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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Oct 10. 2021

죽음의 위협에 맞서서,
우리는 사회과학자가 되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사회조사방법론의 필요성

‘사회(社會)’는 왜 사회일까


‘사회’란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비교적 낯선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밥 먹듯이 ‘사회적인’, ‘사회의’, ‘사회에서’ 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마치 우리가 밥 먹듯이 타고다니는 자동차가 불과 100년 전에는 거의 – 특히 아시아 대륙에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회’라는 개념도 사실은 보편화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개념이다. ‘사회’라는 단어가 지금의 뉘앙스로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를 좇으면, 어쩌면 지금 살아계시는 최고령자 할머니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해보다도 오래지 않은 일일 지도 모른다. Society로부터 한자로,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맥락이 뚝 끊긴 채 그러나 천연덕스럽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체하는 국어사전에서의 ‘사회’라는 표제어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 이 뉘앙스의 ‘사회’는 근대와 현대의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졌을까?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사회과학적 연구물 가운데 최초로 꼽히는 것은 안확(安廓)의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1923)이다. 또한 직접 사회에 대한 연구를 거론한 저술로는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의 『조선사회제도사(朝鮮社會制度史)』(1923)가 최초이다.[1]올해가 2021년이니, 북한을 포함하여 전체 한국 언어권에게 ‘사회학’은 커녕 ‘사회’라는 개념이 도입된 지도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김태진의 연구[2]에 따르면 ‘사회(社會)’라는 단어 자체는 고대 중국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사(社)는 고대 중국어로 토지 신을 뜻하는데, 사회(社會)란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는 송나라 시대에 와서 지역 자치 조직을 뜻하는 의미가 되었고, 이것은 에도시대의 일본에도 차용되어 동업자 단체, 지연으로 엮인 지역적인 소집단, 종교 조직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을 Society의 한자 대응어로 정착시킨 최초의 사람은 후쿠치 오치(福地櫻痴, 1841~1906)였는데, 이것은 불과 1875년[3]의 일이다.[4]


물론 이것은 수많은 번역자들의 고뇌 안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번역어로서 社會의 등장 이전에 한자어권 사람들은 Society가 가져야 할 여러가지 필연적인 속성이나 혹은 당위적인 속성에서 착안하여, ‘인(仁)’, ‘상생(相生)’, ‘도(道)’, ‘군(群)’과 같은 어휘들을 제안하기도 했다.[5]그러나 이러한 개념들 역시, 우리 동양 전통의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의 맥락 속에서 탄생한 뜻풀이와 뉘앙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것을 가지고 전혀 다른 유럽적 맥락에서 전래된 Society의 참뜻에 딱 맞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세기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도 오늘날 우리가 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듯이, 동양고전에서 차용해온 어휘들에 조금씩 조금씩 당대의 주석을 더하며 뉘앙스를 고쳐 썼다.


가령 1895년 옌푸(嚴復, 1853~1921)는 자신의 저서 『원강』 에서 허버트 스펜서(H.Spencer)의 개념 ‘사회학(Socieology)’을 무리 군(群)에 학문 학(學)을 접한 ‘군학(群學)’으로 번역 소개한다. 그는 군학의 속성으로 니시 아마네(四周, 1829~1897)의 개념을 차용하여 ‘상생상양(相生相養)’과 ‘역사통공(易事通功)’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래,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이겼으면 우리 중 일부는 군학과 졸업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군복지학과가 되었을 것이고….) 상생상양이란 서로 생양(生養)하는 것인데, 생양이란 살릴 생(生)에 기를 양(養)을 합한 것으로서, 간단히 말하면 서로가 서로를 먹여살린다는 의미이다. 김태진 교수는 이것을 영어로 ‘division of labour or profession(노동과 직무를 분담하는 것)’으로 번역한다. ‘사회’의 당위적이고 실질적인 성립조건은 각자의 노동 분업과 상부상조에 있음을, 니시나 옌푸는 이미 19세기 일본과 중국에서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통공역사’ 혹은 ‘역사통공’이란 무엇인가? 그 출전은 놀랍게도 맹자 등문공 하편(滕文公下)인데, 주자는 이를 ‘남의 일을 통하여 서로 일을 교역함을 이른다(謂通人之功而交易其事)’ 라고 주석한다.[6]이것은 19세기 유럽적 (시민)사회의 배경이었던 정치적 독립과 자유로운 상거래라는 정치경제적 배경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고대 라틴어 ‘Societas’가 12세기 프랑스 고어 ‘Societe’가 되고 그것이 다시 1530년대부터 영어 ‘Society’로 정착되는 등 장구한 역사언어학적 과정에서 이 단어 자체와 강하게 결착된 유럽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서는, 노동의 분업과 시장경제의 등장 그리고 그 등장의 조건인 평등주의 사회계약의 정신문화적 배경을 동양고전에서 따온 신조어를 만들어서 구구절절 부연설명으로 넣는 한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주석해야만 함을 알았던 것이다. 


물론 당대 유럽의 언어라고 해서 완성된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언어의 변천은 예외 없이 실시간으로 일어난다. 유럽 역시 늘 정치적 격변기에 있었고, 그곳에서 낱말 ‘Society’ 역시 한 세기마다 의미가 약간씩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언어의 번역불가능성’을 최대한 뚫고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근대적 생활양식이 정착되면서 굳어지게 된 당대 최신 개념 ‘Society’를 한자로 번역해내려던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의 언어학적 고군분투는 놀라운 업적이다. 오늘날 우리 한자어권 이용자들이 ‘Society’의 본디 뜻과 뉘앙스 그대로를 오롯이 살아있는 상태로 편하게 ‘사회’라고 부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동아시아 한자공동체 지식인들의 집요한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社會)’를 사회라고 부르면 진짜 사회가 날 돌아볼까


하지만 우리가 ‘사회’를 ‘사회’라고 부르게 된 배경은, 이것으로 충분한가? 이제 우리는 그냥 ‘아, 사회라는 것은 유럽의 근대적 모습을 모델로 한 상호의존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이 존재하는 인간 집합이겠거니’ 라고 생각하면 그만인가? 그렇게 하면, 절대로, 지금 이 시점에서 ‘사회’가 가지는 의미를 또다른 의미로 자꾸 변화시키는 권력자들이나 대중적인 움직임을 절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의 참뜻에 관하여, 어휘의 쓰임에 관하여, 절대 질문을 멈추지 않고 만족할 줄을 몰라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격언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담론이 자꾸 우리 머릿속 ‘언어의 냉장고’에 손을 쑥 집어넣어서 변질시킨 말의 힘에 생각을 지배당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적 민주주의 원체험 이후, 로마, 영국 공화정, 프랑스 민주정, 여러차례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쳐서 탄생한, 유럽이 인류에게 선물한 국제표준 개념 ‘Society’. 그리고 그것을 고마운 19~20세기 우리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딱 적당하게 ‘사회’로 번역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리가 ‘사회’라는 말을 마음 놓고 쓰기에 충분한 조건이 아닌데, 그 까닭은 앞서 니시와 옌푸가 ‘사회’를 번역할 때 그것의 유럽적 전통을 살펴서 그 속성 가운데 동양철학의 가르침과 통하는 언어를 차용하여서 주석하였던 것처럼,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문학적이며 당위적’이라는 데에 있다. 문학적이며 당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개념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당위적으로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선언이 내려졌지만(예를 들면 ‘사회는 상부상조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다’), 그 개념이 수학적이고 조작적(Operationaly)으로 정의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언급한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철학자로서 이렇게 말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멋드러진 말이 사실은 진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이 단지 언어에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물론 언어도 우리의 인지를 구성하는 주요한 참조틀이기는 하다. 하지만 언어는 일련의 연관된 신경 발화를 격발하는 기호나 상징 등의 자극물로 작용할 뿐, 실제로 언어가 가리키는(표상하는) 대상에 관하여 우리 정신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단순한 언어적 도상의 나열이 아니라 기억, 감각, 감정, 수(數)정보 등 수많은 포맷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인지(cognition)인 것이다. 신경학적으로도 우리 뇌는 특정한 인지의 대상에 대하여 특정한 뉴런만이 그것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각을 서로 연합된 수많은 뉴런이 분산저장하고 있다가 그것이 필요할 때 함께 발화해서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회상(recall)이나 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사회복지학이나 사회학 등 학문을 하는 장면에 있어서 우리가 학문적 책무성을 가지고 ‘사회’에 대하여 말할때는, 단지 ‘사회’가 어떠어떠한 것으로 정의되었음에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언어적 정의는, 언어적 정의라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불충분하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이 지점에 관하여 생각할 때가 되면, 대학교 학부 수업에서 학부생들이 PPT 주제발표를 할 때 자신이 맡은 주제에 대하여 ‘두산백과’, ‘네이버 백과사전’ 따위에서 개념정의를 인용해 오는 학생들 생각이 떠오르면 해묵은 분노를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수많은 학부생들이 근거자료랍시고 긁어오는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를 보았다. 그나마 교재에 명시적으로 제공된 개념정의조차도 제멋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프레젠테이션 온 바닥에 자기 하고싶은 말을 해놓는다.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따로 있겠는가? 무너져가는 이 나라 대학교육의 수준을 보면 복장이 터지고 목놓아 통곡이 나온다. 오호 통재라, 도대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언어와 현실의 괴리: 진실은 숫자 속에 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언어적 개념설명이 존재하면 그게 진짜 실현된 것인 줄로 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개념설명이 있으면 그 말대로 진짜 존재하는 줄 알고, 한국사회가 성평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개념설명이 있으면 그 말대로 진짜 성평등이 존재한다는 줄 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언어적 정의란 단지 말로만 선언하는 사전적인 정의일 뿐이며, 그 사전적인 정의가 실제 세계를 반영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개념어들과 그 개념어들을 조금 더 풀이해놓은 대부분 국어사전 표제어들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절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특히 문학적이고 이념적인 당위와 선언문들 실제 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왜곡하고 은폐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국가(國家)에 대하여 얼마나 아름다운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 만세! 오, 그래서 우리 아름다운 국가 대한민국이라는 게 그래서 실제로 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는 D.P.[7]이고 간접적으로는 오징어 게임[8] 아닌가? 대통령이 눈을 부릅뜨고 일제의 강제징용-강제징병을 비판하는 동안 국방부와 병무청은 남자들을 강제징용-강제징병하고, 외교부가 일제 성노예(일본군위안부)를 비난하는 동안 교육부는 한국군위안부와 ‘몽키 하우스’의 역사[9]는 은폐하고, 이제 자국민을 성매매집결지로 모집하지는 눈치 보이니까 경제 격차가 큰 동남아와 동유럽에서 인신매매하는 것을 방관하고[10], 사회 인프라는 서울과 경기도에만 이기적으로 몰아줘가지고는 시골에 농사짓는 청장년층 혼인률 떨어지니까 지자체가 매매혼 보조금까지 줘가면서 어린 신부들 공급[11]하는 것 아닌가? 국민소득 3만불 달성이라고? 한 해에 880명이 산업재해로 즉사하고 1,180명이 산업재해로 질병에 걸려 죽으며[12] 13,000명이 자살[13]한다는 것도 끼워서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시체들은 식어가는데 애국가 부르면 목젖이 뜨거워지는가?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허구한 날 수학과 통계의 눈을 가리고는, 헌법 제1조 따위나 읽으면서 ‘오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민주 공화국이야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대’ 라고 자위하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여기가 인민주권의 공화정이 되고 우리 인민이 그 공화주의 원칙에 따라서 주권을 실현하게 되는가? 이 나라 국방부장관이 6월과[14] 8월에[15] 병영부조리로 자살한 병사들의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그렇게 죽은 군인에 대해 7월 청문회에서 사과도 해놓고선, 넷플릭스 D.P.의 병영부조리가 ‘지금의 병영현실과는 좀 다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린 9월의 청문회[16] 바로 그 다음날에는 해군 일병의 자살 소식이 보도되었다.[17]




‘사회(社會)’개념의 수학적 풍부화와 통계를 통한 ‘사회적인 것’의 출현


이게 진실이다. 이게 수학과 통계를 통해 밝혀지는 개념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지금 예시로 다루고 있는 이 “국가”라는 말뜻이 국어대사전에 어떠하게 정의되어 있고, 교과서에 당위적으로 무엇을 한다고 적혀 있고 어떤 취지와 이념으로 세워졌다고 광고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사망자의 바디카운트에 있고, 진실은 11,000명의 노숙인 인구에 있고[18], 정확한 숫자를 추정하기마저 불가능에 가까운 가출청소년 11만 2천 여명의 고통 속에 진실은 있다.[19]사회를 정의한다고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통계로 밝혀진 사실 그 자체가 ‘사회적 진실’이고, 그런 것들이야말로 사회적 진실의 범주에 최우선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요소이다. 


지금 우리는 정확하게는 두 층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가지는 개념 자체의 근본적 복합성에 관한 논의이고, 다른 한가지는 그것의 사회학적인(그리고 사회복지학적인) 응용인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이다. 아까 우리는 고전적 언어철학의 한계와 신경과학의 최신 설명을 대조하면서, 이름과 언어로는 그 대상의 전체 속성을 절대 인지적으로 종합하여 머릿속에 움켜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언어는 진실의 부분적인 포맷(format)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법칙이자 그것을 번역하는 최적의 수단인 수학에도 밀리는 열등한 포맷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수이며, 그것에 대한 진술은 수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뇌의 원리에 있어서도 단순히 이름이나 개념이나 언어를 통해서만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종합해서 사유하며, 더군다나 대상에 대한 더 정밀한 통찰과 인지를 얻기 위하여서는 결국 그 대상의 수학적 속성을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두뇌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과 존재 일반은, 이처럼 수에 의하여 진실과 가까워지고 진실성을 보증받게 된다. 자 그렇다면 원론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는 조금 더 이 글의 원래 주제인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서, 사회학과 사회복지학에 통계 및 사회조사방법론이 어떤 경로로 적용되는지 의논해 보자.




‘사회적인 것’의 발견: 수의 렌즈를 통하여


우리에게 사회적인 현실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이것은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는 앞서, 현실이 단순히 언어적 인지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주로 수적 인지에 대하여 파악되고 검증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일반적 의미에서의 ‘현실’이 아닌, ‘사회적 현실’ 그리고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현실’이라고 할 때, 무언가 조금 엄중하고 피할 수 없는 중대차한 골칫거리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먹고살 만 하고 건강하고 행복하다면 굳이 현실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아도 된다. 월-E에 나오는 생명유지장치에 몸을 싣고 우주로 떠나버린 인류처럼, 무한한 안전함 속에서 가상현실기계에 머리를 들이박거나 마약을 하면서 환상만 즐길 수 있다면… 우리가 언젠가는 직면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기다리는 ‘실재의 사막’으로 내려올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사실 일상생활 그리고 사회학에서 어떠어떤 것의 현실이란, 눈앞에 닥쳐온 위기에 관한 담론들이다. 우리의 현실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층위에서 시작한다. 내 개인의 수준에서, 모든 ‘현실’은 그야말로 분명하고 선명하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선명한 현실적인 실체로 느끼며, 지금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순간을 현실로 인식하며, 우리가 물리적으로 가진 것과 전자적으로 혹은 장부상에 가진 것들을 현실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심지어 지금 당장 존재하지도 않고 단지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질병이나 이별에 대한 위험성조차 ‘현실’이라고 지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개인적 현실’만큼이나 선명하게 ‘사회적 현실’을 지각한 적이 있었던가? 예를 들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를 걸려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한국 인구는 5천만명이고, 2021년 10월 기준으로 한국 확진자는 33만 명 정도 되기 때문에, 아직 한국인 가운데 99.34%는 코로나에 감염된 사실이 없다. 코로나가 자신에게 ‘개인적 현실’로 다가온 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맙게도) 코로나 상황이 여전히 현실이라고 느낀다. 물론 보건당국의 방역지침에 따라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지침을 따라야 하기에, 그에 따른 불편함 자체도 내 삶에 훅 들어오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쉽게 감염시키고, 그 중에 면역이 약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지, 우리 사회가 코로나에 얼마나 많이 위협받고 있고, 대중교통이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코로나19에 걸려본 적이 없는 거의 모든 사람조차도!


“우리 사회는 코로나19의 위험에 빠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현실’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 보고 듣고 만진 것만을 믿는 대다수 사람의 직관을 거슬러오르는, 매우 신기한 현상이다. 우리는 어떻게 내가 직접 겪어보지도 않았고, 아마 앞으로 겪어 볼 이유도 없을 것이고, 겪은 사람을 본 적도 드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라는 증상을 우리 사회에 ‘실제(實際, Real)’로 존재하는 ‘실재(實在, Entity)’라고 파악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그 감염증이 특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사회 공동이 그것에 대해 특정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큰일나게 된다는 것을 ‘알까?’ 즉, 우리는 어떻게 개인적이고 직접적 경험 없이 사회적이고 개념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통계와 사회조사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수학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수학의 눈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보고된 어떤 체험(‘개인적 현실’)이 단지 일화적 증거(anecdotal evidence)나 거짓말인지 아니면 반복적으로 어떤 패턴을 가지고 보고되는 특정한 법칙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우주의 수적인 진리를 관찰하는 방법인 양적 사회조사방법론과 통계처리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 모두 또는 사회의 대부분 사람과 연루된 전역적인(glabal) 사건/효과/변동치를 잡아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사회 전체에게 적용되는 한, 우리는 그것에 공동으로 이름붙이고, 직면하고, 함께 공통의 대응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단지 실용적인 것을 넘어선 진리와 접촉할 수도 있다! 수학과 통계방법론을 통해 우리는 거의 모든 자연에 대한 진실에 접촉할 수 있으며, 비참한 사람들을 구하고, 부당이익을 받는 사람들에게 빈곤한 사람들의 몫을 요구할 수 있고, 미래 인류의 삶을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어줄 수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잘 사용하여서 진실된 통계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태풍의 비유: 왜 사회복지와 사회과학에 조사방법론이 필요한가?


세계기상기구(WMO) 태풍위원회는 태풍에 반복적으로 피해를 보는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매년 여름에 적도에서 발생해서 북반구로 올라오는 태풍에 이름을 붙이고 함께 대비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태풍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있는가? 태풍은 분명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태풍을 직접 본 사람은 (우주비행사를 제외하면) 없다. 태풍은 그 크기가 거의 한반도를 다 덮을 만큼 크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우리 눈에는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아니고 그저 흐린 날씨와 비바람으로 느껴질 뿐이다. 태풍의 최대 풍속 지대에 있는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더라도, 그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이 보도되지 않는다면 ‘비가 많이 오네’ 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호 감지 이론이다. 또한 정보 교환 이론이다.


오직 태풍 사망자와 태풍에 따른 재산과 가옥 피해를 추산하는 통계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히 태풍을 볼 수 없다. 그저 매 여름 반복되는 좀 쎈 장마를 느끼게 될 뿐이다. 그러다가 운 나쁘게 최대 풍속 지대에 들게 되면… 그대로 죽거나 다치는 것이다. 아무도 이런 복불복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그게 인간들이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만든 까닭이고, 물려받은 기존의 사회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최대한 개혁해보려고 애쓰는 이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지만 슬프게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단단한 태풍이라는 ‘사회적 현실’에 우리사회가 공동으로 맞서서 재난대응시스템을 준비하고 최대 풍속 지대 사람들에게 미리 경고를 보내주기 위해서는, 태풍이 발생할 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의견을 자세하고 심층적으로 물어보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과학적인 사회조사 그리고 사회복지조사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사회조사 또는 사회복지조사란 어떻게 하는 것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태풍 재난대비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설문조사를 하는 사회복지사가 되어, 예시를 통해 알아보자.


지역에 따른 태풍피해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지역 사람들의 현황을 균일하게 측정해야 한다.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등 기존에 설정된 군집에 따라 동일한 수로 태풍피해설문지를 돌리는 것을 우리는  군집표집(Cluster Sampling)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른 피해만 집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신체정신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피해평가가 필요한다. 건장한 성인뿐만 아니라 유모차나 휠체어 사용자가 태풍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신의 경험을 보고하는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다소 임의적일지라도(육체적 약자성을 요인분석 돌리기는 힘드니까) 눈에 보이는 명백한 불편함이나 어려움에 대해서 미리 정해진 범주가 있다면, 가령, 우리가 육체적 배려의 기준으로 보통 성인-아동-노약자-휠체어/유모차사용자-임산부 등 5개 범주를 쓰고 있다면, 그것이 물리적인 위협인 태풍피해의 대응에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태풍피해설문지를 돌릴 때에도 각각의 개별 집단에서 무작위로 대표자를 선출하여 설문을 시행한다. 그러면 특성을 가진 각 집단 가운데 운이 없어서 누락된 집단 없이 대표성이 유지되는데, 이것을 층화표집(stratified sampling)이라고 한다. 또한 전체 인구에서 무작위로 태풍피해 설문자를 추첨할 때, 워낙에 인구가 적은 소수자는 확률적으로 모두 탈락할 가능성이 크므로, 예를 들면 한국 거주자 전체에게 10만개의 설문지를 나눠주기보다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9:1 이라고 할 때, 인구비율과 설문지 비율을 맞추어서 한국인에게 9만개의 설문지를 줄 때 외국인에게도 1만개의 설문지를 주는 방식으로 소수자의 대표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을 비율표집(proportional sapmling) 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출청소년 등 실제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다른 가출청소년 친구를 소개받는 식으로 의견을 수렴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눈덩이 표집(snowball sampling)이라고 한다. (누누 아님)




왜 사회과학적 조사방법론을 철저 엄수해야 하는가?


과학적 통계방법론을 시행하는 한, 우리는 이처럼 누락되는 의견들을 최소화하고 각각의 삶의 좌석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찾아가서 의견을 물을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배려의 윤리라거나 경청의 미덕 같은 것을 넘어서, 우리 보이지 않는 전체 세계를 반영하는 정보의 그물망(grid) 한 땀 한 땀을 놓치지 않기 위한 생존의 방책이기도 하다. 만약에 우리가 사회복지 및 사회과학 조사방법론을 지키지 않고 통계수집을 대충 했다면, 만약에 예를 들어서 인터넷 팝업으로 작게 ‘이 인터넷공지를 볼 수 있는 사람만 클릭해서 구글 아이디로 로그인하셔서 태풍피해설문을 작성해주세요’ 라고 부탁했다면 노인과 정보취약계층이 요구하는 태풍 안전 조치는 전혀 반영되지 않을 것이다. 


그 부당한 누락은 그 분들의 생명을 위협할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또한, 우리는 노인 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영원히 모르게 될 수도 있다. 전자는 윤리와 인간성의 측면에서 무시무시한 일이며, 후자는 진리와 정보의 측면에서 무시무시한 일이다. 우리의 목적이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에 있는 한, 우리는 사회개발과 사회복지를 위하여 사회조사를 잘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단지 지금-여기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만 사회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복지조사는 도미노피자 무슨 맛으로 시킬지 물어보는 점심메뉴 설문 같은 게 아니다. 그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지 그 자체다.


내가 앞서 예로 들었던, 노인의 정보접근성 저하와 그에 따른 피드백 누락과 그것이 초래한 사망이 우리의 윤리와 인간성을 훼손하는 동시에 진리와 정보도 훼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면, 만약에 우리가 사회조사를 제대로 안 해서 사회복지대상자들이 사회복지와 사회학적 개입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서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관찰하여 제공하는 정보 또한 영원히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센서이기도 하다. 그 센서에게서 우리 모두의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정보가 나온다. 그 정보는 개인적 파국에 대한 사례보고로서 파괴된 사회를 복구시키는 단서이기도 하지만, 그 정보값 자체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태풍, 즉, ‘사회’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거대한 정신적 모델을 구축하게 하는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 현실이 공동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 개인적 현실에 대한 보고가 최대한 많고 상세하고 자세해야 한다. 또한 시공간에 따라 체계적이고 수집되고 아카이빙되어야 한다. 그 정보의 망이 촘촘할수록, 우리는 더욱 해상도 높은 ‘사회적 현실’의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그래야지만 우리 개개인이 원자화되어가지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태풍에 치여 각개격파 당하지 않도록 사회학의 공유되는 비전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다. 우리를 실질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문제라면, 그리고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사회과학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회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통계가 곧 사회과학이고, 사회과학적 고민과 개입은 모두 통계적인 근거와 방식과 개입과 평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과학이 곧 통계다. 통계가 없는 사회학은 우표 수집에 불과하다.




뒤르켐이 사회학의 아버지가 된 까닭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의미의 사회학(Socieology)를 창시한, 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 1858~1917)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통계적 관점을 통해 사회학의 정신을 구축해갔다. 그는 아노미(Anomie) 이론으로 유명하지만, 내 생각에 아노미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지배적 규범이 약화되고 대안적 규범이 등장하지 않은 상황 자체는 어디서나 흔히 있는 일이고, 아노미의 개념이 그 모든 상황을 포괄한다면 그것은 범주로서의 의미가 없다. 마치 법에 저촉되는 상황을 ‘불법 상황’이라고 명명해봤자 너무 광범위해서 별 쓸모가 없는 것처럼. 아노미라는 개념의 유효성은 시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사회적 의미상실 또는 무규범 상태’라는 아노미의 조작적 정의 역시 오늘날의 진보된 기준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조야한 것이다. 아노미 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후보를 찾아보면 수천가지도 더 있을 것이다.


뒤르켐이 정말로 대단한 것은 아노미 이론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사회통계의 눈으로 아노미라는 어떠한 상태를 규정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그것이 단순히 집단우울증(생물학)이나 경제침체(경제학)적인 원인이 아니라 그와 별개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회과학 방법론을 최초로 정립하였다. 뒤르켐은 『자살론』(1897)에서 ‘경제 위기가 자살을 부추긴다’라는 기존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당사자에게 인터뷰 하나 설문지 하나 돌리지 않고 오직 통계만을 인용한다. 


뒤르켐은 1873년 비엔나 금융위기와 1882년 파리 금융위기 전후의 자살 통계를 가지고 ‘경제 위기가 자살을 촉발한다’ 라는 가설을 하나 만든 뒤, 이렇게 말한다. “경제 위기 이후에 자살자가 증가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생활이 힘들어질수록 자살이 증가한다면, 삶이 수월할수록 자살은 감소하겠네?” 그리고 그는 곧장 프로이센에서 밀 가격이 최저치를 기록한 1850~1853년 사이에 자살자가 계속 증가하였다는 반례를 들고 온다.[20]그는 동일한 현상을 바이에른의 호밀값에서도, 유럽 전역의 밀값에서도 찾는다.[21]식량 가격이 하락하는데 자살률은 증가한 것이다. 그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더 광범위하게 탐색한다; 이탈리아의 로마 정복과 산업근대화, 무역의 성장, 임금인상, 식비 인하, GDP 증대…. 하지만 동일한 시기 이탈리아 자살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 현상은 독일을 갓 통일하여 부강해진 프로이센에서도,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유치한 프랑스에서도 발견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왜 가난도 출세도 똑같이 사람들을 자살 앞에 흔들리게 하는가? 뒤르켐은 이렇게 말한다. “산업이나 금융 위기가 자살을 증가시킨다면, 그것은 그런 위기가 빈곤을 초래하기 때문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번영도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비이기 때문이다. 즉 집단적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모든 평형 상실은 그것이 비록 수입을 증가시키고 일반적인 활력을 증대시킨다고 할지라도 자살의 자극제가 된다. 사회 질서가 심각하게 재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갑작스러운 성장이든 예기치 않은 재난이든 간에 사람들이 자살하기 쉽다.”[22]


그는 부가 행복을, 빈곤이 불행을 가져온다는 고전적인 생물학적 상식에서 벗어나서, 통계의 눈을 통해 ‘사회적 효과’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르켐은 인각 개개인의 욕구는 무한할 뿐만 아니라 이 무한한 욕구를 통제하지 않는다면 괴로움만 될 뿐이라고 파악했는데, 이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압박 뿐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하는 마음은 물리적으로 체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자신이 기꺼이 수긍하는 권위 있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면 스스로 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상당히 불교적이다) 그래서 뒤르켐은 인간에게 자기조절에 대한 진심어린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개인보다 우월한 정신적 힘과 개인이 존중하는 권위’를 가진[23] 사회적 규제라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규제가 없어져서 인간의 흥분과 욕망이 한계를 잃고 폭주하는 상황을 ‘아노미’ 상황으로 규정했다.


뒤르켐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학적 연구방법의 고전적 전범을 남겼다. 그는 사회통계로부터 기존의 이론이 매끄럽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모순점을 발견하고, 그 모순 앞에서 겁먹지 않고 제3의 요인이 개입했다는 가설을 수립했으며,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통계적 증거들을 모았다. 바로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현대 양적 사회과학 방법론의 시초인 『자살론』이다. 이처럼 무질서하게 창발하는 것처럼 보였던 사회현상을 대량으로 통계처리함으로써 특정한 패턴을 발견한 것. 그리고 그게 단지 자연현상이나 생리현상이 아니고 개인 바깥에서 개인을 좌지우지하는 ‘사회적 힘’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 개인은 자신을 훈육하고 교육하고 습관화시키는 사회적 존재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연약한 존임을 최초로 선언한 것. 이것이 뒤르켐이 사회사상사에 있어서 사회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립한 최초의 학자로 불리는 까닭이며, 사회조사방법론에 있어서 단순통계를 넘어 통계와 통계 사이에 숨은 의미와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최초의 양적 사회과학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까닭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남기 위해 사회학의 횃불을 들어


그렇다면, 사회학과 사회복지학의 책무를 수행하는 우리 역시 통계 및 조사방법론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복지사가 된다는 것은 통계를 잘 다룬다는 것이며, 좋은 사회학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통계학자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COVID-19 사태에서 우리 사회복지사들과 사회학자가 마주한 고통스러운 과제를 짚으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자. 


지난해 2020년, 우리 한국에서 영양결핍으로 345명이 사망했다.[24]운수사고 같은 것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이 대명천지에 영양결핍으로 345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것이 IMF 외환위기 이후 최다 사망자라고는 하지만, IMF시대의 2000년대와 KOSPI 3000을 찍은 2020년대 한국은 비교조차 불가능한 전혀 다른 나라임을 감안했을 때, 이것은 재앙적인 지표이다. 코로나19로 직장은 축소되고, 무료급식소 등은 운영을 중단했으며, 자선 후원도 줄고, 사회적 만남도 뜸해졌다. 사회복지사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탓에 방문상담과 아웃리치에 장해를 겪고 있다. 임금의 양극화와 가족육성정책의 실패로 1인가구는 많아지고 있다. 사회복지시설과 청소년시설은 중앙정부의 완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삐걱거리며 임시변통으로 사회복지사들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고 있다. 기관은 전히 모금사업과 정부지원사업과 지자체사업과 기업후원을 오가며 눈에 띄는 한 두 사람, 한 두 청소년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데, 자본시장에 대책없는 유동성은 풀리고 부동산값은 서민 중 누구도 발 뻗고 잘 수 없도록 폭등하고 있다.


이 모든… 사회적 비참이 이어진 악마적 사슬의 가장 마지막 고리에 걸려 있던 사람들이… 죄 없는 사람들이… 작년에만 350명 돌아가신 것이다. 지병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고, 영양실조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조사방법론과 사회학과 사회복지의 힘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이 지식과 이론에 접근하는 것이, 나뭇꾼이 나무를 베기 전에 자신의 도끼를 가는 것이 맞기를 간절히 기원할 뿐이다. 이미 다 벼려진 도끼를 헛되게 가는 것이 아니길,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지금 당장의 일이 있음에도 쓸모없이 학문만 갈고닦는 것이 아니길, 이 사회학과 사회복지학의 길이 진짜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회연구의 어제와 오늘」, 『사회』, ()

[2] 2017, 「근대 일본과 중국의 'society' 번역: 전통적 개념 속에서의 '사회적인 것'의 상상」, 『개념과 소통』 

[3] ‘사회’의 최초 번역이 1875년이라는 것은 얼마나 최근의 일일까? 

F.엥겔스 『공산당 선언』(1848), K.맑스 『자본론』(1867), J.C.맥스웰 『전자기론』(1873).

[4] 같은 책, Page. 181

[5] 같은 책, Page 210

[6] 같은 책, Page 192

[7] 한준희 감독&김보통 원작, D.P., 넷플릭스 

[8] 황동혁 감독,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9] 정성욱, 기지촌 여성들 '몽키하우스'에 갇히다, 중부일보, 

[10] 국가인권위원회, 예술흥행비자 소지 이주민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4, 

[11] 이하영, [단독] 최대 1200만원… ‘국제 매매혼’ 부추기는 지자체 

[12] 고용노동부, 2020. 12월말 산업재해 발생현황, 2021 

[13]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데이터포털 

[14] 신준희, 장례식장 도착한 서욱 국방장관, 연합뉴스 

[15] 홍다영, ‘해군 성추행’ 피해자 빈소 마련… 서욱 국방장관 조문, 조선비즈 

[16] 박은경, 서욱 국방장관 “‘D.P.’와 지금의 병영 현실은 좀 달라”, 경향신문 

[17] 김지훈, [단독]文 '현충일 조문' 뒤에도... 軍 최소10명 스스로 생 마감, the300 

[18] 사회보장위원회, 노숙인 통계 

[19] 황여정&이정민, 위기청소년 현황 및 실태조사 기초연구,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0 

[20] 에밀 뒤르켐, 자살론, Page. 309

[21] 같은 책, Page. 310

[22] 같은 책, Page. 314

[23] 같은 책, Page. 319

[24] 조건희&전혜진, [단독]영양실조로 사망 작년 345명… 외환위기후 최다 



읽어주셔셔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10-10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Shubham Dhag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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