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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Oct 15. 2021

인간,
무한한 신뢰 속에서 일어서는 동물

로저스와 매슬로가 우리에게 남긴,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 관하여

심리학의 출발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물론 모든 학문의 출발이 낭만적이었던 적이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곘다. 예를 들면 인간에 대한 최초의 통계학은 지독한 인종주의자이자 우생학자였던 프랜시스 골턴(Sir Francis Galton, 1822~1911)이 범죄자와 열등한 인종 그리고 그렇지 않은 우등 인종을 원시적인 과학방법론을 갖춘 뇌 해부학으로 선별하려 했고, 실제로 그의 기초적인 뇌 해부와 측정론(두뇌 생리학, ‘Schädellehre’)은 현대적인 인체해부학 접근법의 원시적인 시초가 되었다. 


의사인 동시에 범죄학자였던 이탈리아인 체사레 롬브로조(Cesare Lombroso, 1835~1909) 역시 그러한 오명과 칭찬을 동시에 듣는 인물이다. 롬브로조는 범죄자의 두개골 형태와 일반인의 두개골 형태가 다르게 생겼을 것이라고 가정했고, 당시에는 영가설과 대립가설이라는 과학연구방법론적 개념이 나오기도 전이라서 아예 그렇게 ‘믿었으며’, 정말 불행하게도 이것은 당시 각광받던 우생학의 유행과 결합하여서 미 대륙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소위 ‘흑인’), 신체 및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자행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롬브로조의 ‘어리석은 과학’ 역시 한 가지 유산을 남기기도 했는데, 바로 두뇌의 특정한 부위가 특정한 기능을 전담한다고 믿는 두뇌 모듈성에 대한 가설이었다. 비록 롬브로조는 두뇌의 특정 부위가 비대하면 그에 맞춰서 두개골도 툭 튀어나오게 되고 그에 따라서 두개골 측정으로 성격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지만, 적어도 뇌의 기능이 어느정도 분업화되어 있다는 발상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원시적인 의료통계학은 현대 근거기반 의과학의 방법론적 시행착오이자 메타적 ‘반면교사’가 되어주었다. 어떻든 우리 시대의 과학들은 옛 사람들의 ‘과학-비스무리한-어떤 측정하는 행위’를 딛고, 스승의 오류를 지적하고, 스승의 업적을 부정하며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심리학은 대중에게 ‘무언가 따듯하고, 부드럽고, 호의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내가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내가 ‘말 하면 잘 들어줄 것 같’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을 읽힐까봐 말을 함부로 못하겠다’고도 이야기한다. 실제로 심리학은 생각을 읽는 학문이기는커녕 왜 우리가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가에 대한 학문에 훨씬 더 가깝지만,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심리학에 대해서 느끼는 포근한 호감의 감정은 대체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말 하면 잘 들어주는 것도 사실이고. 그게 내 소명이자 직업이니까.


하지만 심리학이 원래는 이것보다는 훨씬 더 딱딱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리학 역시 근대적 학문이 태동하고 과학방법론이 원시적으로나마 도입되던 골턴과 롬브로조의 시대에 출현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처럼 살벌하고 공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듯함이나 적어도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지, 세상을 지배하려거나 우생학으로 우월한 유전자만을 남기려는 생각은 대부분 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을 설명하며 더 생생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뿌리가 된 근대적인 심리학은 독일의 심리학자 · 철학자 · 생리학자였던 빌헬름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 1832~1920)에게서 출발한다. 그는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1879년, 세계 최초의 실험심리학 연구소를 개소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심리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존재했다. 서양에서도 인간의 마음을 읽으려는 타로카드나 점성술이 유행했고, 동양에서도 음양오행이나 사상체질 등 수많은 마음의 예측과 분류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트의 1879 심리학 실험실이 인류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이 된 까닭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두뇌 활동인 ‘심리’와 ‘정신활동’을 기계장치를 통해 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측정한 최초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공간 · 시각 · 음향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남긴 독일의 물리학자 · 철학자 · 생리학자였던 헬름홀츠(Hermann Ludwig Ferdinand von Helmholtz, 1821~1894)를 최초로 꼽기도 한다)


분트의 실험실에서는 여러 복잡한 신호와 응답장치들을 발명하여서, ‘불빛이 켜진 후 몇 밀리초 이후에 피험자가 버튼을 누르는가?’ 와 같은 형식의 응답속도 실험이나, ‘발끝에 자극을 주면 몇 밀리초 이후에 피험자가 그것을 알아챌까?’와 같은 신경전달속도 실험들을 진행했다. 이것은 당연히 골턴이나 롬브로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건전하고 윤리적인 것이었으며(그래서 전공자들도 심리학의 아버지 분트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실험방법론과 실험장비의 상당한 정밀성 덕분에 과학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남겼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1879년 빌헬름 분트의 라이프치히 실험실에는 메이지 유신을 맞아 세계 각국으로 파견된 일본인 유학생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려 실험심리학의 창시자인 분트에게 직접 심리학 연구를 배워서 일본으로 귀국해 그야말로 ‘1세대 심리학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 쭉 일본은 심리학 강국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심리학을 위해 굳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몇 없는 국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아무튼 이러한 분트의 실험심리학은 인간을 – 심지어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마저도 – 낱낱이 측정하고, 측량하고, 계량화하는 과학적 연구방법론의 초석이 되었지만, 이러한 업적은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의 한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분트로 시작되는 과학적 심리학 연구 방법론의 등장 이후,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기계처럼, 특정한 응답소요시간과 응답속도가 정해져 있고 인풋에 대응하는 아웃풋이 정해져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다루는 것이 하나의 ‘반성되지 않은 기본값’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트의 실험방법론은 러시아의 위대한 생리학자이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1904)을 남긴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Иван Петрович Павлов, 1849~1936)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분트의 철저한 실험중심 심리학은 “나에게 10명의 아이를 맡긴다면 (행동주의 심리학의 원칙을 이용해) 당신이 원하는 어떤 사람으로도 키워낼 수 있습니다” 라고까지 말하며, 생물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던 ‘마음’에 대한 가정을 기각했던[1]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존 B. 왓슨 (John B. Watson, 1878~1958)과, 조작적 조건형성 이론의 시조가 된 ‘스키너 상자’로 알려진 B.F. 스키너 (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 등의 심리학자들에게는 거의 완전한 직계조상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중심적인 심리학은,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측정할 수 있고 또한 ‘채찍과 당근’을 수여함으로써 조금씩 다르게 조성(shaping)해나갈 수는 있겠지만, 정말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서 다시 일어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즉, 실험심리학에는 ‘마음’의 자리가 없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인지 및 심리학의 분과학문 가운데에서는, 연합주의(associationism)라는 학파가 있다. 이 학파는 정말 행동주의 심리학의 전제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사람들인데, 인간의 마음 같은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심리학적 가설에서 배제해야만 하며, 인간의 정신은 다만 자극 A와 자극 B가 서로 연합학습되고, 현재 인간의 복잡한 행동들마저도 그러한 신경간의 연합이 누적된 결과로 간주하고 그 연합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개입을 꾀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은 이렇게 투정부려보고 싶다.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지금 그 마음도 존재하시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어떻게 보면, 인간의 마음을 ‘소외’시키는 심리학의 큰 줄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인간을 ‘밥 먹고 포도당을 분해해서 ATP 합성하고 그 전기적 에너지로 활동하는 탄소기반 생체기계’로 파악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의식과 심지어 무의식이라는, ‘각자 자기 것 하나만 겨우 아는’ 영역에 대해서 과감하게 그것을 꺼내어 다룰 수 있다고 뛰어든 학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그들이다. 스승과 제자였고 또한 스승을 딛고 일어선 제자였던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웅숭깊은 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제안한 첫 번째 학파였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융이 ‘측정될 수는 없으되 인간행동을 설명하고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요청되어야 하는 변수 X’를 무의식(그리고 전의식)이라는 기막힌 개념을 제안하기는 하였지만, 프로이트와 융은 여전히 인간의 정신을 한 가지 중요한 가정 안에 가둬두었다. 그것은 바로 정신결정론(psychic determinism)이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성격과 트라우마는 태어난 직후 6년동안의 경험으로 모두 결정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경우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 가운데 사실상 생후 6년까지에 해당하는 남근기에 이르면 성격형성이 끝나버린다고 주장한 것이다. 융 역시 그러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보다 발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복합적인 설명틀로 확장하고자 애썼고, 미래의 목표와 열망에 의하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생애초기에 대부분의 성격특성이 결정지어진다는 기본 가정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2]


이러한 답답한 심리결정론에 반기를 든 것은, 칼 로저스(Carl R. Rogers, 1902~1987)와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 Maslow, 1908 ~ 1970)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실험심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인간은 고기로 된 기계가 아니라고 보았고,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프로이트의 따님인) 안나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파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에 매여 사는 불쌍한 어른아이도 아니라고 보았다. 로저스와 매슬로는 단지 생물학적 ‘현재성’에만 묶여 있었던 실험심리학도, 기억도 안 나는 ‘과거’에만 묶여 있었던 정신분석학도 거부한 채, 미래로 나아가고자 결심한다. 로저스와 매슬로 인본주의 성격이론의 핵심은 바로 인간을 


❶ 육체나 정신 둘 중 하나만을 가진 것이 아닌 전인적인 존재로 보았다는 것과 

❷ 과거는 현재의 새로운 경험과 미래지향적인 진취성에 의해 얼마든지 덮어쓰일 수 있다는 갱신가능한 존재로 보았다는 것 그리고

❸ 심리학은 인간의 그러한 잠재능력을 믿어주고 따듯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것이라는 통찰에 있다.


나는 심리학과 학부생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심리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접했지만, 로저스처럼 가슴 따듯한 심리학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로저스의 이론이 얼마나 따듯하고 위로를 주었냐면, 나는 처음에 심리학자들의 개론을 처음 접했을 때에 로저스를 너무나도 따르고 싶은 마음에 마음 속으로 “충성충성 로저스님 롸저(roger)!”를 외치며 그의 이론과 이름을 연합시켜서 외우곤 했다. (말하고 나니 좀 부끄러운 일이다) 로저스의 이론은 –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듯하고, 지지적이고, 나의 모든 전인격을 믿어 주며 내담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무한한 인내로 버텨 준다.


로저스는 본격적으로 ‘인간중심 접근’을 시도한 상담자이다.[3]기존에 존재했던 지시적 상담(상담자 중심 상담), 예를 들면 에드문드 윌리암슨(Edmund G. Williamson, 1900~1979)의 특성-요인 상담 등과는 다르게 내담자의 전인격을 통째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접근법을 취하였다. 로저스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외부의 영향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간주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고, 느낌을 경험하며, 사유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로저스에게 있어서 지금-여기 내담자의 마음이 느끼는 현상학적 체험에 집중하는 것은 치유와 문제해결의 전적인 대상이었다. 


그는 모든 유기체가(나는 퍼스, 제임스, 듀이, 미드 등  20세기 프래그머티즘과 영미 학술 전통에서 사용하는 ‘유기체’라는 표현을 너무 좋아한다. ‘유기체’라는 표현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객관화하는 자세와, 주관성을 극복하고 가능한 한 인간을 철저한 과학 방법론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의지,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한 따듯한 인정이 모두 섞여 있다) 자아를 가지고 있고, 자아에 대한 개념이 있으며,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자아를 긍정적으로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가(상담자나 사회복지사가)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존중의 태도로 내담자의 이러한 자아실현경향성을 잘 보호하고 육성해줄 때, 내담자는 자신의 영혼을 깊이 이해받으며 성장과 변화의 계기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fully functioning person)’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매슬로는 이러한 따듯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거기에 보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인간 개발적인’ 구조화된 설명을 도입했다. 매슬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긍정적이고 성장적인 면모에 집중했다. 매슬로는 로저스의 견해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려는 본능적인 행동 경향이 있다고 간주했으며, 그의 유명한 ‘욕구단계론’은 그러한 행동 경향에 대한 대략적이고 경향적인 참조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인간 성장의 전반적인 밑그림 위에서 우리는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아실현을 이룬 자아실현인(self-actualizing person)의 공통점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추려냈다; ‘효율적인 현실 지각’, ‘수용’, ‘자연스러운 자발성’, ‘문제중심 대처방략’, ‘자유와 독립의 추구’, ‘세상을 늘 새롭게 보는 능력’, ‘성취 경험’, ‘공동체 의식’, ‘인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성향’, ‘깊은 대인관계’, ‘민주주의적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며 관대한 인격’, ‘수단과 목표를 구분하는 명확한 도덕적 기준’, ‘공격적이지 않은 철학적 유머’, ‘창조성’, ‘문화에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독립성’ 등을 꼽았다. 


이처럼 매슬로우의 자아 이론과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매우 현대적인 개념이 동원된 동시에, 고루고루 균형잡히게 발달된 멋지고 건강한 독립적인 개인을 그려내고 있다. 매슬로가 단지 심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력개발과 인사관리를 전공하는 경영학자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는 까닭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로저스와 매슬로의 인간관과 인본주의심리학의 접근방식은, 인간을 전인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이 바뀌고 갱신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인본주의 심리학은 단지 그러한 시각에 멈추지 않고 그러한 타인의 내면의 깊고 잠재력 넘치는 인격에게 깊은 존중과 예의를 담아서 조심스럽고 평등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고 우리를 교육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은 우리가 인격-대-인격으로 모든 인간을 대할 때에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나아가서 우리가 누군가를 개발하고 육성해야 되는 입장에 처했을 때, 혹은 누군가를 개선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입장에 처했을 때 굉장히 큰 행동의 기준이 되어 준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누군가를 상담해주어야 하거나, 직업상담 장면에 있거나, 사회복지 장면에 있거나, 혹은 교육 장면에 있을 때, 로저스와 매슬로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보십시오. 그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마음이 있듯이. 그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상관없이, 앞으로 살아감에 따라서 마음껏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인사하고, 그가 스스로 자아를 실현하려고 하는 욕구에 손을 내밀어 잡아주십시오.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 주되, 그 사람의 선택과 진정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옆에서 도와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비록 단기적으로 흔들릴지라도 조력자와 상담자가 곁에서 버텨 준다면, 그는 끝내 자신의 의미와 자신만의 길을 완성할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무한한 신뢰의 에너지로 그의 성장 과정 동안 버텨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심리학적 관점이, 어떻게 우리 사회복지사들과 상담사들 그리고 교사들에게 채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을 믿어준 사람의 따듯한 마음 속에서 무한히 다시 일어설 수 있다.







[1] 신기원, 행동주의자가 본 심리학: 심리학은 의식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2] 노안영 · 강영신, 『성격심리학』, Page. 228

[3] 손대영&최영섭, 『인간행동과 사회환경』, 2012



끝.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10-12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lauren lulu taylo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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