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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l 08. 2021

개구멍의 갈고리

가난과 열등감에 맞서 끝내 이기는 길

모든 어려운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바칩니다.


우리 모두의 첫 번째 어려움은 인구가 너무 많음에서 나온다. 우리 같은 유기체는 섭취하고 대사하는 존재 - 즉 소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의 자원량에 구애받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은 지구의 크기와 자원량에 비추어보건대 중형 정도 되는 포유류로서, 자신이 소비할 자원이 사실상 무제한적인 박테리아나 버섯균와 달리 적어도 매일 2000kcal은 얻기 위해 경작해야 한다. 이런 운명 하에서 인구와 개인적 성취의 관계는 딜레마 상태에 존재한다. 인구가 적으면 내가 직접 경작해야 할 양이 늘어나지만 나의 참여 정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많은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인구가 많으면 내가 직접 경작해야 할 양이 줄어들지만 경작할 수 있는 양도 줄어들고 그에 연동해서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양도 줄어들며, 반면에 나는 타인의 잉여생산물에 간접적으로 이익을 받을 수 있다. 한국에 남아도는 쌀은 북한에 기부하기가 쉽듯이.


사람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 말고 다른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매슬로우(A.H. Maslow)는 욕구들을 하위 단계와 상위 단계로 나뉘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 역시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데 보편적이고 유용한 관점이지만, 나는 조금 더 단순화시켜서 보고 싶다. 사람마다 기본 욕구로 여기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생존 욕구조차 쉽게 충족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좁고 험한 길을 가는 예술가나 사회운동가 친구들을 알고 있다. 인간은 가급적 필요한 모든 것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에 매슬로의 욕구위계에서 제시된 범주가 거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해진 순차적 단계를 따르는지는 내가 보기에는 반례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어떻든 오늘날 인구의 폭증으로 인해서 적어도 한국과 같은 제1세계 기준에서는,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과 비교하여서는, 대부분 사람이 기본적인 욕구라 생각하는 아주 최소한의 욕구들은 어렵잖게 충족되는 시대가 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도 그 정도 기본적인 수준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미래통합당(現 국민의힘) 국회의원이었던 차명진이 “미트볼 한 봉지 150g에 970원, 야채참치 100g 한 캔에 970원, 쌀국수 91g에 970원, 여기에 쌀 한 컵 800원. 다 합해서 3,710원에 세 끼를 해결했다. 물은 끓여서 식혀 먹기로 했다. 그렇게 구입한 것으로 점심식사를 조리했다. 절반만 그릇에 담고 미트볼과 참치도 절반씩 부었다. 맛있게 황제의 식사를 했다.”라고 제왕적 기초수급권자 체험을 한 것처럼 미트볼과 캔참치로 하루 2000kcal을 먹는 것에 왜 인간은 만족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상처를 받는가? 짐승과 인간의 차이는 절대적인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만년 전, 사슴은 울창한 숲 속에서 언제나 배부르게 먹고 다녔지만, 인간은 언제나 굶고 다녔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인간들이 자신과 사슴을 비교했을까 아니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했을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부르게 사는 존재들은 많다. 집고양이들은 집사가 차려주는 밥에 배부르고, 멧비둘기들은 인간 못지않게 번성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고양이 · 비둘기와 자신을 비교하는가, 다른 현대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가? 인간은 동료 인간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최종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거나 남들보다 조금 더 낫다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야 안심한다. 왜? 인간에게 이런 습성이 생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생존에 있어서 집단과 동기화되는 것이 중요했던 과거의 진화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지금 우리에게 이런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만 확언할 수 있다. 어떻든 오늘날 남들과 비슷한, 혹은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인간의 거의 절대적인 요구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그것은 이제 인간의 존엄 혹은 인간권리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구조건이 된 것이다. 매슬로우의 (다섯 단계가 아닌) 다섯 영역은, 개인의 '개인적 자아실현'에 있어서는 자신 나름의 순서대로 달성하려 하는 과제이지만, 개인의 '사회적 자아실현'에 있어서는 그 다섯 단계 모두가 '적어도 남들 만큼은 달성해야 하는' 또다른 층위의 욕구이고 열망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특성을 가진 사회에서, 즉 현대사회에서, 매슬로우의 다섯 영역 가운데 어떤 것은 달성하기가 쉽지만 어떤 것은 너무 경쟁적이라서 얻기가 정말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신의 성취 정도를 단순한 40~100kg 안팎의 중형 포유류의 생리적 요구사항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파악한다. 절대적인 파라미터를 가진 몸의 절대기준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타인과의 상대기준으로 자신의 성취를 파악하는 한, 이제 쉬운것도 '남들보다 얼마나 더 쉬운가?' 라고 물음으로써 남들보다 더 쉬우려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이제 절대적으로 어려운 것도 '남들은 얼마나 더 쉽게 하는가?' 라고 물음으로써 어려운 것을 남들보다 더 쉽게 이루려는 이중의 어려움에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매슬로우가 살아 돌아온다면 놀랄 것이다. 그가 다섯 영역을 세우면서 가장 쉽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내가 밥 한 끼를 얻는 노력에 이만큼 공을 들였는데, 남들은 얼마나 더 쉽게 얻는가?'라는 효율과 이율의 경쟁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구가 너무 많다는 사실은 이런 인간의 평가습관과 맞물려 오늘날 인간들을 피곤한 무한경쟁 행동으로 밀어넣고 있다. 매슬로우의 4번째 영역인 존경의 욕구와 5번째 영역인 자아실현의 욕구는, (그는 자신이 정의한 영역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오늘날의 햇볕 아래에서 얼마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자리잡고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었느냐는 강박적인 질문으로 우리 서로에게 되돌아온다. 하지만 그렇기에는 인간이 너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특수한 영역을 개척하여 일인자가 됨으로써 존경과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고파하고, 눈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 영광을 가지고파한다. 하지만 어느날 자긍심을 가지고 새벽 첫 눈을 밟았을 때, 우리 모두는 사실 그것이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얇게 새로 내린 당일의 첫 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선발주자들의 욕심도 문제가 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견고한 소득과 재산의 성탑을 쌓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커다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이 쌓은 성탑에 모르는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또는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인맥과 편법을 동원해서 심지어는 불법과 법률의 개악을 동원해서 후발주자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경쟁자들을 갖가지 방법으로 제거하기도 한다. 인구가 많아진 만큼 수많은 선발주자들이 이미 자신의 영역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이제 후발주자들은 존경과 자아실현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그 어려운 성장의 과정을 비슷하게 반복해야 하고 그것도 선배들과는 다르게 반복해야 하고 그것도 선배들의 견제와 저격을 견뎌야 한다. 그래. 이것이 오늘날 청년 담론의 핵심이다.


이처럼 인구가 많아졌다는 것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방법은 너무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가? 불교에 귀의하고 일상적으로 마음챙김을 실천하여서, 경쟁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미끄러 빠져나오는 것이 최선인가? 백이와 숙제처럼 고사리 캐러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직면하여서, 나도 남들처럼 '그 지옥같은 과정' 을 통과해서, 예를들면 수 년씩 불안한 입시공부나 고시공부 기간을 견뎌내고 몇 백분의 1 경쟁률을 통과해서 당당하게 금의환향하는 것이 최선인가? 나는 그 중 어떤 것을 택하라고 조언할 만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의 골치아픈 딜레마를 단박에 처리해주는 일반화된 '말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만큼의 지혜만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지향점에 가장 적당한 밸런스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말, 언제나 가장 적게 고생하고 가장 많이 만족하는 정도의 적응과 최적화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두루뭉술한 격려만을 해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성공 및 실패가 남들과 비교해서 받는 평가라고 할 때, 성공을 향한 도전의 과정 역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평가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론 그렇겠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그것을 판단한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날을 맞이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내면의 기준을 충족했는지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고 객관적인 진리로 존재하는 절대적 기준을 솔직히 내가 충족했느냐는 평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남들보다 얼마나 잘하고 못했느냐에 대한 평가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그럴듯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작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멀고 힘든 길을 돌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도전 과정의 정직함과 건전성을 저버리고 좋지 않은 성취의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개구멍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정문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공표되어 있고 모두가 그 존재를 알지만, 마치 주말 저녁에 시내의 가장 넓은 거리가 역설적으로 인산인해 때문에 통과하기 가장 어렵듯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바로 그 개방성 때문에 가장 치열하고 어려운 경쟁을 뚫어야 하는 너무나 힘든 관문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느정도는 선발주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이고, 성벽을 높게 쌓은 자들의 가난한 후배 견제이고, 신자유주의의 악랄함이고, 각종 차별과 멸시가 묻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모두가 지켜보는 단 하나의 등용문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언제나 감시받는 역설적으로 깨끗한 곳이다. 성곽을 쌓은 자들이 그곳을 기관총을 들고 지키고 있을지라도, 그 안으로 들기 위한 민중 역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서 품 속에 권총 한 자루씩을 지니고 세상의 정문을 지켜보고 있다. 이 정문을 통과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들고 번번한 좌절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나의 고난과 좌절은 타인의 비슷한 고난과 좌절과 통용될 수 있고, 그런 공통 체험의 공동체 안에서 실패자도 이해되고 배려받을 수 있다.


정문으로부터 조금 더 떨어진 한 골목에는, 정문 안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다. 그 좁고 낮은 문을 지나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서 숙여야 한다. 그곳에는 비법을 알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개구멍의 종류는 많고 생긴 것도 서로 다르다. 정말 뜯긴 철조망과 폭격맞은 철근콘크리트처럼 음침하게 생긴 개구멍도 있고, LED와 네온사인으로 반짝이는 개구멍도 있고, 푸른 벨벳에 황금색 띄를 두르고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럭셔리한 개구멍도 있다. 생긴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개구멍도 그냥 구멍이기 때문에 지나간다고 해서 특별한 함정이 발동되어서 다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허리를 굽히고 네 발로 기어서 들어가야 할 뿐이다. 그 문을 지나면, 누군가는 계속 도전하다가 죽기까지 하는 정문과 달리 간편하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지 기어 가야 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에이 그 정도는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그래도 상관없어." 라고 하면서 바닥에 엎드려서 그 문을 기어서 지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배고픔과 좌절에 못이겨서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즉각적인 행복과 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냉큼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한참을 고민하고 거기에 한참을 더 고민하지만, 한 번 기어주는 것만으로 너무 간절한 남들만큼의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에 머뭇거리며 개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 개구멍이 정문보다 더 멋있고 화려해 보여서, 정문으로 들어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서 기꺼이 들어간다. 한 번 개구멍을 지난 사람들은 놀란다. 처음에는 무섭고 걱정되었지만, 생각보다 아무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무릎을 꿇고 네 발로 기어야 했지만, 정말 눈 딱 감고 개구멍을 기어들어가니 거짓말처럼 성곽 안의 사회가 자신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그건 한 번쯤 해볼 만 한,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것이 있다. 개구멍을 받아들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모른다. 그 개구멍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갈고리가 있어서, 그 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몸에는 문제없을지라도 영혼에 조금씩 상처가 나고, 나중에는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것을. 개구멍에는 어떤 함정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개구멍 자체가 함정이었기 때문에. 개구멍을 기어서 들락거리는 사람이 갖게 되는 특수한 방식의 성취 경험이, 개구멍의 방식으로 살면서 얻게 되는 손쉬운 보상의 경험이, 그 사람들을 옭아매고 장기적으로 착취와 비탄에 빠트리는 정신의 시한폭탄이 된다는 것을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와 운 때문에 개구멍을 발견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선택받았거나, 인맥이 좋아서, 똑똑하게 살아남는 노하우가 있어서, 지름길을 잘 찾은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사실 그 개구멍은 정문을 먼저 통과한 자들이, 정문을 아예 때려부수려고 하거나 어떻게든 그 문을 통과하려고 하는 대신에, 스스로 조금 낮은 대우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허리를 굽힌 자들을 파괴하기 위해 뚫어 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정문으로 들어간 자들 가운데 질 낮은 인간들은, 타인이 마음속부터 서서히 파괴되는 것을 감상하기 위해 거기에 개구멍을 둔 것이다. 누구나 개처럼 허리만 굽히면 쉽게 들어갈 수 있고 원한다면 도로 나올수도 있지만, 구멍에 설치된 보이지 않는 영혼 갈고리에 찢겨버린 마음은 결코 쉽게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산다. 개구멍은 돈과 능력 없는 사람이 먹고살게 도와주는 안전망이 아니라, 쌍끌이어선이 끄는 저인망과 같은 것이다. 내 앞길에 깔리는 융단이 아니라, 내 앞길에 깔리는 융단폭격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구멍을 찾는다. 개구멍을 통해서 돈을 벌고 명성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벌이 가시광선과 함께 자외선도 볼 수 있듯이, 인간은 가시광선과 함께 나와 타인의 영혼을 보는 센서도 가지고 있다. 정문과 대결하는 대신에, 어떤 이유로든 개구멍을 들락거리며 예외적인 지름길을 찾으려 네 발로 기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보지 못한 영혼의 갈고리에 온통 마음과 정신이 찢겨 있다. 그들은 투명하게 감시되지 않는 각각의 개구멍의 논리와 셈법에, 열 번의 탈락을 마신 고시공부 장수생이나 프리터족이나 니트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착취를 당해 왔다. 그들은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결코 충족하기 힘든 '정정당당함'을 갖추기를 거부하며 지름길을 찾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복구하기 어려운 비용과 손실을 강요하는 길이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개구멍으로 가는 사람들의 찢어진 영혼을 보며, 정문과 대결하는 사람들 가운데 인정 없는 사람들은 멸시를 숨기지 않고 인정 있는 사람들은 안쓰러움과 개탄스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개구멍의 사람들을 대놓고 비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피한다. 개구멍의 셈법으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조금씩은 건전한 상식과는 어긋나 있다는 것에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개구멍으로 간 사람들은 싸워 이겼든 졌든 상관없이 '세상의 정문'과 정면으로 대결해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판이하게 다른 하위문화(sub-culture)를 형성하게 된다. 남들이 배제하려고 하지 않아도 문화적 차이로 배제가 발생하게 되고, 남들이 몰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언어와 경험의 차이로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개구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계속 개구멍의 방식을 고수하는 한, 그들은 점점 고립되고 상처입고 버려진다.


개구멍을 통해서 어느정도의 돈을 벌 수 있고, 어느정도의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견디기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의 일부를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개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그리고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는 한, 타인과의 비교 종목과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시선의 종류 가운데 "얼마나 세상의 '정문'과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하게 대결하는가?" 라는 인생 수단에 대한 정상성과 건전성 평가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사회가 무한경쟁 각자도생 상태로 곤두박질치고 정문에 들기가 조선시대 과거시험처럼 어렵다는 것이 상식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영역이다. 정정당당하게 실패한다면, 존중받을 것이다. 그러나 개구멍으로 들어간다면, 멸시가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질문하기를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멸시는 정말 단순한 혐오와 차별선동에 불과한가? 대안적인 삶과 비주류의 삶을 경멸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소시민들과 메인프레임 중독자들의 단순한 모욕인가? 전근대적인 낙인에 불과한가? 물론 그런 부분이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왜 욕하는가? 인간의 욕에는 반드시 졸렬함과 차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모욕과 멸시에는 일말의 합리성이 존재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폭탄테러를 하면서 미 제국주의를 욕할 때 솔직히 말하면 미 제국주의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폭탄테러와 포로 참수가 틀린 것이라서 그렇지. 안티페미니스트들이 2015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넷페미니즘의 남성에 대한 신체 및 외모 조롱 미러링에 대해서 욕할 때, 그것이 진짜로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비판만 떼어놓고 보면 확실히 정당하다. 자기들이 그러면서도 계속 여성 신체 및 외모 공격을 멈추지 않아서 그렇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에 대한 허용적인 분위기가 동성애를 '부추길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 사회심리학을 꾸준히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동성 연애 혹은 동성간 성관계가 사회적인 허용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안 받을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 아닌가.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는 무슨 하플로그룹에 동성애 강화 유전자라도 나왔길래 그렇게 많은 남자 시민들이 일관되게 동성애를 했는가? 거꾸로 질문할 수도 있겠지. 현재 구소련 국가들에서는 왜 동성애 표현을 찾아볼수 없는가? 동성애자들을 수용소로 납치해서 살해하니까.


동성애 옹호 문화가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기독교의 비판은 정상연애 ·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실제 인간들에게 그러한 형태의 행동을 촉발한다는 제2물결 · 제3물결 페미니즘의 지적과 사실상 똑같은 것이다. (그렇잖슴? 사람이 문화에 영향 받는데 동성애만 예외일 리는 없잖슴?) 사람은 완전한 이성애자나 완전한 동성애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분법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뇌가 과부화 걸리는 '기독교 스타일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나 믿는 신앙이다. 모든 인간은 적당히 애매한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그 중에서 뼛속까지 이성애자이거나 (이른바 '뼈테로') 혹은 그 반대도 있겠지. 하지만 이쪽 저쪽 둘다 괜찮은 적잖은 사람들이 사회적 허용 문화를 만난다면, 폭넓은 선택지를 누리는 것이다. 동성애 자체가 문제가 아닌데 문제시하는 기독교가 틀려먹은 것이지, 문화가 인간 행동에 영향 준다는 말은 당연한 이야기다. 지하디즘과 안티페미니즘과 기독교 복음주의와 같은 인간들이 종합적으로 남을 해치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지, 그 사람들이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문과 대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개구멍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해서 하는 비판도, 소수자와 가난한 사람 몰이해에서 비롯한 부분이 있고 또 공감능력 부족에서 비롯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 나름대로 정당한 비판점이 있다. 그것은 개구멍이 정문이 요구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요구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비판에 눈감고 못 들은 척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개구멍이라는 방식 그 자체에 심겨 있는 내재적이고 구조적인 결함이다. 물론 개구멍에 대해서 말하는 주류인들의 비판이 너무 많은 선입견과 혐오와 뒤섞여 있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그래서 그런 논의를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좀 더 물러서서, 서로 욕설을 날리는 사회적 포격 전투 뒤로 물러나서 보다 조곤조곤한 말이 오가는 곳으로 가보자. 예를 들면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양육자들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조언하는가? 개구멍을 권하는 양육자는 아무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개구멍으로 기어들어가서 성공해보겠다는 것을 진심으로 독려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개구멍 안에서는 상식과 공정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것이고,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시혜받는 것이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뇌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구멍 안에서는 객관적이고 평균적인 요구수준과 생산수준 그리고 비용수준과 이익수준이 뒤틀리고 왜곡된다. 공정거래의 개념이 사라지고, 정상임금과 정상이윤의 기준이 망가진다. 그곳은 다수의 감시가 성립하고 보편적인 상식선이 설정되는 곳이 아니라, 개구멍을 뚫어 준 자들의 힘과 패거리의 논리가 지배하는 마굴이다. 개구멍은 자아개념에도 상처를 입힌다.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핍과 자격지심이 깃들어서 나중에는 개구멍을 빠져나올 힘도 누수되어버린다.


개구멍을 혐오발언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일말의 진실을 보아라. 눈 앞에 현저한 대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일쑤인 사람들은, 개구멍에 들어간 사람들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개구멍에 응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기는 사람들을 비난하곤 하지만, 분노가 만만한 약자를 향해 전치(Displacement)되기 전의 원본 마음에는, 그 개구멍 세계를 지배하는 기만적이고 파멸적인 법칙에 대한 원본의 분노와 거부감이 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개구멍의 세계에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할까? 심지어 자신이 개구멍을 이용하거나 개구멍에 이용당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그 타인혐오와 자기혐오가 있다.


왜 그럴까? 개구멍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반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근본적으로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없애기는 힘들기 때문에 거기에 기어들어간 만만한 약자를 손가락질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그곳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개구멍은… 희생자가 머리를 들이밀기를 기다리는 벌어진 어둠의 아가리이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없고 무지한 약자이지만, 그것이 개구멍 진입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대가를 면제해주는 것도 아니다. 다시는, 다시는 그 방향은 쳐다보지 않고 그저 남들처럼 아득바득 정문을 뚫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뿐인 해답이다.


오늘 내가 언급한, 개구멍으로 기어가는 것에 해당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무엇이 있는지 내가 여기서 직접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자신을 유혹하는 개구멍, 때로는 자신이 굴종할 뻔 했던, 혹은 한 번쯤 들어갔다 나와본 적이 있는 개구멍이 무엇이었는지 알리라. 그래도 개구멍이 정말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의 것인지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 보려고 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키고 있는 원칙 한 가지만 말하자면, 예를 들면, 나는 그 어떤 종류의 민간자격증이든 간에, 정부의 관계당국이나 권위있는 연구기관이 아닌 데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내가 종사하는 학계 표준이 되는 모학회 소속의 학회자격증과 Q-Net 국가기술자격증 · Q-Net 국가전문자격증을 제외한 자격증을 나는 찾아본 적도 없고 취득하려 시도한 적도 없다. 그것은 아무나 취득할 수 있고 아무도 검증하고 보증하지 않는 가짜 자격이고 가짜 경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함정이다. 명예가 찢기고 진리가 찢기는 함정이다.


누구도 모욕하지 않기 위해 완전히 가상적인 예시를 한 가지 들면, 나는 "혈액형심리상담사자격증"이 없다. 그런 가짜를 취득한다는 것은 내 영혼 중에서 특히 전두엽 부분을 찢기는 것이고 내 영혼 주머니에 담긴 내 최종학력 졸업장을 찢기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내가 맨주먹으로 울면서 대결해야 하는 태산과 같은 진리의 정문을 배신하고 치욕과 비웃음만이 기다리는 유사과학에 굴복하는 것이다. 빛나는 정문, 때때로 더럽고 치사하고 고인물들이 제멋대로 다 해먹는 정문,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지켜봄으로써 3%의 소금 농도가 유지되는 정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분야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울고 좌절하고 힘들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하게 모든 사람이 공적으로 지향하는 단 하나의 정도(正道)이다.


정면으로 맞서라. 함정에 들지 말라. 더럽고 치사한 정문과 맞장뜨라. 정문과 싸우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가면 몸이 피곤하겠지만, 개구멍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갈고리에 영혼이 상처입으리라. 정문과 싸우다 지쳐 넘어져도, 모두가 함께 슬퍼하리라. 하지만 영원히 쓰러지는 것은 시나리오에 없다. 성취만이 유일한 미래다. 여러분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편안한 정문을 잘 찾아서 지혜와 함께 입성하고자 하는 한, 우리 모두 결국엔 저마다의 정문을 넘어설 수 있다. 누구나 하는 일이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자신도 간다는 것에서 긍지를 느껴라. 그 긍지에서 자신감과 자기확신이 솟아나온다. 나 역시도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이 지금까지 수많은 정문을 돌파해오셨음에 깊은 존경과 진심어린 찬사를 보낸다. 당신의 정면승부를 응원한다. 세상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빛의 문들을 지나며 당신의 빛은 더 밝게 빛나리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Toa Heftib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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