을 팔려는 어디 사이비이지?’ 이제 상담이라는 단어는 TV에 나오는 유명한 스타 스님들이 해탈한 태도로 심각한 가정폭력을 대충 뭉개거나,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치료를 빙자해 성폭력을 하고 동성애자를 전환치료 하거나, 신흥 종교가 외롭고 아픈 사람을 낚아채어 가거나, 연분홍색 캐릭터가 따듯하고 말랑말랑한 말투로 ‘오늘도 힘들었지?’ 라고 말하는 힐링 서적들이 사회를 어지럽힐 때 대는 핑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함께 보면 좋은 영상: KBS 추적60분_실태점검 심리상담소가 위험하다_190719

https://www.youtube.com/watch?v=D5ry9Z2Y_Ys


물론 상담이 타락한 까닭은 교육이 타락한 이유만큼이나 한국사회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20세기 중후반, 완고한 산업화와 군사주의 그리고 능력지상주의 분위기에서 자란 한국인은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지 이해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마음 돌볼 기회가 전혀 없이 자란 베이비부머는 물론 그들의 손에서 자란 X세대부터 Z세대마저도 타인의 마음을 잘 읽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문성을 통하여 꼭 돌봐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상담은 일상 대화와 구분되지 않는 가벼운 것이 되었다. 한국에서 상담은 '고민 들어주기'와 거의 구분되지 않으며, 통찰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거의 구분되지 않고, 치유는 '좀 울고 나니까 괜찮지?'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의심받는 조력 행위

이렇게 척박한 토양 위에서 교육가와 상담가의 역할은 훼손되었다. 교육자가 삶의 태도와 인격적 도야에 모범을 보이고 교학상장하는 삶의 스승에서 입시경쟁 승리 기술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전락한 것과 같이, 상담사 역시 단지 힘들 때 말을 들어주고 조언하는 역할을 하는 아무나로 간주되었다. 오직 가치 있는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학회의 감독하에 훈련받아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과학적 상담이론에 입각하여 신중한 상담을 실행하는 극소수의 상담가들뿐이다.


하지만 단지 그 극소수의 적격한 상담가가 존재한다고 해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자칭 상담사’에 대한 개입을 미룰 수는 없다. 엄청나게 융성하고 강성한 교회 조직들과 인터넷 상담가들, 제대로 된 상담서적보다 훨씬 더 많이 팔리는 힐링 서정의 양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미 그들은 정식 상담사들을 압도한다. 마치 인강 스타 강사들이 고등학교의 교사를 압도하듯. 결국 우리는 그들을 차마 정식 상담가로 인정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반복하는 ‘조력자의 무의식’을 포착하고 그들이 반복하는 말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자격 상담실을 찾은, 또는, 자원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교회 등에 의지하는 ‘재야의 내담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추적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적격 상담사들 역시 이 정도에 멈추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전문가 학습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역량을 강화해줄 필요가 있다. 물론 상담가들은 훈련기간동안 긴 수퍼바이징을 받으면서 충분히 사례를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보다 여럿이 낫다. 급변하는 상황과 밝혀지는 인간의 성질들 가운데에서, 상담가 개인은 수퍼바이징과 연례세미나로는 갈 수 없는 지점을 동료와의 꾸준한 협업을 통해서는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최근에서야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 추가적인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한 상담처럼 아직 충분히 설명하는 이론이 없을 때 – 이전 세대의 이론이 아니라 이 세대의 내가 먼저 미래와 마주쳐버릴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직감과 동료들과의 지(知)의 형성뿐이다.


명예로운 길을 걷는 조력자들을 위하여

 조력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아마 전세계의 소방관을 제외하면, 어떤 조력의 길을 택하였더라도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의심의 눈길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수단이 많이 남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강력하고 유용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커다란 힘을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평가받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그리고 더욱 더 멋진 일은, 누군가의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는 것을 넘어 자신과 동료들의 현장에서의 시행착오 속에서 매일 새롭게 배우며 진정한 인간 역량의 진보를 써내려가는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돕고 스스로도 성장하는 멋쟁이들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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