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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Aug 09. 2021

수신자특정

나루시선, 43

Dosii - Swan (2021)








수신자특정


                                            서나루




혼자서도 여럿이서도 많이 연습했어

그래서

나는 만난 적이 없는 너에게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아


내가 아니라 내 자리를 사랑하는 건지

불만일 수 있겠지

용감해지기로 했어 용감하게

너가 아니라 나에게 온 너를 사랑한다고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사랑하지 못하니까


열 번의 환생을 거쳐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

때마침 비어있었던 애인의 좌석에 앉는

누구든지 사귈 수 있다던 친구의 말을 들으며

지금까지 그려보았던 우스운 꿈들을 돌아보았지


쉬운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이었지

네가 하는 일을 어린아이에게 

15초 안에 설명할 수 없으면 당장 접으라는 말이 있지

그것은 관념 같은 것이었지

사랑의 완전히 반대편의 전략전술 같은 것


기다릴수록 미안해지는 것이 사랑이잖아

이런 초라한 짓을 하고 있는 약자에게부터

내가 생각해도 미안한 그 사람에까지.

사랑을 구걸해서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은 알았지

미안한 그 사람들이 안 미안해질 때 즈음에서야


단지 가족을 갖기 위해 결혼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공과금 용지에 전자서명을 부치며

세상도 달라지고 나도 예전에는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예전엔 알지도 못했을 욕도 하는 것을 보았어 

너와의 전화에서 난 그보다는 조금 더 곱게 컸지만

우리는 여전히 쥐어뜯다가 다친 얘기가 아니면 공통분모가 없지


사랑과 전술

카드게임은 잔인한 몽둥이들의 꽃싸움이고

올림픽은 아름답게 무마한 전쟁일 때

도축사가 최대한 빨리 끝내주려고 노력하듯이

나는 너를 감동시키는 말을 최대한 많이 준비했어


순식간에 사랑으로 빠트리고 싶어서

그게 아니어서 컥컥대는 건 서로 매한가지니까

신의 사랑과 율법으로 

지상의 것들에게 자비로운 죽음 베푸는

할랄식 도축이 얼마나 잔인한지 보았지 너도


내게 없는 것을 신비로워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끝은

매맞는 아내와 축산물위생처리법 제7조 없는 쇠고기 같은 거

로맨티시즘이란 게 로마 시절에 끝장나버리지 않아서

우리는 핵심을 빙빙 돌면서 짜증난다는 말도 하지 못했어


너 사랑하고 싶잖아

사랑이 삶을 구원한다고 생각하잖아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럴 거면 서두르자


빠르게 빠져들고

시간을 다 잊어 사랑하고

빠르게 식어버리자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말이야


만약 그래야만 한다는 말 앞에서도 놀라지 않고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질척거리지 않고 쉽게

남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기술이

우리 서로의 고통을 줄여주는 일이잖아


친구도 가족도 죄다 남이라고 부르는 정 없는 사람들

인지장애에 걸리면 얼른 죽여달라는 친구의 말이나

결혼 계약서를 쓰는 도시인들

사실 그들은 정 떨어지는 인간이 아니라

길고 아픈 사랑의 언저리를 잘라주는 꽃집 사장님이었지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 대고 아는 척을 하고

누구보다 잘 아는 그 마음 앞에서 딴청 부리는 거

그런 부끄러운 연극에 질렸지

그 연극의 뒷무대에서 우리는 지치도록 울며 컸으니까


그러면 이제는 꽃다발만 받자

젖은 줄기에서 나는 냄새를 굳이 참지 말고

받은 꽃다발은 시들기 전에 거꾸로 말리자

뻔한 것도 곱게 그러모으면 솔직한 것이 되니까, 그러니


우리는 사랑을 하자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빼고는 다 잘 모르겠으면

확실하게 사랑만 하자


네가 여기 온 것도 사랑이 아니면 남이었고

사랑이면 남이 아니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정 떨어지는 짓을 해도

사랑 안에서는 끝까지 따스하니까


온기 속에서 사랑을 찾는 게 아니라

사랑과 사랑을 이어서 온기를 유지하는 거야


연속적 따스함 속에서 사는 것이 목표잖아

사랑의 좌석에 시체를 놔두지 않기 위해 나를 내쫓아도

서로를 위해 자비로운 절차이니까

조금 더 외로운 사람이 조금 덜 자비로울 거고

그건 아마 나겠지만


부상자의 숨을 금방 끊어주고

다시 환생을 주는 전쟁의 전령처럼

말씀에 따라 생겨나고 찰나에 따라 소멸하는 

자비로운 신의 단위처럼 

우리는 금새 사랑하자


줄기와 덩굴을 끊고 낯부끄러운 모른척도 관두고

불안과 기다림에 목 막힌 켁켁거림도 없이

곧 도착할 자리에 기다리는 나와

꽃다발처럼 빠르게 사랑만을 하자















Photo by Marek Piwnick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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