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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Oct 12. 2021

왜 제도주의 사회복지야말로
진정한 사회복지인가?

정부는 할일이 없으면 문을 닫던가, 문을 열었으면 할 일을 해야 한다.

사회복지란 무엇인가 – 아니 그 전에,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복지란 무엇인가?” 결국 모든 질문과 모든 대답은 이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사회복지가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복지에 대해서 우리가 정의한다는 것은 사회복지의 범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사회복지의 범위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하는 것이 마땅하냐는 것부터가 실은 논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회복지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공적 대응이다.’[1]그러나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이 ‘사회’라는 범주가 무엇인지, ‘사회적 위험’의 범주가 무엇인지, ‘공적 대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심지어 ‘사회적’이라는 속성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조차 의견일치가 되어 있지 않다. 그 불일치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사회복지와 사회학에서 자주 다루게 되는 서로 반대편에 위치한 두 정치경제적 입장인 ‘잔여주의’와 ‘제도주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둘의 차이는 거창한 데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라는 범주를 상정하고, 그 범주를 통하여 어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는 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우파의 기수이자 지금까지도 극우세력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전(前) 영국 총리는, 1987년 9월 23일 영국 잡지 <Woman's Own>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저 큰일났어요, 정부 일자리가 필요해요!’ ‘저 큰일났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보조금이 필요해요!’ ‘저는 지금 길거리에 내앉았어요, 정부는 나한테 집을 줘야 해요!’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본인 문제를 사회에 전가합니다. 그런데 사회라는 게 대체 누굽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각각의 개인이 있고 가족이 있는것이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하지도 못하는 것을 정부가 해줄 수는 없습니다! (…) ‘사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2][3]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이러한 반응은 물론 과격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공동체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문제에 대하여 사회적인 해결책을 찾아온 수많은 사회과학자들과 사회복지사들에게 무례하고 모욕적인 것이다. 하지만 대처의 저 상징적인 발언은 또한 ‘사회’라는 범주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거의 대부분 거부하는 ‘잔여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샘플이기도 하다.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잔여주의자들


잔여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는 지금까지 단순히 경제적 좌파와 경제적 우파들간의 갈등으로만 이해되어 왔으며,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 여러 매체에서도 그렇게 재현되어 왔다. 적어도 21세기 초반까지의 ‘이념 대결’이란, 마르크스주의를 선봉으로 한 좌파와 신자유주의를 선봉으로 한 우파가 서로 맞붙어서, 누구를 협동조합장에 앉히고 누구를 회장에 앉힐지를 가지고 다투는 일종의 ‘공장 점령하기 게임’과 다를 바 없이 이해되어오곤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을 단순히 생산수단을 누가 점령하느냐로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이념과 철학의 차이를 ‘경제화’시키는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의 패착이다. 


좌파와 우파와 동치될 수 있는 제도주의자들과 잔여주의자들의 이념 차이는 결코 단순히 ‘노동자에게 공장을 넘길 것이냐 말 것이냐’에서 시작하지도 않고, 거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그 둘 사이에는 생산수단을 함께 쓰자거나 아니면 자본을 개인의 소유로 내버려두자는 주장보다 훨씬 더 깊디깊은 강이 흐르고 있으며, 적어도 제도주의자들은 그 강 너머에 존재하는, 잔여주의자들 머릿속의 충격적인 진실에 대해서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주의자들은 잔여주의자들의 그 진실을 상상도 못한 채 ‘이기적이다, 탐욕적이다’ 라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 잔여주의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대체적으로 예의바르고, 깨끗하며, 무엇보다 겉보기에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워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잔여주의자들은 실제 정치적 의사결정의 현장에서 언제나 극도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의사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대체적으로 마음속에 ‘나만 잘 살겠다’ 라는 이기심이나 ‘모든 것을 빼앗아서 나만을 배불리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제도주의자들의 짐작과 달리 잔여주의자들은 왜 자본주의의 악마이거나 탐욕의 확신범이 아닌가? 제도주의자들이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진실은 이것이다 : 잔여주의자들의 정신에는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물 안 개구리, 잔여주의자


잔여주의자들의 세계관 속에서는 ‘공동의 일을 공동으로’, ‘개인적인 일이도 함께 도울 수 있다면 함께’, ‘모든 개인은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일정한 몫이 있다’ 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어린시절부터의 교육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자신에게 사회의 작은 축소판을 보여주었던 주변 양육자나 어른이나 형제자매의 행동방식을 통해서 학습한 결과일 것이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잔여주의자들은 ‘개인 각자가 알아서 잘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세상’ 이라는 사회에 대한 마음 속의 모델을 세운 것이고, 그 모델을 잣대로 삼아서 세상을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시야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자기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집안의 풍족한 지원을 받으면서 유치원 시절부터 영어유치원과 영재교육을 받고, 과학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창생활을 보낸 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과외 알바로 ‘자립’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사람은, ‘누구나 공부 열심히 해서 알바 하면 충분히 먹고 살 만한 세상이야. 뭐가 모자라서 사회에 도움을 바라는 거지? 게으르게만 살지 않으면 잘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유복한 중산층 이상의 환경에서 자랐을지라도 여러 활동을 통해 세상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저임금 · 저개발 · 빈곤 · 불운이 휩쓸고 간 지역의 현실을 마주한다면, 적어도 책과 신문을 통해서 자신과 같은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며 적어도 타인의 불행을 타인의 책임으로 저주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타인에 대한 관심도, 입장 바꿔서 생각할 사유의 능력도,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마음의 능력도 없는 자들에게서 발생한다. 이들은 빈민이나 취약계층의 처지가 되어 보지도 않았고, 그러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제한된 정보와 세계관 속에서 그러나 나름대로 얼마나 힘들게 고군분투해왔는지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시민의 삶을 멋대로 판단하며, 공적인 세계(직업 · 사회활동의 영역)와 사적인 세계(성실성 · 인격과 같은 내면의 영역)를 통틀어 함부로 모욕하고 그들이 처한 비참과 고통에 관하여 단 한마디도 도움 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형식적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 “물론 굶어죽는 사람들은 우리가 책임져야지.” 하지만 그 말 뒤의 괄호 속에는 이런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진짜로 굶어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게을러서 일을 하러 나가지 않을 거야.’ 그래서 잔여주의는 정말로 노동시장에서 탈락하거나 노동이 불가능한, ‘잔여’로 남은 사람들에게만 국한하여서 최소화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며, 그마저도 입에 겨우 풀칠하고 영양실조에 걸릴 수준으로 최소한만 공급한다. 불과 작년인 2020년, 영양실조와 영양결핍으로 무려 345명에 달하는 우리 시민들이 사망[4]했다는 사실이, 잔여주의와 노동 조건부 사회복지(제3의길)를 채택한 한국 사회복지 정책기조의 살인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양자택일이 가능한 문제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잔여주의’와 ‘제도주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서 “당신은 둘 중에 어디에 동의하십니까?” 라고 묻는 상황을 마주해 왔다. 물론 대학 수업의 교수님들께서,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주기 위하여 언제나 이렇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공하는 상황도 존재한다. 그러나 훨씬 많은 상황에서, 나는 이러한 질문을 일종의 ‘거짓 양자택일의 함정’으로 마주쳤다. 거짓 양자택일을 권하는 사람들은 마치 ‘잔여주의’와 ‘제도주의’가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대로 선택해도 되는 개인의 취향에 달린 일이고, 두 선택지가 가지는 가치와 무게는 동등하며, 저것들 중에 어느 것을 고르든지 각각 나름대로 괜찮은 멋진 신세게가 펼쳐질 것이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잔여주의 사회복지체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전진하게 될까? 모든 개인의 생존을 각 개인 스스로의 산업생산력에만 맡겨둔다면, 한국은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하는 자수성가인들의 사회’가 될까?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사회가 될 것이다; 


첫째. 자녀들에게 버림받은 노인들은 적절한 사회복지서비스를 받지 못해 아사하거나 고독사할 것이다. 잔여주의는 근본적으로 개인이 스스로를 부양해야 한다고 간주하며, 이는 당연히 노동생산성이 하락하는 노년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젊어서부터 주식투자 하지 않았으면 나이 들어서 굶고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둘째.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재능 있는 청년들은 저렴한 대학교육과 정부지원교육이 없다면, 전문직의 꿈을 펼쳐보기는커녕 평생 입에 풀칠해야 하는 단순노무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셋째. 같은 원리로, 임신-출산에 의하여 한 번 경력단절된 여성은 법적으로 철저하게 보호되는 산모의 권리 · 모성보호 프로그램 · 경력단절 회복 프로그램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커리어패스에 복귀하기는커녕 영원히 가장 값싼 단순노무직을 전전해야 할 것이다. 


넷째. 아이를 낳는 것이 미래세대를 양육하는 사회 전체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여성 혼자에게 모두 떠넘기는 사회에서 아이를 낳으려는 여성 역시 없을 것이다. 


다섯째. 적절하지 못한 양육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들과 가난한 양육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드림스타트사업 ·공공무상보육사업 · 무상교육사업과 같은 저소득층 청소년 보조 프로그램이 없다면 자신의 잠재력을 펼쳐 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운 좋게 자선사업에 의해 구출되지 않는 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섯째. 상하수도 · 교통 · 항만 등의 SOC(사회간접자본), 보육, 돌봄, 교육, 간병, 고령자 케어, 교육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대량으로 수요가 있는 분야는 정부가 해당 사업을 장악했을 때 민자사업이 투입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막대한 공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를 ‘사회라는 개입자(agent)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단지 시장에 맡기게 된다면, 사업자의 정상이윤을 이용자가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공리 대비 비용이 증가할뿐만 아니라 지불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필수영역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므로 사회의 전체 공리가 감소한다.


시간과 지면이 더 주어진다면 수 백가지 항목을 더 나열할 수 있지만, 이미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으므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복지는 가능한가


‘사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마거릿 대처도 안 보이니까 없다고 했겠지. 나는 무신론자로서 그런 솔직함을 존중한다. 그러나, 신은 안 보이니까 없다고 해도 되지만 중력은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중력이라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고 한강에서 뛰어내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중력은 투명하지만, 중력을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서는 어떤 동작도 수행할 수 없다. ‘사회’라는 범주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상상된 공동체든 공허한 기표든 간에, 우리는 ‘사회’라는 생존을 위한 공동 구좌(account)를 상상하고 그것을 실제 행정과 복지사업에 반영해야 한다. 사회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고, 사회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며, 사회서비스를 통해 서로의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실제 복지수요자들의 필요에 의거하여 어떻게든 우리는 사회와 사회적 공동책임이라는 범주를 만들고 사회의 이름으로 재분배정책을 실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생산하는 생산성이라는 전력(電力)은 사회개발과 시민의 복지 향상이라는 거대한 전력망을 돌지 못하고 개개인의 명의로 된 저금통장에 건전지처럼 꽁꽁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방전된 개인들은 사망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잔여주의’와 ‘제도주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옹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잔여주의 사회복지 접근은, 사회복지의 한 가지 방책인 것이 아니라, 그냥 사회복지를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잔여주의 사회복지’냐, ‘제도주의 사회복지냐’는 선택지는 없다. 그냥, 사회복지를 하자는 거나 말자는 것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사회복지를 하지 말자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날 내 몸에 악마가 빙의해서 보일러 가스를 땔 돈이 없는 사람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해도 ‘응. 그들은 산업생산성이 낙후되었으니까 충분히 죽을 수도 있어. 억울하면 열심히 일해서 돈 벌지 그랬어? 가난하다는 것은 게을렀다는 증거야.’ 라고 말하는 상황이 오지 않는 한, 나는 사회복지를 하지 말자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우리 사회가 우리 시민들 모두를 책임져야 하며, 노동가능한 인구 역시 튼튼한 사회복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 도시에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 운이 좋은 사람과 운 나쁜 사람을 모두 동시에 균등하게 살려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는 해야 되는 것이고, 사회복지를 한다는 것은 제도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지역사회복지라는 이슈


이러한 관점은 지역사회복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역사회복지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지역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의 물리적 대응체로 소환되는 지시 대상으로서의 어느 ‘지역’이 맥락에 따라서 굉장히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방자치단체의 지역 특성화 복지사업은 지역사회복지인가? 마을살리기 사업이나 통영시의 동피랑 벽화마을 벽화그리기 사업은 지역사회복지인가? 해방촌 주거공동체나 민달팽이협동조합은 지역사회복지인가? 지역 재가노인센터는 지역사회복지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중앙정부 복지서비스 전달체계의 일부인가? 이것은 쉽게 규정할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접근해보자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사회’는 필요에 따라 시-도-군-마을 등 지리상의 행정적인 영역을 일컫는 것일 수 있고, 학부모모임 등 주민들이 서로 이익을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일컫는 것일 수 있고, 마을영화상영회나 청년벤처사업 지원센터 등 컨텐츠공급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마을의 커뮤니티를 일컫는 것일 수 있고, (생태체계이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인에게 있어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종합적인 ‘마을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지역사회는 빈민을 먹여살릴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역사회복지라는 것이, 오늘날 단지 제도주의적 사회복지의(그러니까 ‘사회복지’의) 지역적 적용이 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잔여주의적 사회복지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사회는 기본적으로 직업과 주거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기존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사실 하나의 안전망이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정치적인 고려를 제쳐두고 단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단위에서 생각한다면, 도시나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에 있던 자원들을 조금씩만 나눠준다면 지역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웬만큼은 배불리 먹이고 따듯한 방에서 재울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종의 기적 같은 모습을, 5.18민주화항쟁 당시의 광주에서도 보았다. 광주 코뮌의 시민들은 중앙정부의 국군이 자신들을 학살하는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가진 자원을 나누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꺼낸 수류탄 · 주부들이 길거리에 나와 가마솥에서 지은 주먹밥 · 성매매여성들까지 함께 헌혈에 동참해서 마련한 혈액팩을 기부받은 버스에 싣고 다니며 필요한 곳에 나눠주었다. 하물며 2000년대의 두 번째 10년기를 맞이한 오늘날은 어떻겠는가? 마을공동체가 적어도 물리적이고 또한 단지 ‘계량적으로‘ 지역사회복지를 대체할 역량이 되는가? 물론이다. 지금은 경신대기근(1670~1671)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두 가지 층위에서 존재한다. 정치적인 문제는, 사회복지서비스의 중앙정부 공공보장 부문을 축소하고 그 수요를 민간과 지역사회에 떠넘기려는 움직임 때문이다. 영국은 1980년대 이후 중앙정부의 사회보장정책을 축소하면서, 그 책임을 지역사회보호(community care)라는 명목 하에 마을과 도시로 떠넘겼다. 1979년 대처 총리의 취임 이후, 노인을 위한 주거보호시설 비용이 증가하자 정부는 1986년 지역사회보호 개선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위원회는 ‘지역사회보호의 일차 책임은 지방정부에 있고, 그러나 지방정부는 복지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계획 · 조정 · 구매자가 되어야 하며, 주거보호의 필요성은 지방정부 재량으로 결정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공공복지서비스의 축소뿐만 아니라 지자체복지서비스의 축소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비공식부문 · 민간부문 · 자원봉사 부문의 자원과 인력이 사회복지수요를 충당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이어지는데, 그 까닭은 간단히 말하면 ‘사회복지수요를 이렇게 민간에 떠넘기면 정부는 도대체 왜 존재하느냐’ 로 압축될 수 있다. “2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격언을 가훈으로 삼았다던 경주 최부잣집의 구휼 정신은, 조선 중앙정부가 빈민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현할 수 있었던 발상이다. 정부의 존재이유는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시민과 거류민의 기본적 인권을 지키며, 모든 시민의 균등하고 윤택한 생활을 위하여 소득을 재분배하고 지역을 고루 개발하는 것에 있다. 


또한, 이것은 부자-빈자의 개인적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간의 관계, 마을과 마을간의 관계에도 적용되며, 그 마을 정책과 인프라의 적용을 받는 시민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침체된 광산도시와 떠오르는 개발자들의 도시 - 예를 들면 강원도 영월과 경기도 판교. 250만 대도시의 교육중심지구와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된 어촌마을 – 예를 들면 대구 수성구 황금동과 경북 울진군 죽변면. 만약에 우리가 영월시민의 생계지원제도를 영월에 맡기고, 판교시민의 생계지원제도를 판교에 맡길 때, 두 시민들이 보장받는 최저생계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황금동 주민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갈 수 있는 병원과 죽변면 주민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갈 수 있는 병원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요양원은? 재가복지시설은? 유치원은? 직업훈련기관은? 정신건강복지센터는? 권역외상센터는? 성폭력지원센터는?


지금 이렇게 수많은, 중앙정부만이 제공할 수 있는 생명 같은 시설들을 못본 체 하고, “사회가 어딨나요, 사회 같은 건 없습니다.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에요.”라고 도대체 어떤 악마 같은 자가 말할 수 있는가?




결국엔 다시, 중앙정부 사회복지.


결국 우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모든 시민에게, 이것이 와닿는 표현이 아니라면 우리 모든 국민에게, 이것도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 모든 민족에게, 이것조차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 모든 한민족 한겨레 피붙이에게! (내가 정말 이런 표현까지 써야 하는가?) 같은 민족이자 같은 나라 사람으로서 동일한 사회보장과 동일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서는 결국 중앙정부의 강력한 하달식(Top-down) 사회복지전달체계가 필요하다. 아무리 주민의 숫자가 적고 중요도가 적고 내는 세금이 적은 곳이라고 해서,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인권이 없는 인간들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역과 마을의 부유함과 가난함에 상관없이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일한 사회보장을 제공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 마을공동체에 복지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증세과 공공부문 지출 증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정부 사회복지 시스템의 시원한 그림자 아래에 쉬게 해야 한다.


물론 지역사회복지도 의의가 있다. 지역사회복지를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장애인과 노약자의 탈시설화가 늦게나마 상식처럼 보급되면서 지역사회는 시설에 갇혀 있었던 사람들과 다시 통합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사회복지와 학교 등 정부가 사회통합에 손 쓸 수 있는 기관들의 지역내 역할이 증대될 것이고, 지역주민들 역시 사회복지서비스에 고용이 늘어나거나 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탈시설 당사자와 함께 지역에서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적 사회참여가 일상화되면서, 시민사회운동과 지역정당활동이 자리를 잡게 되는 지역사회는 사람들을 모으고 공동작업을 진행하는 커뮤니티 허브로서의 역할을 보다 강력하게 수행하게 된다. 그와 발맞추어 지방자치제도도 1995년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 민선7기를 출범시키며 완벽하지는 않지만 안착해가고 있다. 지역의 특성과 주체성에 맞는 사업과 컨텐츠 개발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각 지역 특색의 라이프스타일과 행정 제도는 앞으로도 더 분화해나갈 것이다. 이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고 또한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끝. 감사합니다.




[1] 유해숙, 지역사회복지론, 2020

[2] “I think we have gone through a period when too many children and people have been given to understand “I have a problem, it is the Government's job to cope with it!” or “I have a problem, I will go and get a grant to cope with it!” “I am homeless, the Government must house me!” and so they are casting their problems on society and who is society? There is no such thing!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end p29] there are families and no government can do anything except through people and people look to themselves first. (…) 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3] 마거릿 대처 재단, 인터뷰 아카이브 

[4] 조건희&전혜진, [단독]영양실조로 사망 작년 345명… 외환위기후 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10-12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Nadi Whatisdeliriu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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