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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Sep 12. 2021

잠복자

나루시선, 44

잠복자


                                        서나루




애인과 헤어져야 할 것 같다고

네가 말했을 때

구덩이에서 기다리던 나는 씩 웃으며 

여어, 어여 오시라고


너가 딱히 준비할 것은 없고

인터넷쇼핑에 들어가서 

제일 고급진 미용티슈를 주문하고 기다리면 된다고

자, 좀 있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날 거니까.

여어,

혼자들의 병동에 온 것을 환영한다


교수님, 무당들도 

헛것이 보이는 거니까 조현병 아닌가요?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으면 병이라고 진단할 수 없다고 하셨지

씩 웃으며 생각했지. 그러면

외로움에 폐인 되는 애들은 진단이 되겠네?


명예 진단서라도 끊어줬으면 위로가 되었겠지 하지만

외로움 타는 애들이 자해 좀 하는 거라곤, 병이라기엔 

증상이 너무 단순했으니까


매독도 궤양도 아니고, 그냥 심플한 두드러기에

헤르페스-심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였던 고대 의사들은

그 심플한 바이러스가 평생을 숨어 있다가

삶의 가장 복잡한 순간에 튀어나와 

제일 짜증나는 부위에 콤플렉스를 만들어버리는 것도 알았을까


뇌간 한가운데에 은둔한 등쪽솔기핵이

단 한 번의 경멸에도

고독보다 앞서 비명보다 일찍 

애먼 뇌수에 세로토닌을 게워내며

손목을 야무지게 그어야 잠들 수 있도록 

개짓거리를 시작한다는 것도 알았을까


구덩이에 온 걸 환영하네 친구

파고 파고 또 파서, 자존감이니 홀로서기니, 책에서 하라는 것은 

모조리 정 반대로 해야 살 수 있을 걸

외롭지 않을 희망을 찢어버려야만

사랑받지 않을 가능성을 껴안아야지만

좀 견딜 만 할 거야


복잡함은 함정이란다

단지 슬퍼질때까지 울렴

단순히 더 울고 싶지 않을 때까지 슬프렴


눈물을 닦으며 계속 파렴 

지뢰보다 낮게

지하에 잠복한 모든 것보다 낮게

모든 희망보다 내려가고

모든 배신보다 내려가서 

우리는 모든 가능성의 아래에 매복해야 하네


그것들이 우리를 올려다보지 못하게

요행조차 나를 범하지 못하게

바로 우리가 

그것들의 밑에 도사려야 한다네


가라. 가서

불행들의 불운이 되고

통증들의 고름이 되고

슬픔들의 고통이 되게.













소현이에게

Photo by Angel Lucian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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