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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Aug 03. 2021

첫째 아이

나루시선, 41

첫째 아이


                                        서나루




너의 이름을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바탕 눈물이 지나간 뒤였다


때로는 신파가 없어도 펑펑 우는 날이 있다

떼쓰지 않아도 무너져내릴 때가 있고

엄살 부리지 않아도 산산조각나곤 해


나 과장한 거 아니야,

내가 불쌍한 애들 거둬줬지 손 한번

집에 손 한 번 벌려본 적 없어

나는 엄마고 아빠였고 사춘기도 없이 컸어


사춘기도 없이 큰 애들이

자기 방을 동생들에게 다 내어주고

피멍이 들어서 돌아온다

아빠가 장교였던 아이는 남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렇게도 싫어했지

매일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이스크림 가게


스쿱을 훔쳐와서 파내보았지

이거 정말 떠지네 시뻘건

떡이랑 젤리 중간 같아

여기 내 피멍이 있어, 엄살이 아니지, 맞지

그렇지

이거 내 피멍 맞지 이거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 아니야

나는 호들갑 떨지 않았어 이게 내 진짜 상처가 맞아

나는 거짓말 한 번 한 적 없이 살아왔어

솔직히 지금도 성찰해, 세상에는 더 힘든 사람들도 있는데 혹시 내가

그치만 이것만 떼놓고 볼게 내가 거짓말은 아니야 오늘은

이거 내 살이 뭉개진 거 그거는 맞아

그거 하나는 내가 믿어달라고는 안할게 사실이 그거니까 그건 내가 아니까

내가 지금까지 인정받고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그 인정받는 거 한 번만 일반화할게

내가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이런거 진짜 싫어하거든 그래서 이번 한 번만 거짓을 말하겠다는게 아니라

믿어달라는게 아니라 이번 한 번만 믿지 못하더라도 내 신용 생각해 달라는 거야

알잖아 내 신용 알지 그러니까 당당하게 이번 한 번만 말할게

내가 이 상처 주인이 맞아 이게 내 거고

내가 원래는 그렇게까지 엄살 부리는 성격이 아니거든 너도 알잖아 근데

평소에는 이런 말 잘 안 하는거 알잖아

아무래도 꼭 이번만큼은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건데

내가 진짜 지금 좀 아퍼


아이고 놀랐겠지, 놀래켜서 미안해, 이게 인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이게 아무래도

아마도 내가 지금은 조금 아픈 것 같애


알아

알지

나도 그걸 알지


마음껏 성장통을 누리며 자란 매끈한 성격들 위에서

미끄러지고만 살았지, 마찰들을 윤활하며

인간들의 낯뜨거운 장면들을 무마하며

동생들의 눈을 가려주고

귀 옆에서 아무 노래를 불러주고

불화들 사이에서 문질러지다보면

아, 미끄러지는 건 내가 아니었구나 내가 미끄러내는 건

우리애들한테 향할 매질 같은 거고

나는 이 구석에 혈흔처럼 고여 있구나 빛나게

수챗구멍 낙엽에 고인 양잿물을 비추는 오후처럼 빛나게


최고로 좋은 행복을 받는 건 평범하잖아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고통을 받을래요,

그게 멋있으니까

처음부터 양보하고 마지막까지 혼나는

세상 모든 고난 떠안는 게 하느님 소원이었던 첫째들의

마음에 딱 맞게 정당한 비참이 빛나지

그들의 긴 팔과 긴 바지에 가려진 그곳에서

빛나고 우네


그런 곳에 우리 애들을 내몰 수는 없잖아요

내가 맞을게요 그 피멍


기름은 물보다 진하니까 물과는 다르니까

물 위를 촉촉하게 덮어주는 끈끈한 보호막이니까

아이들 몫의 꼬소한 버터들을 감춰놓으며 시작한 첫째 노릇이

여기까지 왔네


실수였지 그런데 어쩔 수 없었지

이 세상이 실수였으니 나는 덜 실패해야 했네

엄마가 부엌에서 튀겨주던 기름들은 영원히 미끈거릴 줄로 알았겠지만

뒤늦게야 알았지

엄마는 친구였고 언니도 친구여서

친구들끼리 살면서 집구석을 내버려두면

기름도 언젠가는 생선 눈처럼 굳는다는 것을 알게 돼


하하 당연히 안 되지 농담이라도 무섭다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빛나?

나는 발전 없는거 싫어. 똑똑하게 살아야 돼 사람이.

우리 애들의 길을 밝혀야지, 내 동생들도 내 동생같은 인간들도 해메게 두면 안 되니까

내가 추울 때는 굳은 삼겹살처럼 되어도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면 따듯해져 금방 녹을 거야

내가 아픈 거 다 미끄러지게 해 줄게 아플 때는 서로 꼭 안고 울자

나 거짓말 하는거 아니야 나를 믿어 내가 해봤잖아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아 처음엔 좀 부끄러워도

TV에 나오는 신파극 그거, 사람들 막 부둥켜안고 울지?

그거 거짓말 아니더라. 진짜 그래. 고증이야 고증

사람이 정말 그렇게 되더라. 나 믿어도 돼

내가 해보고 살았잖아

그렇게 고생하는 애들을 나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첫째야

너의 이름을 연습해야겠다

너가 돌보았던 남들같은 내가 돌보는 남들과

너의 이름을 헷갈리지 않게

우리는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Photo by Noah Busch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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