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는 심리과학으로서 어떤 가치가 있고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
– 목 차 –
교육에 매달려온 이유: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긴 여정 2
이분법이라는 생존전략 2
악용되는 이분법 3
정신의 막대기들 4
과학만이 유일한 탈출구 : 직관을 거부하고 과학의 편에 서기 5
결국 귀결은 먹고사는 문제인가? 5
온 시민 과학자 되기 6
MBTI가 던지는 과학사회학적 고민거리들 7
MBTI 춘추전국시대 : MBTI의 연구윤리적 고민거리들 8
시민윤리란 연구윤리다 10
MBTI의 문제 – 심리학계의 비판 11
MBTI의 쓸모 12
MBTI의 선물 : 서로의 차이와 화해하기 13
이분법의 선물 : 타자이기에 이해가능하고 우리이기에 의지가능한 14
MBTI, 타자와의 대화를 위한 아마추어 심리학 16
Antifreeze: 우주 속에서 공동의 온기를 찾는 협력으로서의 과학과 비과학 16
직장을 그만두고 첫 학사과정에 입학한 것이 2015년이었으니, 올해면 대학교육을 받은지 6년째다. 좋게 말하면 폭넓은 배움의 연쇄였고, 나쁘게 말하면 지리멸렬하고 무책임한 지식 쇼핑이었다. 어서 공무원으로 취업해서 버젓한 정상가족의 가장이 되기를 바라는 친척 어른들과 또 한편으로는 부의 최대화라는 바람직한 자본주의적 적응양식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면서,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자무식도 아닌 채로 어중간한 실력을 가지고 설명하는 데 한참 걸리는 미래를 쌓아올리며 살아왔다. 심지어 남들처럼 빨리 걷지도 못하고, 자주 넘어지면서.
“왜 그렇게 입만 열면 배워야 한다느니, 대학은 누구나 꼭 한 번은 가야 한다느니, 평생교육이 답이라느니 말하면서 교육에 집착하니? 너는 대안학교를 나와놓고서는 왜 그렇게 후배들에게 대학교육이 유일한 문제 해결수단인 것처럼 말하고 어떻게든 후배 하나라도 더 대학 보내려고 4년제 홍보대사라도 된 것처럼 말하니? 왜 그렇게 지식과 학문에 집착하니? ….” 정작 자신의 공부에 스스로 만족하지도 못하는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압도적인 학문적 우위를 갖춰야 한다고 부추하고 다니고 이런 핀잔들을 들어먹고 다니는 이유는, 인간의 원초적이고 교육되지 않은 정신을 지배하는 이분법의 환상을 깨고 그 자리에 더 선명하고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진실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채워넣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인간은 이분법에 익숙하다. 좋음과 나쁨, 이익과 불이익, 호와 불호, 처음과 끝, 흑과 백,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여자와 남자, 생물과 무생물, 동물과 사람, 보수와 진보, 적과 아군, 성스러운 것과 추잡한 것, 고결한 것과 하찮은 것…. 인간의 인지는(그리고 짐작하건대 모든 동물의 인지는) 눈과 귀를 통해 감지되는 세상으로부터입력되는 복잡하고 기괴한 정보들을 오직 생존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진화했고, 최대한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최대한 빠르게 세상과 사물에 대한 대략적인 마음 속 모델을 세우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수많은 복잡한 – 그러나 약간의 유사성이 있는 정보들을 빠르게 특정한 범주로 묶어내고, 그것이 이익이 되는 것인지 불이익이 되는 것인지 최대한 머리를 덜 굴리고도(두뇌에서 포도당을 덜 사용하고도) 재빨리 감지하여서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생존에 도움되게 하는 습관이 바로 세계를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둘로 나누는 이분법이었고, 그것이 심리학에서 마음 속 모델 즉 스키마(schema)라고 부르는 생체 가상 모델링 기법의 여러가지 원리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인간을 비롯한 여러가지 생물의 타고난 특징 혹은 취약점을 나쁘게 이용하는 인간들이 아직 이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다른 인간의 배고픔을 이용하기도, 사회적 욕구를 이용하기도, 외로움을 이용하기도 하며, 바로 인간의 이 나누기 본능 – 즉 이분법에 숨겨진 취약성도 거리낌없이 악용한다. 이분법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된 존재의 양 끝단만을 보게 한다. 지평선을 가리키며 ‘저기에 하늘과 땅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펼쳐진 세계의 일부 특성을 지목하여 언급된 특성과 관련된 정보만을 지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점화(點火, priming)라고 한다 – 그 손가락을 보고 지평선을 바라본 사람은 대체적으로 하늘과 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 그 사이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 하늘이라는 범주 안에 자동적으로 포섭된 구름, 풍경을 뒤로 하고 날아가는 새들은 대부분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이 단지 풍경을 감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고 치명적인 관건에 대하여 적용될 때 발생한다.
세상은 많은 거짓 이분법들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맞다 틀리다, 혹은 이쪽이 다 옳거나 저쪽이 다옳다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데, 질문의 선택지를 단 2가지만 제시해서 질문자가 바라는 대로 한 쪽을 택하게끔 교묘하게 부추기는 질문들을 누군가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발명한 것이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원자력발전 아니면 신재생에너지 중에 무엇이 바람직한 에너지원인가?(정작 신재생에너지는 에너지 공급 안정성이 낮기 때문에 출력제어가 용이한 석탄화력발전과 반드시 같이 가게 된다) 수시 아니면 정시 중에 뭐가 더 공정한 입시제도인가? 역사속에서 좌파 아니면 우파 중에 누가 가해자인가? 증세 아니면 감세 중에 무엇이 정당한 정책인가? 진보당 혹은 보수당 중에 누가 올바른가? 부자 동네랑 가난한 동네 중에 어디 사람들이 더 젠틀한가?
때로는 어느 한 집단이나 개인을 지지하는 것이 명백하게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이분법적 질문 틀 안에 가두어서 명백하게 판명된 옳고 그름을 망각하게 만드는 질문들도 존재한다. 요즘 말로 ‘물타기’라고 표현하는 파괴적인 언어적 공격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스라엘 아니면 팔레스타인 중에 누가 피해자인가?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중에 누가 더 억울한가? 죽음 뒤에는 영구한 허무만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가? 동성애는 개인의 취향인가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인가? 페미니즘은 남녀평등적 사상인가 여성우월주의인가? 이런 질문들 속에는 이미 답이 전제되어 있다. 서로 다른 권력층에 존재하는 강자와 약자 · 가해자와 피해자를 하나의 지평에 뒤섞어서 억압과 피억압을 들추기는커녕 둘을 가짜 평등의 링 위에 올려두고 ‘자 여기 데이트폭력으로 살해당한 여자가 있소. 자기 여자친구를 죽일 정도면 남자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 불쌍한 남자들이여!’ 따위의 물타기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마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뿌려댄 고엽제처럼 이 따위 질문이 오고가는 지금-여기 공론장의 수준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단지 땅을 더럽히는 것을 넘어서 대대손손 DNA에 영향을 주는 화학무기의 속성처럼 단순무식한 사고방식을 습관화시켜 여러 세대에 걸친 인간들의 깊은 사유를 교란한다. 모든 말에는 말의 주장뿐만이 아니라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작은 세계관과 가치관의 샘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의견교환은 상대방의 한 기호가 나의 스키마에 오는 것이 아니라(애초에 기호가 스키마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나아가 언어철학에서 기호라든가 심지어 현상학에서 직관의 배후에 있는 스키마의 근본적 자폐성과 독단성을 직면하지 않거나 끽해봐야 칸트 전통에서의 물자체 정도로 눙쳐버린 것이, 철학자들이 자기가 어디에서 헤매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헤매게 하는 유구한 패착이어왔다), 오히려, 상대방의 압축된 스키마 그 자체가 나의 스키마에 스며들려고 시도하며 때로는 거부적으로 대결하는 림프관 속 면역반응과 같은 것이다. 질문을 받는 인간은 질문자의 세계관에 한 번은 이입해보아야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데, 교활하게 설계된 질문은 파일을 여는 순간 감염되는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그 설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순간 그 교활한 질문자의 역겨운 세계관 · 전제 · 관점들에 이입해버리게 된다. 정신의 코가 밝은 사람들은 그 냄새에 화들짝 놀라 뛰쳐나오지만, 가끔 나의 별것도 아닌 권익옹호(advocacy) 칼럼에 거품을 물고 주술적 저주를 퍼붓는 안티-페미니스트들처럼 코가 밝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 교활한 낚시바늘에 코가 꿰인 다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리 말하면, 모든 건네는 말과 모든 주장하는 언어표현은 언제나 하나의 암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말은 타인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정신적 막대기’와 같다. 그것은 상대방을 향해 찌르는 사람의 강도와 받는 사람의 정신적 견고함에 의해서 우유에 적신 핑거스틱 빵처럼 부드러운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로마 군단병의 투창처럼 사람을 뚫고 들어가서 영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살인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비전공자들이 MBTI만큼이나 오남용하고 있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아주 조심스럽게 제한적인 의미로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스라이팅의 한국사회에서 이해되는 통상적인 의미를 인용하자면, 그야말로 모든 의사소통은 가스라이팅이 될 혐의를 품고 있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사소통은 제안자(송신자)의 주장과 수신자의 검증이라는 두 가지 주관적 기준에 의해서 검증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맨몸으로는 진리를 검출해낼 능력이 거의 없어서 과학적 역량이 있는 자들조차 인간의 기준 안에서 ‘진리 그 자체’와 단지 유사한 근삿값을 제안할 뿐이고, 그마저도 매년 학계에서 ‘작년까지 쓰던 것은 틀렸네요’ 하면서 갱신되며, 제안자와 수신자 사이에 오가는 말들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것을 도와줄 공동체적 상식이라든가 집단지성의 조언 같은 보조도구들은 모든 사람에게 고루 주어져 있지 않아 사실상 단지 행운 또는 요행으로만 존재하며, 그마저도 수신자 입장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가용자원을 모두 끌어모아 나름대로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기에) 우리 삶에 필요한 판단력의 절대적 합격 기준을 알지 못한 채 그 요행과 행운을 덕지덕지 붙인 지식의 누더기 횃불로 이 춥고 어두운 삶의 야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지리멸렬한 판단력 부족의 삶 안에서, 마치 한국이나 중국 따위의 강한 민족주의 국가가 휘두르는 애국심 고취 선동처럼 무분별하게 뿌려지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게으름은, 사람들이 현실에 기반하고 공동체의 공동 이익을 위해 건설적인 대안을 함께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사고 능력을 망쳐놓는다. 너 여자 편이야 남자 편이야? 너 결혼 할 거야 말 거야? 너 탈코르셋이야 코르셋이야? 너 한국에서 적응하고 살 거야 아니면 이민 갈 거야? 너 군대 갈 거야 아니면 유승준처럼 배신자 할 거야? 너 미국 편이야 중국 편이야? 이런 수많은 교활하게 설계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시스템에 침투한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다른 정상적인 단백질 접합을 자신의 역기능적 단백질 접합으로 변형시키는 광우병 원인물질 프리온처럼 점차 사회의 담론 전반에 일반화된 방식으로 뿌리내리며 공동체 전체의 세밀한 판단능력과 세상을 보는 다채로운 해상도를 뭉개어가는 것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현명한 지식을 가지고 좋은 결론으로 합의를 봐야 한다. 좋은 과정을 통하여 좋은 합의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사람들이 실제 현안에 대해 실질적이고 현실적인(down-to-earth) 판단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판단능력은 어디에서 강화될 수 있는가? 인간의 자동적 사고, 편견, 주술과 미신과 종교, 불완전한 어림짐작, 이분법 내지 삼분법의 경향성은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탐구자들이 서로의 스키마가 가진 오류를 교차비판해주는 오랜 집단지성으로 이루어낸 과학이라는 교육적 체계와 과학방법론의 사유 원칙으로 극복할 수 있다.
개별 분과 학문들과 모든 분과 학문들이 공유하는 과학방법론의 사유 원칙은, 우리에게 ‘너 하고싶은 대로 생각하지 말고 실제 세계의 사실을 본떠서 생각할 것’을 명령한다. 또한 ‘그 사실은 결코 이분법이나 삼분법으로 단순히 나눌 수 없고 오직 자연의 스스로(自) 그러함(然) 대로 존재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잘게 나누어 파악해야 하며,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것을 단순화하기는커녕 탐구방법론(관찰도구와 이론을 통틀어)이 개선하여서 대상을 나날이 더 심층적이고 해상도 높게 파악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과학적인 판단이 되지 않고 태도만 좋아서는, 우리는 친절하게 쑥뜸과 부황을 뜨는 한의사 · 웃으며 사주팔자를 봐 주는 무당 · 진심으로 동성애가 치료되기를 바라며 전환치료를 자행하는 ‘아이히만적’ 기독교인들의 무지성적 시궁창을 벗어날 수 없다. 바로 이 목마름이, 내가 사람들에게 수많은 오해와 우려를 무릅쓰고서라도 ‘인간에게 대학교육이 사실상 필수적인 것은 물론이고 죽을 때까지 머리 터져라 공부하는 평생교육만이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 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물론 그 ‘건강한 시민사회’라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반적 사회문제라는 것이 단순히 교육으로 해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문제란 사실은 대체적으로 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그 배치와 분배의 문제에 개입해야 함은 물론이다. 성차별 및 성폭력과 같은 젠더 문제 · 난민과 성소수자 등 인권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회적 결함은 사실 지방시민의 인프라나 청년 공동체 문제를 포함하여 지역간 · 직종간 · 성별간 · 1차/2차 노동시장간 · 내부/외부 노동시장간 임금불평등, 산업재해 예방 등 산업안전, 산업복지, 산업재해자 보상 확대와 같은 산업적-경제적 이슈이다. 학벌이라든가 입시지옥이라던가 취업난 같은 문제도 결국 안전한 환경에서 인간다운 노동환경을 보장받기 위한 배틀로얄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의 몸부림인 것이다.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의외로 다시 적정 임금 문제, 일하다가 죽고 다치지 않을 권리 문제, 노동 조건 문제, EITC와 같은 노동보조금과 노동자 주택공급의 문제 등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개입이고 인간의 삶은 일하고 돈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싶으면 단순히 정원가꾸기, 봉사활동 동아리 가입하기 같은 것을 넘어서 노동조합 비조직부문 및 비정규부문 노동자의 임금테이블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노동현장에서의 산업재해를 제로(0)에 가깝게 줄여내고, 그 반대급부로 기업과 부자에게 더 많은 책임과 세금을 요구하며 미안하지만 중산층 임금에 칼질을 해야만 한다. 중산층도 노동자인 것은 맞지만,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고 또한 산업적-경제적인 범주 안에 있다. 마치 스탈린 책을 달달 외우면서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외치는 한국의 촌스러운 구좌파 운동가들처럼 그 머나먼 목표를 지금-여기에서 부르짖을 수는 없다. 산업재해 예방과 산재자 치료 및 보상, 노동자 복지 개선, 임금과 노동조건의 거대한 상향평준화, 젠더 평등과 소수자 보호, 기후 중립과 같은 이슈들은 분명 이론적으로 성취 가능한 목표이지만, 이곳에 앉아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누군가 거기에 우리를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다. 거기는 우리가 우리 발로 가야 한다. 내가 혁명을 못하면, 내가 혁명을 할 실력이 안 되면, 혁명이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 지금-여기 사람들의 역량 강화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 다시 교육이다. 이렇게 우리는 한 바퀴를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대학에서 제공되는 고급 지식 전반을 다루는 능력과 지성을 사용하는 훈련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이분법과 편견을 이겨내고 진실에 접근할 능력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하며 연구윤리와 연구자들을 존중하는 올바른 시민의 태도도 중요하다. 단지 기계적으로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관점과 입장을 활용하는 ‘마음가짐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여야만 한다. 아직 우리사회에는 ‘피해자 · 약자라고 믿어주지만 말고 가해자 입장도 생각해줘야 한다’ 라는 식의 생각없는 상대주의를 통해 명백한 가해자 입장을 피해자 입장보다 더 존중하는 야만적 패악질이 존재한다. 심지어 요즘에는 ‘중립 기어 넣는다’ 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약자의 고통에만 비겁하게 골라 침묵하는 것이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분법에 대해서 거부하고 최대한 많은 변수를 고려하는 지적인 태도가, 단지 범죄자나 지배자의 입장에 ‘왠지 그게 나에게 더 안전하게 느껴지기에’ 서는 일종의 영혼의 자백행위라거나, 아니면 남의 일이고 잘 모르겠으니까 입 다물고 내 하던 일이나 하겠다는 인간성의 타락과 같은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존의 시나리오와 습관화된 스키마를 다 내려놓고, 한 건 한 건의 새롭게 접수된 현상 또는 사건을 최대한 잘게 구조화된 탐구 방법론으로 비추어 보는 과학자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정성을 다하는 것이고,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천천히 숙고한다는 것이며, 천천히 숙고하면 편견과 선입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서 나름대로 객관에 가까운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인간사와 자연사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관계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판단이 우리 공동체를 합의 가능한 일정한 결론의 골짜기로 수많은 의견들을 모두어 종합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최초의 직관, 즉 셰익스피어의 ‘죽느냐 사느냐’로 상징될 수 있는 즉자적인 이분법의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늘 이러한 이분법의 함정을 피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이분법 체계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여러 분과 학문들의 설명틀에 조금은 께름칙한 선입견이 있기도 하였다. 맑시즘에서 상부구조-하부구조의 프레임도 그러하였고, 철학에서의 말도 안 되는 망상적 이분법들은 따져볼 가치도 없고, 모든 가치를 경영자적 리더에게 몰아주고 나머지 모든 인간을 예비-경영자로 취급하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을 주는 경영학도 그렇고…, 심지어 제3물결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제공하는 통합적이고 전체론(holism)적인 통찰들이 널리 알려진 21세기에도 ‘누가 진정한 여자냐’, ‘누가 진정한 페미니스트냐’ 가지고 싸우는 안타까운 한국 페미니즘 담론장 내부의 지리멸렬함 – 물론 그 대부분은 트위터의 신경독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 을 지켜보며 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관습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긁어내야 할 악폐습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의 배경을 가진 나로서는, 사람을 어떠어떠한 유형으로 나누는 유형론적 접근을 취하는 심리검사 방법론에 대해서 신뢰를 보낼 수가 없었다. (유형론과 특질론의 차이에 대하여서는 나의 예전 글을 함께 참고하라: 「변론가들을 위한 변론」(2019)) 그래서인지 이 MBTI라는 것을 처음 봤을 때에도 인간의 내면에 대한 전형적인 유형론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고, 그 유형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문학적이고’ 두루뭉술해 보이는 데다가 MBTI의 4가지 대극지표라는 것도 MMPI와 같은 검사의 통합적이고 상호 구분되는 프로파일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이분법을 4종류 나열해 놓은 단순한 모양새가 아닌가 하여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심리학을 위시하여,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은 오해를 받는다. 보통은 그것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의심받거나, 아니면 그것이 완전히 세상의 비밀을 찰떡같이 다 알아맞혀서 그것이 진리와 같다고 맹신받거나 둘 중 하나이다. 심리과학에서는 인격, 행위, 성향, 성격, 가능성, 확률 등을 연구 및 측정의 대상으로 삼기에 탐구 대상이 물질적인 실체로 존재한다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심리학은 여러 실체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창발(emerge)하는 비물질적 현상으로서의 임의의 군집을 언어적으로 개념화하고 규정해내고 최종적으로 통계 및 임상을 통해 수학적으로 그리고 실용적으로 정당화하는 매우 ‘델리케이트(delicate)한’ 형태의 과학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격’이나 ‘정신질환’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심지어 때로는 ‘교도소 수감자의 재범 확률’처럼 단지 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을 과학방법론의 엄격한 잣대에 부합토록 검증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조건과 검증을 요구받아야 하고 그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하는지 잘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심리과학’이 사주팔자, 타로카드, 무당, 기독교, 뇌호흡,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류의 진화심리학과 같은 사이비 유사과학에 의해서도 시시각각 오용되고 모욕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불문가지(不問可知)인 것이지만, 사실 과학방법론을 통해 최소한의 수준 안에서 타당화된 심리학의 일부일지라도 이런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일부는 마치 인간을 설명하는 통합 이론마냥 남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MBTI가 이분법적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아예 심리검사라고 하기도 힘든 유사-심리학 검사마저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한국어판 16 Personalities’ MBTI 검사이다. 원본 MBTI 자체가 던지는 과학철학적 고민거리를 논하기 전에 이러한 유사-MBTI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짚고 넘어가자.
현재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세속의 MBTI 문화를 주도하는 ‘16 Personalities’ 사이트(www.16personalities.com/ko)의 MBTI 검사는, 사실은 Katharine Cook Briggs와 Isabel Briggs Myers 모녀에 의해 개발된 원래 MBTI 검사가 아니고 그것을 살짝 개량한 NERIS Type Explorer라는 별개의 검사이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연구방법론의 렌즈로 살펴보면 전혀 다른 물건이다. 두 검사가 각각 추출하려 하는 마음 속 구인개념(Construct)의 차원도 MBTI는 아시다시피 4개 구인인 반면 NERIS는 자기주장형(Assertive, -A)과 신중형(Turbulent type, -T)을 더한 5개 차원이다. 물론 NERIS 역시 MBTI와 같이 융 심리학에서 출발했고, MBTI에서 개념 대부분을 ‘참고’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여전히 비슷하게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NERIS는 기존 4극 체계를 (적어도 겉보기에) MBTI와 공유하면서도, MBTI에서 누락된 BIG-5 성격유형의 정서적 안정성(Emotional Stability) 구인을 살려내어 Type-A와 Type-T 척도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통점과 칭찬할 만한 지점을 감안해서,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BIG-5도 융 심리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융? 융의 성격이론을 반영했으면 일종의 같은 심리검사 패밀리라고 보면 안 될까융? 안 된다. 그렇게 단순화할 수는 없다. 만약에 NERIS가 MBTI의 개정판 내지는 확장판인지 묻는다고 하더라도, 실제 MBTI의 원저작자들이 확장판을 만들 때의 방향성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현재 ㈜어세스타에서 서비스되고 있는(www.career4u.net/tester/mbti_intro.asp) MBTI 저작권자의 정식 한국어판은 MBTI Form-M이며, 이것을 표준으로 하여 더 많은 구인을 측정하는 확장판은 MBTI form-Q인데, 이는 다들 아는 그 4가지 대극지표에 각 지표당 5가지의 하위척도를 추가한 형태이다. 각 하위척도들은 51개의 추가 문항을 통해, 개인의 내면에서 4대 성격유형이 어떤 특성을 띄고 발현되는지를 보다 세밀하게 측정한다. 이를 성격유형의 다면적 특성을 반영한다고 하여 다면척도라고 부르는데, 이분법적 유형론으로 고안된 MBTI의 한계를 의식이라도 하듯 다면척도는 각 세부 특질의 점수를 측정하는 점수형으로 개편되었다. MBTI의 유형론에 한 가지 유형을 추가한 NERIS도 물론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나름대로 유용하다는 것과 그것이 저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모든 심리측정도구는 개발할 때마다 서로 다른 개발자에 의하여, 서로 다른 개념어에 서로 다른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을 부여받고, 서로 다른 연구 표본 집단에 시험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정당화된다. 따라서 심리학에 있어서 ‘비슷함’이란 아예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통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집단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연구를 이어가고자 하거나 혹은 한 연구에 대한 또다른 바리에이션을 만들고자 한다면 정말 과거의 연구로부터 출발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줄기라고 인정할 수 있다. 옛 말씀에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똑 같은 모종을 따뜻한 남쪽에 심으면 귤나무가 되고 시원한 북쪽에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말인데, 환경이 대상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같은 이론가에서 나온 성격이론이라도, 어느 학교의 어떤 연구자 그룹이 몇 년도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의 어느 인구집단에게 어떤 방식으로 타당화를 하였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단지 같은 근거이론에서 출발하거나 겉보기에 비슷한 구인을 측정한다고 하여서 ‘같은 검사 아닌가요’ 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검사가 아니다.
심지어 더욱 안타깝게도 NERIS는 원본에서 한국어로 번안되는 과정에서 한국어권 이용자에 대하여 그 번역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타당화 연구를 하지 않았다. 단지 원안을 번역하기만 하고서 바로 시중에 배포하였는데, 이는 심리학과 학부생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실수다. 게임 회사 블리자드도 『스타크래프트2』를 한국에 출시할 때 단순히 번역만 띡 해서 내놓지 않았다. 한국 이용자들의 고유한 문화와 맥락과 정서를 살려서 ‘현지화’를 한 것이다. 적어도 심리검사에 있어서, 단순 번역은 현지화가 아니라 단지 좀 더 매끄러운 버전의 파파고에 불과하다. 그것이 현지 인구집단에서 원본 인구집단과 수학적으로 거의 비슷하게 작동하는지 검증하는 과정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NERIS검사는 그러한 최초 개발지역 원본의 타당도와 신뢰도마저도 폭넓게 인정되지 못했다. 문항(Questionnaire) 개수도 MBTI Form-M은 93문항인 발면 NERIS는 60문항으로서 동등한 검사라고 하기에는 NERIS가 ‘진실을 낚아올리는 낚싯대의 개수’가 1/3가량 적은 약식 검사에 가깝다.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현상을 보는 것이지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진정한 그 정보값’은 보거나 만질 수 없으며 그저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진리’라 불리며 오직 추정하는 최댓값과 최솟값 사이 한 대역에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 대역은 오직 과학적 방법으로만 발견할 수 있다. 단지 그럴듯해 ‘보이고’, 비슷하게 ‘보인다’고 해서 진리의 측면에서 같은 것도 아니고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호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심리검사들의 검사문항은 그것이 실제로 측정해내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그리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검사문항을 보고 드는 ‘아하, 이것은 나의 무엇을 측정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확신이란, 단지 조사방법론상 액면타당도라고 불리는, ‘단지 겉보기에 그걸 재고 있는듯한 느낌’에 불과하다. 심지어 MBTI와 NERIS 사이에, 예를 들어, T(사고형)와 F(감각형)를 표기한 결과지가 똑같이 존재하고 두 검사를 시행한 한 사람에게 똑같이 T 혹은 F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안의 세부 문항과 평가 체계가 전혀 다르고 측정구인에 대한 이론상의 진점수도 다를 것이니 단지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이분법적 유형론의 둔한 칼날에 의해서 대충 구분되었기에 동일하게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겉보기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현대사회의 시민은 최소한의 과학적 소양을 갖춘 적어도 초보적인 과학자가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사물의 겉보기 그럴듯함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점집에서 아무리 내 개인정보를 잘 알아맞추고 당신 사주에 火랑 木이 많은 게 지금의 생활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런 비과학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함께 쌓아올린 현대 과학문명을 좀먹는 반달리즘이다. 영미철학자 노양진 교수가 경고하듯이, 그렇게 파괴된 이성과 합리성의 성곽에는 ‘힘과 패거리’가 쳐들어와서 지배하게 되어 있다. 지금과 같이 시민들이 과학에 무관심하고 미신을 환영하는 태도를 내버려둔다면, 머지않아 주술적 여성혐오와 광신적 민족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따위가 우리 사회를 지금보다 더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극우파 대선 후보는 좋은 기운 받으려고 손바닥에 왕(王)자를 그리고 대통령토론회에 나오고, 비건 크리스천 페미니스트 무당이라는 자는 유튜브에서 점을 보고, 진리와 자유의 방패라는 대학가에서는 유행처럼 운세상담과 타로점이 번지고, 666과 RFID기술이 악마의 표식이고 COVID-19 백신이 뇌를 조종한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질 않나, 심지어 『던전 앤 파이터』 · 『메이플스토리』 같은 온라인게임에서도 값진 희귀 등급 무기가 강화 실패로 깨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른 값싼 무기를 강화해서 깨먹은 다음에 본 무기를 강화하는 등, 온 나라에 참아줄 수 없는 역겨운 주술과 미신이 판을 친다. 이 나라의 지적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같이 무너졌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할 때 같이 박살났나? 다들 인류의 현주소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자신의 정신을 꽉 붙잡아야 한다.
자 그렇다면 MBTI는 괜찮은가? 지금까지 언급한 더 참담한 비과학에 비하면 사실 MBTI는 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냉전이 전쟁보다 낫다고 해서 평화에 가깝다고 말할 수는 없듯이, MBTI가 사주팔자보다 낫다고 해서 그것이 충분히 좋다는 것은 아니다. 전자가 후자보다 단지 더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좋아, 그렇다면 따져보자.
MBTI에 가해지는 가장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비판은 오늘 내가 주되게 언급한 것처럼 역시 유형론이 주는 이분법에 있을 것이다. MBTI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조작적 정의가 잘 되어 있지 않은 모호한 어휘들이며,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같은 대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케 한다. 또한 MBTI의 4대 대극지표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그에 대한 해석도 구체적이지 않아서 바넘 효과(Barnum Effect)에서 자유롭지 않다. MBTI의 바넘효과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동어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약한 경향을 극단적인 한 축으로 과대해석하게 부추긴다. 모 아니면 도, 외향 아니면 내향이라는 식의 구조를 가진 대극지표의 특성상, 샘플이 많아지면 무조건 중간이 많이 분포하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많은 사람이 다층적인 내면을 지니고 복잡다단한 과업들 속에서 두 극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단지 한쪽 끝에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뿐인가? 서로에게 완전히 배타적이고 상호 독립적으로 구성되지 않고 단지 추상적인 어휘로 구성되다보니, 상식적으로 당연히 함께 사용되는 특질이 상반된 유형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채플힐 의과대학 박진영 연구원은 계간 『SKEPTIC Korea』 23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외향성과 신경증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외향성),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쩔까 걱정한다(신경증). (…) 평소 관찰력이 뛰어나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줄 아는 능력이 좋아야 통찰력이라고 하는 큰 그림을 보는 능력 또한 발달한다 (…) 감각과 직관은 배타적일 수 없’다. (출처) 이와는 반대로, 세부적으로 얼마든지 더 나눠질 수 있는 특질이 같은 유형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예컨대 외향형(E)는 인간의 신체적 활동성과 관계 지향성 그리고 심지어 언어적 유창성까지 한데 묶어놓았는데, 이것은 현대적 심리학에서는 절대 저지르지 않을 실책이다.
그렇다면 MBTI의 수학적 타당화는 어떤가? MBTI의 검사-재검사 타당도(Test-Retest Reliablilty)는 50% 수준이다. 미국의 연구에서는 최악의 경우에 24%, 최상의 경우에 61%를 기록했다.(출처) 두 번 중 한 번, 경우에 따라서 4번 중에 3번은 내 성격이 바뀌어서 나온다는 것. 재미있는 것은 심리학에서 성격을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개인 내의 고유하고 영구적인 생각 및 행동의 경향성’이라고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MBTI가 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심리전문가에 의해 채택되는 대부분 심리검사의 재검사 타당도는 .9(90%) 이상을 요구한다. 10번 재검사를 하면 9번은 내 원래 성향과 같은 것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시타당도(공존타당도, Concurrent Validity)에 문제가 있으며, 구인타당도(구성타당도, Construct Validity) 역시 문제가 있고, 4대 대극지표 간에 상관계수가 너무 높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출처, 원문은 싸이월드로서 소실됨) 지표들간 상관계수가 높다? 서로 전혀 별개의 영역이라서 4가지로 분류되었던 개별 성격차원들의 점수가 서로 같이 올라가고 같이 내려가면… 어쩌자는 말인가?
그럼에도 MBTI는 쉽고 저렴하고 ‘10분 컷’이 가능할 만큼 간편하다는 특성 덕분에 경영학, 신입직원 채용, 심지어 직업상담에서도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나도 직업상담사인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 직업상담 장면에서 대체 왜 그런 실책을 저지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직업상담사도 상당한 심리학베이스를 요구하는 상담자이며 상담윤리에 따라 엄밀한 과학기준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MBTI가 측정하는 구인이 개인의 성격 그 자체가 맞다손 치더라도, 양심에 손을 얹건대 그렇게 칠 수는 도저히 없지만, 만약에 그렇다고 상상하더라도, 직업적응 그 자체 및 직업적응을 결정하는 요인들과 성격특성이 대체 얼마나 깊은 공변량이 있고 인과관계가 입증되었길래 채용과 직업상담에 MBTI를 도입하는 모험주의적 행위를 하는가?
부정확한 정보보다는 차라리 정보가 없는 게 낫다. 그러면 아무런 선입견 없이 내담자 그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럴거면 차라리 사주팔자 궁합 맞춰서 직원 뽑고 한의학의 힘으로 취업 잘 되는 보약을 달여 먹여라 차라리. 그건 재난지원금으로 결제라도 되지. 비과학적 수단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노라면 죄책감은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비과학적 수단은 ‘재미로’ 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들은 말로는 ‘재미로 한다’, ‘그냥 나도 안 믿는데 한 번 해 보는 거다’고 하면서 철석같이 믿지 않는가. MBTI를 사용하는 것은 그러잖아도 주술과 미신에 사로잡힌 이 사회에 한 번의 여지를 더 주는 행위다.
그렇다면 MBTI는 완전히 폐기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이 폐허에서도 건져낼 보석이 있는가? MBTI를 하나의 심리검사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성격검사로 간주한다면, 나는 절대 이 20세기 심리학의 유산이 인간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 끼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MBTI는 유형론이라는 인간의 게으르고 위험한 사고방식을, 그것도 양극화된 이분법적 프레임이라는 더 치명적인 사고방식을 끼얹어서 우리에게 달콤하게 제안하는 지적 독약이다. 그러나, 그러나, 만물에서 부처를 발견해보라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MBTI를 시행해보고 다루고 논하면서 조금이라도 배운 것이 있지 않을까?
한 가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MBTI 그 자체로부터 온 것이라기보다는, MBTI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의 흐름을 보면서 무언가 인간적인 감동으로 다가온 조금 메타적인 감상이었다. MBTI는 이론적으로도 버려야 하고 전문가들에게도 버림받은 오랜 이분법적 버릇의 잔재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MBTI라는 하나의 수단을 택하는 것에는, MBTI의 속성 이전에 존재하는, 그것을 집어들게 된 인간의 의도와 마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MBTI의 등장에 그렇게 열광하고, ‘MBTI는 과학’이라는 무리한 주장까지 해 가면서 그에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한 즐거워하는 것일까? 그것이 과학이 아닌데도?
바로 그것이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만큼 정확하고 엄밀하지 않기 때문이다. MBTI의 본질은 그것의 심리과학적 정확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성격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어 주는 공동체적 역할에 있었던 것이다. MBTI는 미술로 말하자면 정물화라기보다는 캐리커쳐와 같다. 인간의 얼굴 정보를 처리하는 측두엽의 방추얼굴영역(Fusiform Face Area, FFA)을 마약처럼 흥분시켜 사람들에게 인상의 즐거움을 주는 캐리커쳐처럼, MBTI도 성격의 과장된 묘사를 통해 ‘어! 나 저런 사람 어디서 많이 봤어!’라고 환호할 수 있게 이끈다. 공연예술로 말하자면 오페라가 아닌 콩트이고, 언론으로 보면 탐사보도가 아닌 만평과 같은 것이다. 정확하지 않고, 축소와 과장이 사용되고, 조금은 편파적이고, 굳이 이분법적으로 편을 가른다. 바로 그 특징 덕분에, 사람들은 그 여러가지 자극적인 담론적 돌출부 중 하나를 붙잡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사실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자신과 중요한 타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MBTI가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오히려 MBTI가 정밀하지 못하고 통속적인 담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MBTI의 과장된 성격 스케치를 안주 삼아 펼치는 만담 속에서, 인간의 진짜 통계학적으로 정당화된 성격특질과 정규분포곡선상에 추정된 T-점수와 임상적 프로파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케치들을 둘러보다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인상깊고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과거의 사건에 관해, 즉,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어떤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그리고 인간 군상에 대한 거친 스케치를 그려내고, 그 스케치들을 뚜렷한 이분법적 유형으로 나누어서, 나를 한 편에 두고 나와 특별히 인상깊은 대비를 보였던 사람들을 반대편에 둔다. 그리고 네 성격 유형의 차이가 다루는 주제에 맞추어서 자신의 과거 경험들을 털어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E 와 I 의 차이점에 대하여 운을 띄우고는 내향성과 외향성에 관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열어보이고, N 과 S 가 대체 얼마나 다른지 아냐면서는 감각형과 직관형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낼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한다. T 와 F 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감정과 의사소통을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들 속에서 상처입었던 경험들에 대해서 꺼내놓기 시작하고, J 와 P 를 비교하면서 지금까지 만나 온 사람들의 서로 달랐던 생활방식과 행동특성을 돌이켜보는 것이다.
MBTI의 캐리커쳐화된 성격유형을 계기로 털어놓는 사람들의 무수한 말들은, 이제는 더 이상, 그리고 사실은 원래부터, 어떤 심리과학적으로 객관화된 성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MBTI는 역설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 치유력의 핵심은 바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유형론의 도마 위에 올려서, 가장 단순하게 재현하고 가장 매끈하게 끊어내는 ‘치유적 단순화’에 있다. MBTI의 유형론은 사람들의 트라우마적이고 복잡다단한 과거를 지금-여기 나의 이야깃거리에 바로 불러내도록 도와주는 가장 단순화된 틀을 제공한다. 과도할 정도로 단순화된 16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에, MBTI의 렌즈로 타인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사람들은, 특정 누군가에 대해 아직도 갖고 있는 불편한 적대감과…, 그 적대감을 억누르는 슈퍼에고와…, 나 역시 저지른 어느정도의 잘못이 주는 죄책감과…,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한 찝찝한 추측들과 같은… 뒤엉키고 착종된 감정들을, 가장 단순한 유형론의 프레임을 활용하여 ‘저 사람은 성격유형이 저러니까 어쩔 수 없지’, ‘나와 성격유형이 정 반대인 사람이니까 그랬던 것이지’ 라고 생각하고 정리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납득 가능한 구실을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MBTI는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지도 함께하지도 못할 사람임을, 실제로 이해할 수도 함께할 수도 없었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기억 속에 복잡한 잘잘못의 감정과 함께 묶어 둔 사람에게 선언하는 것은, 내 기억을 향해 시도때도없이 대답 불가능한 질문을 쏟아내는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이해의 욕구를 끊어내고 타인을 타인으로 내버려두는 치유적 단절의 출발점이다. 그것이 바로 MBTI 유형론의 역설적인 축복인 것이다. ‘그 사람 성격유형이 나와 너무 달라서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했었지’ 하고 잘라 선언하고 나면, 이젠 더 풀고 싶어도 풀 수 없는 과거의 뒤엉킨 실마리들은 성격유형 차이의 문제였던 것으로 압축되어 정리되는 것이다. 아무도 풀 수 없도록 엉켜있었던 밧줄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그냥 칼로 잘라버린 알렉산더처럼.
물론 그것은 심리과학의 기준에서 당연히 과잉 일반화이고 좋은 해석이 아닐 수 있지만, 인간이 자신과 갈등을 빚었거나 혹은 자신이 숭배하는 모든 ‘중요한 타인’의 성격에 관한 전체 정보에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접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그 복잡한 정보들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타인에 대한 성격검사지가 없어도 나와의 관계 속 또는 기억 속 ‘중요한 타인’을 꺼내어 다루어볼 수 있게 하는 전문심리상담은 언제나 모든 미해결과제들의 가장 좋은 해결책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 하지만 전문상담심리사가 언제나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들을 다 상담장면에서 다루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MBTI는 대부분의 대인관계 고민에 대하여 적용 가능한,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투박할지라도 꺼내어 다루게 하는’ 일종의 심리학적 간이 DIY키트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인듯하다.
우리가 MBTI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단지 유형론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유형론에 내재된 또 하나의 원리인 이분법으로부터도 오는 것이다. 유형론은 최종적으로는 16가지의 유형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는 E↔I · N↔S · T↔F · J↔P 라는 병렬 배치된 4대 이분법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그 이분법은, 우리 마음 속에 딱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널뛰기 판 혹은 시소 혹은 운전석과 보조석에 비유할 수 있는 마음 속의 좁은 쌍대적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나 /그리고/ 누군가’, ‘나 /반대 유형의/ 누군가’, 혹은 ‘나 /같은 유형의/ 누군가’와 같은 식으로, 나와 함께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1인을 초대할 수 있는 마음속의 프레임이 되는 것이다. 한 쪽에 속한 사람이 다른 쪽에 속한 사람을 이해하는 틀이 되어주는 것이다.
마음의 이분법 속에서, 그 이분된 상상의 좌석에 다른 한 사람을 초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는 차이에 관하여 가장 단순명료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잠깐, 그런데 이건 앞의 말과 모순이 아닌가? 나는 앞선 문단에서 이분법이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복잡다단한 차이를 간과하게 하고 묵살하게 하며 그 때문에 우리 정신은 단순무식해질 수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물론 그 비판은 여전히 사실이고, 우리는 언제나 풍부하고 모호한 정보와 체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있어야 하며, 서로의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서 나 ↔ 타인을 둘로 갈라놓는(말 그대로 二分 되는) 차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공통성(또는 一原性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속에서 서로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 공통성은 많은 존재들 그리고 지금 맥락에서는 나와 ‘그 타인’이 사실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때로 정보의 다양성과 풍부함은 우리에게 정신의 과부하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현실에서 나와 타인(들)은 몸으로도, 그리고 의견과 입장에서도 갈라져있으며, 그 갈라짐을 1:1의 관계로 보자면 결국 우리 모두는 어느정도 이분화되어있다. 우리가 이분화되어있다고 느낀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이분화가능한 척도 수준의 논의를 갈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준을 잘 살펴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에 현실적인 기준을 대입해야지, 구체적인 문제에 과도하게 포괄적인 기준을 적용하거나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에 대하여 과도하게 양 당사자의 공통성을 강조한다면, 범죄적인 문제를 ‘만물은 무상한 것이고용 일체 중생은 이미 구원받았슴’ 이라고 말하며 실질적 개입을 무마시키는 부적절한 불교적 접근처럼,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극복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번영(thrive)을 위한 사리분별을 망친다.
그러므로, 나와 타인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어떤 사건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순간 다르다. 또한 동시에, 나와 타인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어떤 사건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순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분법의 프레임을 사실상 일종의 대조표(對照表) 프레임으로 취급하여서, 결국엔 좌항과 우항에 혹은 상단과 하단에 놓고 비교를 해야 한다. 좌항과 우항의 차이에 집중하든 공통점에 집중하든, 우리는 어떻든 이분법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MBTI의 이분법 프레임은, 나를 기준으로 두고 상대방을 저곳에 놓음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뜯어보는 수술대가 되기도 하고, 상대방을 기준으로 두고 나를 이곳에 놓음으로써 내가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MBTI에서 성격의 이분화 척도 그 자체는 앞서 살펴보았듯 결코 정확하지 않지만,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여러가지 상황에서 나와 특정한 타인을 유연하게 불러와서 E↔I · N↔S · T↔F · J↔P의 쌍대 좌석에넣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과 내가 다루지 못했던 고민들을 사후적으로나마 직면할 수 있게 하는 참조틀(reference frame)이 되어 주고, 이러한 참조틀은 사람들을 자신의 기억 속 중요한 인물과의 화해 속에서 치유하게 하는 일종의 치료적 심상적 무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 참조틀 안에서는 쌍대 비교에 따른 차이뿐만아니라 공통성 역시 발견 할 수 있다. 특정한 수준에서 나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확신해내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성격적 동료’들을 마음 속 내 편의 좌석에 들여앉히는 것은, 우리가 두개골 속에 갇힌 홀로된 이 아니라 특정한 성격특성 안에서 함께될 수 있는 외롭지 않은 ‘성격의 공동체’라는 따스한 확신으로 우리 뼈마디를 데운다.
그러므로 MBTI는 그 자체가 심리과학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도움이 절실한 심리학이 없는 분야에 임시변통으로 급조된(jury-rigged) 아마추어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MBTI는 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기억 속 나와 너의 미해결과제에 대한 독백 그러나 ‘서로주체를 향한 독백’을 시작하게 하는 관계의 화두이자 사유의 지평이고, 보다 행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내가 겪은 일과 감정을 서로 나누며 소회를 풀고 갈무리하는 그룹 액티비티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심리학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리학적 시도이고, 과학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조를 향한 활동(activity-to-structure)이다.
종합하자면, 그러므로 나는 MBTI가 단지 과학이 아니라거나(과학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널리 근거이론으로 채택되는 주류 심리과학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것만을 들어서 그저 MBTI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그 자리를 과학적으로 설계된 TCI-RS나 NEO나 MMPI-2-RF 같은 검사도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만은 없겠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만물의 과학적 검증에 대하여 가급적 무한히 엄격해야만 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과학이냐 비과학이냐만을 놓고 따지는 것도 물론 유의미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때로는 비과학적인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세한 사정에 대하여 헤아릴 필요가 있다.
MBTI는 심리과학으로서 적절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과학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MBTI로부터 행복을 얻는가? 이것이 MBTI를 심판하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마음에 품고 가야 하는 질문이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명백히 틀린 것이지만, 전문과학이 도와줄 수 있는 분야와 아마추어리즘이 도와줄 수 있는 분야갸 다름을 헤아린다면. 과학자적 시민들은 조금 더 많은 관용을 MBTI 담론장에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을 심사하기 이전에 우리는 따듯한 질문을 건네 볼 필요가 있다; 그 느슨한 아마추어적 담론 가운데서 사람들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MBTI 이차창작 컨텐츠를 생산해내고 서로의 코드를 알려하고 비교하려 하는가? 그 아마추어적 행위를 통해서 어떤 손실이 있고 어떤 이익이 있는가? 그 손실은 이익에 견주어 용납가능한가? 그것이 만약 과학방법론에 정렬(align)되어있지 않다면, 과학에 얼마나 심각한 훼손을 가하는가? 아니면, 과학방법론에 정렬되어 있지 않기는 하지만 과학방법론을 준수하는 문화를 크게 훼손하는 것은 아닌가? MBTI는 최종적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가? 행복하게 한다면, 어떤 기전으로 행복하게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마취적이거나 마약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찰과 소통을 통해 행복으로 가는 길을 돕는가?
나는 이러한 질문이 단지 MBTI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의 첨탑 바깥에 있는 인간의 시도, 애씀, 기투(企投)에 대하여 건네질 수 있는 따듯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따듯함이 인간에게 절실히 필요하며 인간들간의 일을 반드시 잘 되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따듯함은 단지 미덕이 아니라 사실은 느슨하게 존재하는 성취의 전략이며 인간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언제나, 동료 인간들이 더 행복하고 더 편안해지고 더 홀가분해지기 위해 애쓰는 시도들을 헤아리고 또 헤아려야 한다. 저 사람이 저러한 수단을 통해 얻고자 하는 씨알이 무엇인가? 그 씨알을 나도 원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구할 것이다. 바로 그 보편성 – 더 나은 삶을 향한 추구라는 공통점이 우리 모두의 MBTI다.
인간성이라는 MBTI.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10-05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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