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

나루시선, 41

by 나루

첫째 아이


서나루




너의 이름을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바탕 눈물이 지나간 뒤였다


때로는 신파가 없어도 펑펑 우는 날이 있다

떼쓰지 않아도 무너져내릴 때가 있고

엄살 부리지 않아도 산산조각나곤 해


나 과장한 거 아니야,

내가 불쌍한 애들 거둬줬지 손 한번

집에 손 한 번 벌려본 적 없어

나는 엄마고 아빠였고 사춘기도 없이 컸어


사춘기도 없이 큰 애들이

자기 방을 동생들에게 다 내어주고

피멍이 들어서 돌아온다

아빠가 장교였던 아이는 남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렇게도 싫어했지

매일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이스크림 가게


스쿱을 훔쳐와서 파내보았지

이거 정말 떠지네 시뻘건

떡이랑 젤리 중간 같아

여기 내 피멍이 있어, 엄살이 아니지, 맞지

그렇지

이거 내 피멍 맞지 이거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 아니야

나는 호들갑 떨지 않았어 이게 내 진짜 상처가 맞아

나는 거짓말 한 번 한 적 없이 살아왔어

솔직히 지금도 성찰해, 세상에는 더 힘든 사람들도 있는데 혹시 내가

그치만 이것만 떼놓고 볼게 내가 거짓말은 아니야 오늘은

이거 내 살이 뭉개진 거 그거는 맞아

그거 하나는 내가 믿어달라고는 안할게 사실이 그거니까 그건 내가 아니까

내가 지금까지 인정받고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그 인정받는 거 한 번만 일반화할게

내가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이런거 진짜 싫어하거든 그래서 이번 한 번만 거짓을 말하겠다는게 아니라

믿어달라는게 아니라 이번 한 번만 믿지 못하더라도 내 신용 생각해 달라는 거야

알잖아 내 신용 알지 그러니까 당당하게 이번 한 번만 말할게

내가 이 상처 주인이 맞아 이게 내 거고

내가 원래는 그렇게까지 엄살 부리는 성격이 아니거든 너도 알잖아 근데

평소에는 이런 말 잘 안 하는거 알잖아

아무래도 꼭 이번만큼은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건데

내가 진짜 지금 좀 아퍼


아이고 놀랐겠지, 놀래켜서 미안해, 이게 인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이게 아무래도

아마도 내가 지금은 조금 아픈 것 같애


알아

알지

나도 그걸 알지


마음껏 성장통을 누리며 자란 매끈한 성격들 위에서

미끄러지고만 살았지, 마찰들을 윤활하며

인간들의 낯뜨거운 장면들을 무마하며

동생들의 눈을 가려주고

귀 옆에서 아무 노래를 불러주고

불화들 사이에서 문질러지다보면

아, 미끄러지는 건 내가 아니었구나 내가 미끄러내는 건

우리애들한테 향할 매질 같은 거고

나는 이 구석에 혈흔처럼 고여 있구나 빛나게

수챗구멍 낙엽에 고인 양잿물을 비추는 오후처럼 빛나게


최고로 좋은 행복을 받는 건 평범하잖아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고통을 받을래요,

그게 멋있으니까

처음부터 양보하고 마지막까지 혼나는

세상 모든 고난 떠안는 게 하느님 소원이었던 첫째들의

마음에 딱 맞게 정당한 비참이 빛나지

그들의 긴 팔과 긴 바지에 가려진 그곳에서

빛나고 우네


그런 곳에 우리 애들을 내몰 수는 없잖아요

내가 맞을게요 그 피멍


기름은 물보다 진하니까 물과는 다르니까

물 위를 촉촉하게 덮어주는 끈끈한 보호막이니까

아이들 몫의 꼬소한 버터들을 감춰놓으며 시작한 첫째 노릇이

여기까지 왔네


실수였지 그런데 어쩔 수 없었지

이 세상이 실수였으니 나는 덜 실패해야 했네

엄마가 부엌에서 튀겨주던 기름들은 영원히 미끈거릴 줄로 알았겠지만

뒤늦게야 알았지

엄마는 친구였고 언니도 친구여서

친구들끼리 살면서 집구석을 내버려두면

기름도 언젠가는 생선 눈처럼 굳는다는 것을 알게 돼


하하 당연히 안 되지 농담이라도 무섭다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빛나?

나는 발전 없는거 싫어. 똑똑하게 살아야 돼 사람이.

우리 애들의 길을 밝혀야지, 내 동생들도 내 동생같은 인간들도 해메게 두면 안 되니까

내가 추울 때는 굳은 삼겹살처럼 되어도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면 따듯해져 금방 녹을 거야

내가 아픈 거 다 미끄러지게 해 줄게 아플 때는 서로 꼭 안고 울자

나 거짓말 하는거 아니야 나를 믿어 내가 해봤잖아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아 처음엔 좀 부끄러워도

TV에 나오는 신파극 그거, 사람들 막 부둥켜안고 울지?

그거 거짓말 아니더라. 진짜 그래. 고증이야 고증

사람이 정말 그렇게 되더라. 나 믿어도 돼

내가 해보고 살았잖아

그렇게 고생하는 애들을 나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첫째야

너의 이름을 연습해야겠다

너가 돌보았던 남들같은 내가 돌보는 남들과

너의 이름을 헷갈리지 않게

우리는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Photo by Noah Busch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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