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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Nov 06. 2021

게이머가 쓰는,
게임 예술비평과 메타버스 윤리학

인간성과 미래의 거울이자 거울 너머 만화경으로서 '게임-메타버스'

게임의 안과 밖 사이, 

그 계면(界面)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며


나는 게이머이고, 어린 시절 『메탈슬러그』 · 『쥬라기원시전』 · 『웜즈』 · 『심즈』와 같은 게임을 시작으로 지난 20년간 여러 게임을 즐겨왔다. 게임을 즐겨 온 세월과 시간에 비하면, 나의 전공 공부는 마치 '전체 인류의 역사에 문자시대가 출현한 시간'만큼이나 짧은 셈이다. 그래서 나는 내 직무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게임에 관한 이야기도 오랫동안 할 수 있다. 게임은 그 자체로 영화처럼 여러가지 예술의 제반 분과들이 통합된 융합예술이다. 하지만 나는 제작팀이 어떤 랜더링된 세계 안에서 제공하는 '게임예술적 경험'을 오롯이 느껴보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개별 게임작품의 예술성 그 자체에 대해 큰 숙고는 하지 않고 살아왔다. 


게임은 근본적으로 예술비평을 수행하기 쉽지 않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고, 수많은 사이드퀘스트에서 서로 다른 제작진의 사회적 문제의식과 메시지들이 '상승과 하강하는', 그러나 '명징하게 직조'되지는 않은(고마워요 이동진 평론가!), 굉장히 의미론적으로 '시끄러운' 게이밍 경험에서 어떤 일관된 비평을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게임은 체험주의 철학에 입각해서 보자면 플레이어에게 '체험의 주권을 돌려주기 위하여' 아주 복잡한 상호작용 가능성이 제공되고 나와의 만남을 통해 창발(emerge)하는 계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장원리에 입각해서 보자면 지불한 금액에 걸맞게 기대되는 게이밍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행동의 자유를 공급한다는 계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사실은 '게임 그 자체'에 대한 일관된 문화비평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대신 나의 이목을 끈 것은, 오늘날 『오징어 게임』에 대한 직접적 예술비평보다 그 작품을 둘러싼 감상자들간의 반응이 더 우리사회의 집단적 컨센서스를 '징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게임 자체의 예술성에 대한 논평보다는 '게임이란 어떤 예술의 형식인가?' 라는 보다 메타적인 예술철학적 논의, 그리고 게임과 게임 바깥 사이를 접합하는 계면(界面)으로 존재하는, 어떤 게임에 관한 게이머들과 일반 대중의 담론이었다.


사실, 게임의 '예술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라고 해도 사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예술(Zeitkunst)과 공간예술(Raumkunst)이 중첩된 종합예술(Gesamtkunstwerk)로서, 마치 발레나 건축처럼 하나의 굳어진 장르 속에서 주요한 비교-논평의 포인트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상적인 예술비평을 들이대기도 애매한 지점이 있다. 예를 들면, 스퀘어에닉스의 작품 『Deus Ex : Human Revolution』(2011)에서 다루어지는 포스트휴머니즘 혹은 사이보그에 대한 비판의식을, 인간의 신체를 잠식하는 자본에 대한 경고로서 『블레이드 러너』(1982)나 『인 타임』(2011)과 함께 견주어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학자 W.F.오그번이 제안한 '문화지체 현상(Cultural Leg)'의 관점에서, 발달하는 과학문명에 뒤떨어지는 정신문화가 촉발하는 재앙을 묘사한 『폴아웃 76』(2018)이나 『사이버펑크 2077』(2020)과 함께 견주어 볼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포스트휴머니즘 관련 문화비평에서 주구장창 언급되는 『아키라』(1988)나 『공각기동대』(1995)와 함께 봐야 하는가 - 이제 그것이 현대사회 문화비평의 표준 비교 척도로 쓰일 만한 고전이 되었으니까? 그것도 아니면, 몸에 이식하는 신체증강장치를 남용하다가 면역거부반응으로 몰락하는 사람들을 다룬 『Deus Ex』 프랜차이즈의 서사를,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밀랍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으나 감히 넘볼 수 없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난 나머지 날개가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 신화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보아야 하는가?


Deus Ex: Human Revolution(2011)


물론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게임이라는 예술의 형식에 있어서는, 그러한 전통적인 '시계열로 늘여놓은 역대 명작과 견주어 보기' 방식의 예술비평은 더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예술적 체험이, 하나의 서사와 하나의 화면이라는 전통적 시각예술의 레일을 따라 롤러코스터처럼 일관되게 안내되지 않는 게임-예술의 특성상, 그런 '시야각이 고정된 추체험'을 제공해온 레거시 미디어들과의 견줌 속에서 제작자의 중점 표현이나 주제의식을 비교해보려는 비교문화학적 비평 시도는, 게임이 제공하는 굉장히 복잡다단한 감각재료들 속에서 완전히 색다른 경험을 느낀 사람으로부터 '그런데요, 이렇게 보면 되지 않을까요?' 라는 반론에 지속적으로 부닥칠 수밖에 없다. 게임은 근본적으로 예술적 체험의 분량(맵과 플레이타임)이 너무 크다. 그 압도적인 시공간적 자유 안에, 통상적인 영화와 소설보다 훨씬 많은 서사들과 단서들이 제공되고, 인물과 사연들이 등장한다. 그 풍부한 자유 안에, 제작진들의 무의식과 업계의 클리셰들이 아무리 전형적으로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예술적 시도의 '양적 완화'는 언제나 새로운 예술적 경험과 의미를 창발한다.



가상-게임의, 현실-재현이라는 타락


물론 게임의 흥망성쇠를 지켜 본 올드스쿨 게이머들은 이런 비판을 할지도 모른다. 게임의 '예술적 구조'란 똑같다고.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원화팀·모델링팀·음악팀이 인간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종합예술을 만들고(그러므로 주된 예술적 성취는 여기에 있고), 스토리팀이 그 귀한 소스에 대충 『성경』이나 북유럽신화에서 베껴온 뻔한 알레고리를 끼얹거나 아랍 사람들을 또 죽이고, 그게 안 되면 죽은 나치라도 또 살려서 복수 명목의 죄책감 없는 살육을 하며, 온라인게임은 운영팀이 말아먹고 패키지게임은 서버팀이 말아먹고는, 스튜디오를 인수한 회사가 그 모두를 해고하는 것.


이런 비판은 사실이다. nVidia의 PhysX나 DirectX 11의 테셀레이션(Tessellation)과 같은 기술이 적용된 게임을 해 보면, 이제 정말 얼핏 봐서는 게임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무려 2007년에 발매된(이게 얼마나 옛날이냐면, 무려 故노무현 前대통령 재임 당시였다) 『크라이시스 1』부터 제공된 가상현실의 압도적인 현실감은, 이미 nVidia의 GeForce 8600GT시리즈를 사용하던 나 같은 일반소비자조차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청각적인 체험도 마찬가지다. 실제 사격장에서 실총의 격발음과 조작음을 전방위에서 녹음하고, 그것을 다시 거리별로 달리 녹음해서 청각 체험을 최대화한 『콜 오브 듀티 : 워존』(2019)에서 매치 몇 판을 뛰어 본다면, '메타버스'가 정말로 무엇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현실을 대체하는 가상'이란 무엇인지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 휘황찬란한 시청각기술로 치장된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게임이라는 하나의 서사와 메시지를 가진 종합예술이 최종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반복. 현실에 대한 지루한 반복뿐이다. 시인 김수영의 시들처럼, 비루하고 구차한 현실을 반성하지 않는 '딜레탕트적 취미'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오늘날 현대전을 다룬 FPS나 RTS게임은, 십중팔구 구소련 분리주의자 테러리스트와 싸우고 아니면 이라크 분리주의자 테러리스트 근거지를 폭격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1980년대에 소련이랑 전쟁을 했다면?' 정도의 상상력이다. 


FPS에 있어서 『콜 오브 듀티』, 『배틀필드』, 『인서젼시』 등의 시리즈가 그렇고, RTS에 있어서 『월드 인 컨플릭트』, 『워게임』, 『콜 투 암즈』 등의 시리즈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한 제국주의적 시각을 조금 더 확장하면, 『툼 레이더』나 『파 크라이』시리즈, 또는 『폴아웃 : 뉴 베가스』의 '예스맨 루트'도 그런 혐의를 받을 수 있다.


태곳적 전설이 간직된 정글의 마을에 떨어져, 목숨을 노리는 원주민과 독사들을 피해, 오리엔탈 미녀들과 한 판 뜨고, 억압받는 원주민 소수파의 우두머리로 등극해 쿠데타를 일으켜 '내 입맛대로 정부'를 세우는 것. 거의 뭐 CIA를 위해 헌정된 제국주의 판타지 시뮬레이터 아닌가?


파 크라이 3 (2012)

스크린샷 출처



어떤 추체험의 비윤리


이러한 게임들은, 그야말로 현대 전쟁을 서방의 입장에서(또는 제국의 입장에서) 추체험하는 것이다. 너도 이라크를 폭격하는 선량한 미군 입장에서 한 번 도덕적으로 고뇌해 보시라고, 완벽하게 재현된 F/A-16 전투기에 태워서 남의 나라 이라크 영공에 띄워주는 것이다(『배틀필드 3』). 그러나, 이러한 어떤 게임도 그 폭탄을 맞는 사람의 경험을 추체험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헬파이어 미사일의 TV유도화면을 보여주는 게임은 있지만, 골목에서 나오다가 그 헬파이어 미사일에 세상을 떠난 이라크 주민의 마지막 시야를 보여주는 게임은 없다. 전폭기에 탑재된 JDAM 폭탄의 GPS 표적지시 사운드를 들려주는 게임은 있지만, 그 JDAM에 폭격당한 이라크 병원 의료진의 찢어지는 이명을 들려주는 게임은 없다.


Falcon 4.0(1998)의 유저 확장판 BMS 4.32(2011)에 묘사된 LGM(레이저유도미사일) 유도화면

스크린샷 출처


미군 특수부대원이 전쟁법상 금지된 무기인 백린탄으로 마을을 폭격했는데, 폭격지점에 가 보니 그 사람들이 다 피난 가는 민간인이었고, 품에 아이를 안고 꿇어앉은 채로 온 몸이 녹아내린 어머니를 보며 PTSD에 걸린 미군 특수부대원의 입장을 체험시켜줄 줄은 알아도(『스펙옵스: 더 라인』(2012)), 그 불에 탄 어머니 본인의 입장은 죽어도 체험시켜주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서방 중심 게이밍 경험의 한계다. 심지어 그 모습이 감히 역겹게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기지도 않는 섹드립을 남발하는 인간들처럼, 자기들만 재미있는 기독교 알레고리를 시도때도없이 지껄이는 반성없는 기독교 문화에 뇌가 절여진 서방 예술의 한계이기도 하다. 


스펙옵스 더 라인의 개발자들은 그 백린탄에 녹아내린 시신들을 한땀 한땀 모델링하고 화상 입은 피부 텍스쳐를 그려서 덧입히고 렌더링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랍인 사망자의 3D모델을 하나하나 끌어다 꿇어앉혀 그을린 성모 마리아로 묘사해놓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이 시신들에 더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사람들을 불태운 자들에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스펙 옵스: 더 라인(2012)


나는 영화와 같은 레거시 종합예술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한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2012)에서 납치 감금된 채 첼로를 켜는 아역 주인공의 끔찍한 씬을 제작한 기획자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저기 묘사된 주인공과 정말 그렇게까지 유사하고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 장면을 촬영했을까? 즉, 제작자는 자신이 제작과정에서 표상했을 그 대상의 '이미지'와 얼마나 많은 동질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그 장면을 기획했을까? 


영화 『이끼』(2010)에서 불타는 성매매업소의 쇠창살 사이로 팔을 휘저으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인신매매 피해여성과 그 앞에서 셔터를 내려버리는 악역을 묘사한 사람들은, 영화제작자인 자신의 입장이 저 인신매매 피해자라는 가상적 존재가 느낄 (것으로 추론하는) 입장에 얼마나 가깝다고 생각하며 그 장면을 찍은 것일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추론하는 저 대상의 '이미지'는, 그 대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체험과 삶의 모습과 얼마나 일치할 것인가? 실제 나의 입도 아니고, 실제 남의 입도 아닌, 그 상상된 입들을 통해 제작자들은 자꾸 무슨 말을 그렇게나 하고 싶은 것인가?


영화 『마돈나』(2015)의 제작자들은, 극중에 등장하는 착종된 다섯 가지 약자성 - 성판매 여성 · 심장이식 대기자 · 미혼모 · 임신중단시술자 · 안락사 대기자 중 도대체 어느 한 쪽의 입장에라도 처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 처지가 안 되어 봐서 모른다면, 영화가 관객들에게 폭로와 불편을 정말로 이끌어낸다고 할지라도, 관객에게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묘사한 등장인물의 비참은, 그 시놉시스가 설정한 그 처지에 실제로 처한 사람이 진짜 보이기 마련인 모습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고, 그저 대중이 보통 '통상적으로 끔찍하다고 간주하는' 고통을, 시놉시스로 설정한 그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 대해 대중이 이해하는 '상투적인 이미지 묘사'에다가 치덕치덕 덧발라놓은 것이 아닌가? 결국 거기에는 당사자도 없고 당사자의 고통도 없고 관객들의 끔찍한 상상을 투사하는 마네킹만이 있는 것이다. 불치병 환자, 성매매피해자, 전라도 시민, 조선족, 조직폭력배, '아줌마'라고 불리는 여성들, 강력범죄 피해자, 철거민, 시위대, 장애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오직 '가장 불쌍하거나 혹은 가장 괘씸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아니라서 우리 하고싶은 대로 막 표현해도 상관없다'는 타자성만이 명료한 존재들.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디카페인' 시위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몇 달러를 기부하고, 수익금의 1퍼센트가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돌아간다는 스타벅스 카페라테를 사 마시며 흐뭇해하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출처


지젝이 비유한 카페인 없는 커피와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나는 이러한 '진실 없는 폭로', 더 나아가, '진실을 찾기는 싫고-진실을 대표하고는 싶은 자들이-진실의 좌석에 앉혀놓은-희생제물 인형'들을 이제는 끌어내려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가 '진짜 진실'이 제공하는 '진짜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 네비게이션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발언권을 빼앗긴 자들의 입을 빼앗아서 말하는 자들


나는 이것을 '자기-말하기의 윤리'라고 부르고 싶다. 악을 충격적이고 선명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닌, 자신이 쉽게 그 존재의 외연을 그려내고 존재의 속성을 단정지어서 묘사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 충격실험에 태우는 노란색 마네킹 더미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동차 추돌의 끔찍함을 묘사하기 위해 실험용 차량에 사람과 비슷한 마네킹 더미를 태우고, 가드레일과 충돌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자 여기 보세요! 충돌사고가 나면 이렇게 다칠 수 있습니다 안전운전 하세요!"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사고 결과에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실제 사람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을 태우지는 않는다. 진짜 사람처럼 생긴 마네킹에 인공 뼈와 젤라틴과 인공 혈액도 채워넣어서 리얼하게 다치면 더 현실성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언젠가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거기에 실제 사람의 얼굴을 그려넣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런데 왜 백린탄 폭격을 당한 마네킹에 아랍인의 얼굴은 그려넣는가? 왜 소이탄 폭격을 당한 전쟁의 끔찍함을 표현하기 위한 예술적 견본-마네킹 에 베트남인의 얼굴은 그려넣는가? 왜 미제국 패권주의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성매매피해자 윤금이 씨와 신효순 · 신미선 청소년의 시신을 전시하는가? 왜 한국의 전근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불타는 성매매업소에 갇힌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소환하는가? 왜 성폭력 일반의 피해를 재현하기 위해서 성폭력의 장면을 재현해야만 하는가? 


그림패들소, 효순이와 미선이의 아리랑, 2002

사진 출처


물론 필요하면 소환할 수 있지, 그것이 표현해야만 할 진실이라면. 그런데 그것은 왜 마네킹을 차에 태우는 자 자신의 얼굴이 아닌가? 끔찍한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세우는 견본품 신체의 얼굴에는, 왜 언제나 한결같이 내가 아닌 남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가? 왜 언제나 만만한 존재가 고통받는 스펙타클만이 전시되는가? 왜 나의 고통을 말하지 않고, 내가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고, 남의 일그러진 얼굴을 통해 고통 일반을 묘사하는가? 왜 나의 일그러진 얼굴은 표현하지 않는가. 왜 자기 육체를 통해 말하지 않고, 왜 남의 육체를 앞세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이것이 내가 제기하는 '자기-말하기의 윤리'에 대한 추궁이다.


물론 앞의 참혹한 아랍인 백린탄 피해자 묘사 건도, 선해(善解)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이 백린탄 폭격 장면을 묘사한 게임의 개발사는 독일의 게임 스튜디오 야거개발(Yager Development)인데(배급사는 2K Games), 2차세계대전 전범국의 참회라는 레거시를 물려받은 독일의 특성상 전쟁행위를 반성케 하는 의도로 이러한 장면을 집어넣었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전쟁의 참화를 묘사하기 위해 본보기로 사용하는 그 개념적 대상은 왜 하나같이 아랍인이나 러시아인들인가? 이제 아랍인이 이슬람의 야만성과 지하디즘의 테러리즘 때문에 이런 자들은 '시체의 형태로 표현하기에' 만만해졌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러시아인들의 인권침해와 침략주의적 행보 때문에 '러시아인이라는 이미지는 항공폭탄으로 폭파시켜도 마음이 덜 찝찝하기' 때문이 아닌가? 뼈저린 참회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 참혹한 배경설명을 해 줘야 할 때, 그 자리에 세워놓는 본보기 희생양은 왜 언제나 그렇게 주장하는 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니라, 내심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인가?


나는 이슬람교도들과 러시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게 아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공통적인 육체 체험에 기반한 영원불변한 보편 가치이며, 그것을 훼손하는 행위는 결코 어떤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실제로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이슬람인들은 나쁘다. 그들은 정교분리조차 안 되어가지곤 전근대적 종교를 통해 사람들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여성을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 정부도 나쁘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공공연히 납치살해하고 언론인을 암살하며 구소련 가입국의 정치적 독립을 전쟁과 포로학살로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우리는 러시아인이라는 내면의 하나의 이미지에게 폭력을 가해도 되는가? 무슬림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우리는 (심지어 이슬람과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아랍인이라는 내면의 이미지에게 폭력을 가해도 되는가? 



이미지(Image)는 스키마(Scheme)이며, 

그러므로 민족(Nation)이다.


실제로 나쁜 실제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상상하면 대략적으로 두리뭉술하게 떠오르는 '그 이미지'를 그려 놓고는 총쏘고 불태우고 두들겨패도 되는가? 물론 어떻게 보면, 그게 실제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이기 때문에 두들겨패도 다치는 사람 하나 없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의 나쁜 행위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행위는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가령, 우리를 포함한 많은 1세계국 사람들은 '아랍 사람' 하면 턱수염을 기르고 칼라쉬니코프 AK-47을 든 테러리스트를 떠올리지만, 그 이미지는 실제 그 사람들의 폭력행위를 반영하지 않는다. 실제 폭력은 이미지에 잡히기도 전에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실제 폭력 그 자체를 포착할 수 없다. 포착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범죄가 일어난 뒤에 돌려보는 CCTV처럼 늦디늦은 사후약방문이다. 범죄자들을 신속하게 제압하려고 만들어진 사법기관조차, 실제 폭력의 속력을 따라잡기 버거워한다. 심지어 그 테러범들의 '실제 얼굴 이미지'조차 그들을 검거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에 현상금을 걸고 20년이 지나서야 그를 사살했다. 그런데 우리가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이미지가 사실상 그 폭력행위와 무관하다는 것만이 관건이 아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미지가 사실상 그 폭력행위자가 소속된 거대한 인간 군집을 가리키고(indicate) 있으며, 오히려 실제 폭력보다 더 끈끈하게 그 인간 군집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이미지화가 폭력을 억제하지 않음에도, 이미지에는 폭력의 혐의가 덧씌워지며, 그러나 그 이미지는 실제 폭력행위자를 결코 일컫지 못한다. 그 이미지는 오직 그 민족 일반을 향한다. 


우리가 가령 '러시아 사람'이라는 어떤 머릿속의 '이미지'(또는 '심상')를 겨냥할 때, 그 일반화된 '이미지'의 실체는 사실 특정 집합의 인간들을 여러 번 보며 대충 형성된 뇌의 스키마에 다름아니다. 스키마는 일반화된 자극이고, 인간에 대한 일반화된 자극이란, 바로 민족에 대한 인식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민족성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 · 감성적 느낌 그 자체가 하나의 민족 그 자체다. 민족은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의 심상으로 떠오를 때 즉석에서 구성되는 주관적 체험이다. 그러나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지 않아줬으면 하는 것은, '민족'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갖는 휴리스틱(Heuristic) 분류의 한 사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인간의 대인-스키마(Person Scheme)의 하위분류 중 하나인 것이다.



민족은 '대인-스키마'의 한 전형적 사례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분류하는 모든 '인간 유형'은 대인-스키마의 일종으로서 일종의 '민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청년, 장년, 노년이라고 나눌 때 저 세 그룹은 모두 하나하나의 민족과도 같다. 그래서 자신이 청년이라는 민족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청년층은 장년층이라는 민족에게 불만을 느낄 수 있고, 혹은 존경심을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민족(노년층) 어떻게 되든 말든 우리 민족(청년층) 유리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다른 민족도 내 민족은 아니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더 큰 민족' 안에 포괄되기에 다른 민족을 위해 양보할 수도 있다. 전통적 구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논하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도 민족의 일종이다. '계급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당신의 민족을 위해 헌신하라'는 말과 형식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동일하다.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같은 문화와 애착을 공유하는 동지끼리 서로 헌신적으로 잘 하자는 말이니까. 


젠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여성이 '여성성'을 공유하는 사람과 주관적으로 충분한 동질성을 느끼고 같은 처지임을 느낀다면, '여성'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민족처럼 움직일 수 있다. 다른 민족(한국남성이라는 민족)이 일관되게 못살게 굴 때, 일본민족간의 갈등 속에서 조선인(한국인)이라는 민족정체성이 용광로처럼 불타올랐듯이 그 한국여성이라는 민족성도 더 똘똘 뭉쳐 강화되리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억압받는 민족이 충분히 지적이고 정교한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일제 치하의 억압받는 한민족이 1927년~1931년 사이 당시 한반도에서 조선인보다도 약자였던 중국 이민자들을 전국에서 학살한 화교배척폭동과 같은 일이 21세기 버전으로 되풀이될 것이다.


다행히도 여성이라는 민족은, 여성혐오에 성폭력이나 일삼는 남성이라는 21세기 '바다 민족(Sea Peoples)'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성숙한 민족적 방어체계를 갖추며 견고한 자매애로 단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 단결의 움직임과 동시에 자기보다 더 약한 소수민족에 대한 나름대로의 린치도 발생하고 있다. 자신의 생활양식에 변동을 줄 것이라고 간주되는 트랜스젠더라는 한움큼의 '이민족'에게, 남성 민족에게 직접적으로 갈기지 못한(그리고 남성 민족은 응당 처맞았어야 할)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 '나 페미니스트요'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사람들이 트렌스젠더에 대한 치사한 공격을 퍼붓는 이 지리멸렬함을 보라. 이것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화교 학살과 무엇이 다른가? 인천여성의전화가 제3물결페미니즘(교차성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못하겠다며 제멋대로 분리독립해버리고, 한국여성의전화는 어쩔 수 없이 소중한 대도시 지부 하나와 비윤리적인 활동가들을 제명해야 하는 세태가, 상하이파 ·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 서로서로 권총암살이나 갈기던 구한말 망명정부 독립운동의 지리멸렬한 역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나마 페미니즘은 아무리 타락하여도 '지구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내 파이를 지키러 왔네 어쩌네' 하면서 최소한 여성들끼리는 챙기지만(요즘은 그것도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과 같은 최소한의 교양 혜택도 입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여기서 더 심각해진다. 게이와 바이섹슈얼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증오를 드러내는 한편,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언급이 없다. 그 주제에 대해 별로 길게 생각해본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날의 젠더 갈등이, (나는 기본적으로 젠더 '갈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차라리 젠더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하지만) 근본적으로 민족 갈등과 동일한 매커니즘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파악한다. 이 땅의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공통성(그게 반드시 좁은 의미의 '한민족'일 필요는 전혀 없다. 차라리 '한국정부서비스소비자연맹'이라고 하라) 안에 통 크게 결속하지 못하고 저마다의 작은 이익과 '취향'을 지키는 부족주의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족주의는 뭐 별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있는 스키마에 대한 비현실적이고 주술적인 핸들링에서 오는 것이다. 



정확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묶고, 

정확한 사람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한국의 운동권 중에서 극심한 민족주의 정서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민족해방(NL) 계파가 몰락해가는 모습이 이것의 가장 적나라한 사례이다. 모든 사회문제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간의 갈등으로 보고, 민족 내부의 여러 차별과 계급과 계층과 같은 '하위-민족들(sub-nation)'을 못 본 체하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해서 잘 살자!(하지만 설거지는 여성동지들이 합시다)"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많은 대인-스키마 중에서, 고작 '김치랑 냉면을 즐겨먹는 일 열심히 하고 화 많은 사람들' 정도밖에 공통성을 공유하지 아니하는 '한민족' 개념이, 각자 나름의 고통과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오천만명의 서로 다른 입장들로부터 어떻게 일관된 공감을 받겠는가? 


하위-민족들 모두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메타-민족(meta-nation)의 성격이 없이 단지 문화적 동질성만을 통합의 규준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문화인류학적 민족(ethnographic-nation) 준거틀로는 절대 한반도의 사람들을 묶어 부를 수 없다.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이미지'내지는 '전형적 얼굴'은, 결코 실제 구체적인 한국 시민권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 속에 떠오른다고 다 정답이 아니다. 직관이라고 다 지혜가 아니다. 이미지라고 다 현실이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절대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다. 현생의 고통과 고뇌를 모두 담고 있는 실제 타자의 얼굴은 실제 그 사람의 목 위에 있는 그것하나뿐이다. 그 사람과 대면하는 것을 넘어 심층인터뷰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그 처지를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한데 묶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모든 갈등은, 민족 내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민족 안의 '하위-민족'을 두리뭉술한 '민족-이미지' 혹은 '깃발-이미지'안에 모두를 통합하려는 충동 때문에 일어난다. 민족 간에 폭력이 일어났을 때,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민족-이미지'에 죄를 묻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미지는 문제 해결을 복잡하게 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두루뭉술한 감정만을 일으킨다. 즉, 우리는 문제가 된 실제 사건으로 들어가서 실제 가해자들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해자! 하면 문득 생각나는 그 두리뭉술한 이미지 - 민족에 대해서 폭격을 가해 온 것이다. 실제 문제가 되는 지하디스트 이슬람근본주의자가 아니라, 눈썹과 피부가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랍 사람에 대해서 폭력을 가해 온 것이다. 실제 문제가 되는 푸틴주의자들과 시진핑주의자들이 아니라, '허옇고 눈 퍼렇고 키 큰 사람들'과 '중국어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 폭력을 가해 온 것이다. 



[ 받는 이 ]

너희 공동체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 앞


그러면 실제로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그 폭력과 아무런 상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당한다. 그 '민족-이미지'에 해당하는 실제 폭력자들은 아마 가장 나중까지 버틸 것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이미지'에 대한 증오를 불태운다고 하더라도, 그 증오는 그 민족에서 격렬히 싸우는 자들 아니면 그 민족의 가장 악한 자들에게 가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무리 고립되고 낙인찍힌 '민족-이미지'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안에서 가장 격렬히 투쟁하는 전사들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한민족 자체가 말살되어가던 일제강점기에도, 한민족 중에서 가장 강했던 홍범도 부대만큼은 청산리에서 일본군 몇 개 중대는 격파할 수 있었다.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단단한 창 끝은 존재하고, 그들은 억압과 가장 무관하게 살아남고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만약 어떤 일본제국인이 그런 독립군을 증오하여 조선인이라는 '민족-이미지'에 해당하는 사람을 공격했다면, 그 타깃은 누가 되었겠는가? 조선독립군의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 명목으로 수 만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경신간도학살사건(간도참변)을 보라.


우리가 아랍인들을 볼 때, 이슬람인을 볼 때,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볼 때, 떠올릴 때, 우리 심상에 두리뭉술하게 떠오른 '민족-이미지'는 누구를 가르키고 있는가? 그것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 가장 약자를 자석처럼 겨냥한다. 정작 우리 같은 세속주의자들을 정말로 괴롭히는 지하디스트와 테러리스트들은, 그 이미지의 지목에서 가장 마지막에 포착될 것이다. 어떤 공격도, 어떤 반격도, 가장 만만한 자에게 가장 먼저 향한다. 이것은 선한 공격이든 선한 반격이든, 악한 공격이든 악한 반격이든 가리지 않는 법칙이다. 오직 가장 소프트한 타겟이 강제로 가장 먼저 실제 보복의 현장에 불려나올 수밖에 없는 '민족-이미지'를 증오와 적대시의 준거틀로 채택할 때, 우리는 그들 중 가장 약한 사람들을 가장 선별적으로 해칠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한 민족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은 벌집으로 만들어도 가장 강한 사람은 뚫지 못하는 선택적 폭력의 탄환을, 우리 잠재적 행위 가능성들에 장전하는 행위와 같다. 


"Jäger Bomber" : 우리 마음 속 '테러리스트'에 관해 형성된 스키마는 어떠한가?

이것은 단순히 '모든 ~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라는 구질구질한 옹호가 아니다. '일반화 하지 말라'는 설교도 아니다. '일부의 ~'가 나쁜 것도 충분히 문제이고, 그 숫자가 상당하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일반화를 할 수밖에 없다. 병영생활관에 앉아서 동기 남자들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다 보면 이 문제적인 '한국 남자'들에게서 일관된 어떤 문제적 패턴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강제징집영장을 받아 본 남성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관되게 터져나오는 무슬림만의 독특한 종교성 폭력 사례를 헤아려보고 있자면,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굉장히 문제적인 어떤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야', '모든 무슬림이 그런 것은 아니야'라는 졸렬한 물타기 외에는 그 엄중한 진실을 가릴 손바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많은 구성원들이 사고를 치고 있다면, 우리는 생존 방어를 위해 분류작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따져물어야 한다 : 폭력행동을 방어하기 위해 분류해야만 한다면, 그 대상의 행위를 중심으로 얼마나 타당하고 정밀한 눈금을 가지고 분류하는가? 그 분류가 실제 문제 해결을 가속하는가? 그 분류가 너무 흐리멍텅해서 죄 없이 섞여들어간 사람을 포섭시켜 희생시킬 여지는 없는가? 또한, 일반화가 반복되면서 일반화라는 '생각의 버릇'이 남발되지는 않는지 물어야 한다. 그런 불가피한 일반화의 경험이 아무리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각 일반화는 각 사례의 특수성에 의하여 그때그때 개별적으로 정당화될 뿐이지, 어떤 한 번의 적절한 일반화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가 인지적으로 '사례'라고 인식하는 모든 '사례라는 것들' 간에 자동적으로 확산되어 승인될 수는 없다. 모든 사례는, 과학연구방법론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른 사례에 대하여 독립적이며', 따라서 '일화적이다'. 우리의 인지를 윤리적이고 '사실적으로'(당연히 사실적인 것이 윤리적인 것의 전제조건이다) 사용하기 위해서는, 증거와 사례가 충분히 좁혀지지 않은 모든 형태의 일반화와 '민족-이미지'화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아예 어떤 것도 이미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키마를 통해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겠지만, 필수적인 일반화도 충분한 경험적 데이터, 주목해야 할 필요성, 대상의 임팩트를 모두 고려해서 가급적 가장 좁은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일반화와 존재의 '민족-이미지화'를 마음대로 남발하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한다면, 어떤 서로 다른 독특성을 가진 존재들을 하나의 뭉뚱그려진 스키마로 이미지화하게 되고, 실제 가해자들의 얼굴과 직접 마주해서 혼내주는 대신 무차별적인 증오를 그 이미지에 쏟아붓고, 세계의 비참을 폭로하기 위해 증언의 무대를 세울 때에도 내가 직접 노출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마음대로 끌어와서 피를 묻히고 불태워버리게 된다.



게임에 있어서 재현 윤리의 문제 : 

게임은 단순히 또다른 현실이 아니라, 확장된 현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서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동어반복의 지루함'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는, 훨씬 더 반성적이고 윤리적인 이슈인 것이다. 게임은 단순한  음향 · 영화 · 극작 · 조형 · 건축 · 산업디자인 · 시각디자인 · 미디어아트 · 인터렉티브아트 등 당대 예술의 모든 분야는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역사의식 · 사회적 문제의식 · 철학 · 사상까지 종합 반영되어 있는 현시대의 최종적 종합예술이다. 그 모든 각각의 예술적 표현 프레임은 저마다의 렌즈로 인간 사유를 반영한다. 그렇기에 게임은 제작자들이 바라본 시대상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시대의 가장 입체적인 거울'로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적 총집'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예술에 반영된 무의식의 총집'이 된다. 


당연히, 그 종합된 무의식에는 우리시대의 통속적인 '대인-스키마' 또는 '민족-이미지'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이 반성되지 않는 한 게임 속에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많은 먹이를 잡아먹는 연어나 참치 같은 대형 어류일수록 축적된 중금속이 많듯이, 여러 제반 예술 분야가 용광로처럼 섞이는 게임이야말로 '독성 무의식'이 가장 많이 농축될 수 있는 예술의 형식이다. 게임예술이 가진 이러한 구조적인 위험성은, 게임이 가진 '최종적 종합예술'이라는 구조에서도 드러나지만 그것이 참여적 예술(혹은 '인터랙티브 아트')의 성격을 넘어선 '가상현실'이라는 구조에서 더 이를 데 없이 증폭된다. 이 가상현실이라는 구조는 게임 내부의 언어로 말하자면 체험가능성 · 플레이가능성(playable)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게임의 플레이가능성이 왜 게임이 품은 재현이라는 이슈거리를 증폭시키는지에 관하여서 논해보도록 하자.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일방적인 관객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레거시 미디어와의 단순한 인터렉티브를 넘어서 새롭게 구성된 가상현실에 머무르고, 그 세상에 참여하여, 그곳에서 다른 인생을 경험해 보고, 자아를 실현하고, 세계에 대한 결정을 내리며, 나아가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게 된다. 게임 속에서 발현되는 이 모든 주체적 생동성(dynamic)은, 인간이 '나는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라고 지각하는 주관적 세계 인식에, 우리 원본 지구에 더하여 제2의 지구 · 제3의 지구 · 제4의 지구…를 더하게 된다.


게이밍 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게임이나 메타버스와 같은 (인간의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입장에서) 가상 '공간'을 폄하한다. 그것들이 전원 코드를 뽑으면 사라지는 허상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물류 체인 전원 코드를 뽑으면 우리도 굶어죽어서 사라질 것이다. 주식거래소의 전원 코드를 뽑으면 우리 잔고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안경 공장의 전원 코드를 뽑으면 나를 포함해서 인구의 태반의 시력은 두더쥐 수준으로 곤두박질할 것이고, 난방기구의 전원 코드를 뽑으면 우리는 얼어죽어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이(가) 없으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은, 그냥 '그 물건은 망치로 치면 부서져버리지 않느냐'는 말과 같다. 망치로 부숴야 파괴되는 것보다 전원코드를 뽑는 것만으로 파괴되는 존재가 더 물리적으로 연약한 것이라고 해서, 그만큼 더 무의미한가? 손쉽게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더 가벼운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것은, 존재의 물질적 강도만으로 존재의 가치를 재단하고 자신이 쉽게 파괴할 수 있다고 해서 깔보는, 그야말로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사고방식이다.



메타버스라는 오래된 미래 


물론, 우리의 육체를 올려놓고 있는 이 지구상의 물리적 현실이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존재의 도메인'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비행기 계기판에 실제 인간이 아니라 숫자와 바늘만이 움직인다고 해서 계기판의 숫자 나부랭이가 '의미없다'라고 하지 않듯이, 인간의 정신들로 건축된 가상공간 안에서 인격이 이입된 대리자(아바타)들을 움직임으로써 이 실제 인생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게 될 수많은 정신적인 결정을 내리는, 상호주관적으로 체험가능한 공간이 단지 전산상에 존재한다고 해서 '의미없다'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가상공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욕구를 충족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확장된 현실이다.


오늘날 페이스북이 '메타(Meta)'로 사명을 변경하며 메타버스에 대한 공격적 진출 의지를 드러낸 것도, 이러한 가상현실의 잠재적 위력에 대한 앞선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물리적 현실을 살지만, 가상으로부터 그 물리적 현실을 지배하는 실이 뿜어져나올 때, 또는 거꾸로 인간이 가상을 통해 물리적 현실을 지배하는 실을 뿜어낼 때, 가상은 이미 물리의 일부이다. 이것은 마치 굴삭기 운전사가 직접 삽질을 하지 않고, 대뇌로부터 송출되는 미세한 전기 신호와 그 신호를 약간의 물리적 움직임으로 변환하는 수의근과 그 입력을 유압 모터로 전달하는 클러치간에 연결되어 있는 일련의 전기적 경로를 통해 거대한 굴삭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굴삭기 운전사는 실제 삽질에 비하면 '비교적 가상적인' 일을 수행하지만 결국 가상화된 조작의 결과는 실제 토지의 흙을 퍼올리는 구체적인 굴착 행위로 귀결된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 그렇게 흙을 파는 것은 단순한 세레모니가 아니라 결국 최종적으로 집이나 기반시설을 지어서 우리 몸을 모호하고 공동체를 번영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가상현실이란 (나 자신의 정신과 체험을 포함한) 환경을 조작해서 달콤한 성과를 수확하기를 바라며 구축한, 우리의 수많은 피드백 회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작은 신호를 뿜어내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우리는 세계를 구조화시키는데, 그 구조화 설비가 휴먼인터페이스 측면에서 인지공학/인체공학화되고 전자적 처리 수준에서 고도화된 상호주관적으로 지각되는 인지적 · 체험적 공간 - 즉, '가상현실'인 것이다. 메타버스니, 4차산업혁명이니, VR/AR이니, 게임화된 세계니 여러가지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기는 해도, 결국 모든 것은 신호 교환 행위의 여러 기술적 바리에이션에 불과하다. 오늘날 전자적 신호로만 존재하는 스마트폰 화면이 오히려 그 터전인 우리 실제 사회를 지배하듯이, 인간들의 세계관과 내면이 반영된 게임을 비롯한 여러가지 가상세계 역시 우리 실제 삶과 구체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런 가상세계라는 개념이 21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게임이나 가상현실 또는 메타버스는 전혀 신비롭거나 초월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론에서 다루었듯 게임예술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기존 인간의 관습과 무의식의 지루한 반복이 될 혐의가 있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도 여전히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인간의 오래된 시도가 변주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란 시뮬레이션이며, 

게임과 메타버스는 그 시뮬레이션의 확장 도구이다


게임 또는 메타버스는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그저 기존의 세상을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그 신경과학적 원리에 있어서도, 그저 인간의 기존 지각을 덧대어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지각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다. 인간이 현실 내지는 진실(철학 전공자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독일철학 전통에서 物自體/Ding an sich/Noumenon에 해당하는 것)에 직접 접속할 수 없다는 것은, 딱히 칸트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제는 상식이다. 인간의 정신과 인지는, 실제 물질적 우주 그 자체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우주의 신호를 단서로 하여 주변환경을 그저 재구성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철학계는 그놈의 현상학이니 뭐니 하는 낡아빠진 철학에도 좀 그만 낚시당할 때가 되었다)


바로 그러한 인간 인지의 근본적인 '보안 취약성' 또는 '속임수 취약성' 덕분에, 인간 정신은 지각적 인터페이스에 의해 중개된 또다른 시뮬레이션 유발 자극을 통해 완전히 창조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할지라도, 단지 결과적으로 실제 세계와 비슷한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의 모사(模寫)물만으로도,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 자극이 원래 지칭하는 (인간에게 의미있는) 대상을 느낄 때와 유사한 '체험적 결과'를 일으키는 오감 자극의 모사물만으로도, 우리 인간은 가상 '현실'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인식의 한계 내에서, 게임이 우리에게 제공해왔고 앞으로 더 사실적으로 제공하게 될 가상현실 시뮬레이션과 그냥 실제 지구 세계는 인간의 삶에 미치는 최종적인 결과에 있어서 비슷하다. 우리는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듯이 가상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며, 현실에 지불하듯이 가상세계에 돈을 쓰고, 현실에서 이익을 얻듯이 가상세계에서 이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가상세계 앞에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현실이라고 불렀던 실제 세계는, 우리가 앞으로 윤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신경써야 할 여러가지 '세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동일한 욕구, 진보된 매체, 

달라진 체험, 폭발하는 창발(emerge)


사실 이것은 그리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인감도장은 지면에 날인된 가상세계의 공인인증서에 다름아니다. 명함은 지면에 인쇄된 가상세계의 페이스북 소개 페이지에 다름아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따로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인간의 진화된 인지는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기호' · '의미' · '상징'이라는 효율적인 인지와 상호작용 방식을 획득했고, 기술발달에 따라 기호 · 의미 · 상징이 인쇄되는 증서와 그 증서가 유통되는 플랫폼이 달라졌을 뿐이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의 기호 · 의미 · 상징이 조개껍데기에 인쇄되었다면, 100년 전까지는 지폐로 발행되었고, 오늘날은 신용카드에 기록되며, 앞으로는 NFT토큰 등 블록체인에 기록될 것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4차산업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AI로봇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극도로 발전된 기술을 통해 뭘 하든 간에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돈 벌고 짝지 구하는 욕구를 향해 정렬되어 있다. 두려워 말라. 삶은 근본적인 측면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 중생들은 지금 이 순간도 '양복 입은 침팬지'들의 변주곡 푸가(fuga)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다. 종이 신문을 보다가 인터넷 신문을 본다고 해서 그 매체에 실리는 인류의 본질적인 생활 양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으로부터 비롯하는 기초적인 요구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요구를 더 낫게 더 풍부하게 충족하려는 '공급의 양적 · 질적 발달'은 당대 인간이 연루된 생활, 시대, 사회의 양상을 완전히 새롭게 구성한다. 




석기시대는 돌이 모자라서 끝난 게 아니다.

- 아흐메드 야마니, 前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광물부장관


석기시대와 현대시대의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는 비슷비슷할지라도, 인간의 욕구와 의지를 프로세싱하는 수단(methods)이 달라지면서, 궁극적 관심사에 대한 공급을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새롭게 공급되는 자극의 종류는 다양해진다. 바로 이 지점이, 가상이 현실의 단순한 복제나 '연장(extention)'이 아니라 '확장(expantion)또는 증강(argmentation)'인 까닭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게임을 통해 충족하고 싶은 것은, 일종의 도전과 보상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기효능감이나 보상의 욕구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각각의 게임 속에서 얻는 '전체 체험'들 가운데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심즈 4』를 할 때 얻는 전체 체험과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할 때 얻는 전체 체험, 『돈 스타브 투게더』를 할 때 얻는 전체 체험과 『피파 온라인』을 할 때 얻는 전체 체험은 전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상현실이 자극의 통합을 통해 제공하는 자유의 영역


게임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도전 과제를 제공하는 가상현실인데, 그 과제 수행을 통해 우리가 도전이라는 형식 자체로부터 어떤 공통적인 자기효능감 · 만족감 · 충족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도전의 형식은, 마치 사회심리학 실험에서 쓰이는 사이버볼 게임(Cyberball ; Williams et al., 2000, 재인용 출처)처럼 극도로 단순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게임은, 그 모든 과제들이 제시되는 개연성 · 사실성 · 핍진성을 가능한 한 최대화하기 위하여,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게임의 과제는, 플레이어를 이 가상현실에 몰입하고 자신의 가상역할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현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술적 표현들의 풍부해지고 그 각각의 표현들이 플레이어를 위해 통합되면서, 게임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가상세계 - 즉 사실상의 메타버스로 작용하는 것이다.


통합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컨텐츠이다. IoT의 개념이 202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출현한 까닭은 Bluetooth나 Wi-Fi 등 NFC기술이 2000년대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무도 그걸 통합시킬 필요성을 못 느꼈고 그래서 시장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oT가 등장하자, 이러한 레거시 기술들을 무선적으로 통합해서 운용하겠다는 그 아이디어 자체가 폭발적으로 전파되었고, 이제 IoT라는 시스템 자체가 우리 생활을 지탱하고 있다. 종래의 존재를 통합하는 것은, 그 존재들이 서로 통합되면서 발휘하게 될 잠재력을 분출시킨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잠재력'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으면서 사후에 생성된 효과를 가지고 '이건 원래 있었던 잠재력이지롱' 이라고 말하는 건 결과론적인 진술에 가깝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창발은 인간의 육체적 · 정신적 가능성과 자유를 증폭하는 귀한 것이지만 아무데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기존의 무언가를 통합해보려는 시도만큼은 확실히 창발을 불러온다. 


게임(가상현실) 속에서는 현실을 재창조하기 위하여 예술의 각 제분야들이 종합된다. 그것을 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기호 · 의미 · 상징이 통합적으로 운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창발의 용광로에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추가되는 변수는, 바로 우리 각각의 인간 - 플레이어이다. 그러잖아도 복잡한 세계는, 플레이어의 정신에 입력되는 순간 플레이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신세계의 독특한 해석체계에 의해서 환원불가능한 저마다의 경험과 해석으로 완전히 소화 · 분해된다. 우리가 술 먹고 토한 것을 다시 소주와 막창으로 되돌릴 수 없듯이, 게임에 투여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도 복합적이고 종합적인데 그것을 넘어서 플레이어라는 각자 너무나도 독특한 하나하나의 분쇄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체험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칸트 미학에서 예지된 메타버스의 '자유'


나는 이것을 예술이 제공하는 풍부한 '공급의 여분(surplus of supplies)', 또는 저마다 다른 개개인의 독특한 내면이 촉발하는 '체험의 해석적 여분(surplus in interpretation of experience)'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개념을 보다 선명히 하기 위해서, 칸트 미학과 나의 개념을 병치해서 살펴보겠다. 


칸트 미학에서 제안된,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의 세 번째 계기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Zweckmäßigkeit ohne Zweck)'의 개념을 우선 살펴보자. 칸트의 세계관 안에서, 모든 개념에는 그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이 자동적으로 부착되고 모든 개체에는 그 개체가 쓰일 목적이 자동적으로 짝지어진다. 그런데 예술작품에 있어서는, 그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이 '형식적으로(논리적으로)' 존재하되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재현미술이 아닌,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1982)나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1994)이 도대체 어떤 특정한 실물이나 목적을 가리키고 있겠는가? 

Jean Michel Basquiat, Untitled (1982)
Kusama Yayoi, Pumpkin (1994)

작품1 출처, 작품2 출처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적어도 칸트 미학에 있어서 합목적성은 존재의 형식으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은 예술작품에게도 반드시 깃들어 있을 합목적성을 반드시 추론해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정신이 '분명히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고 있지만 목적지는 알 수 없는 외계 우주선'을 봤을 때 그 우주선이 도달할 곳의 무수한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경이로움을 느끼듯이, 또 '분명히 살아 있지만 왜 살아가는지는 정해지지 않은 人生'의 의미를 상상하며 어떤 아찔한 까마득함과 말 못할 뜨거움을 느끼듯이, 칸트 미학에 있어서도 우리 인간은 도저히 짐작되지 않을 만큼 무수한 예술작품의 목적들을 상상하면서 그 무한함을 헤아리며 느끼는 양적 숭고(Erhabenen)라는 미적 감정에 압도되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사물의 합목적성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예술작품이 명시적으로 지칭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예술의 무목적성을 강조하고 그 목적을 찾는 정신의 활동에서 숭고한 미감이 창출된다는 관점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칸트가 예술철학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바로 이 지점에서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개념과 사물에는 목적이 있다는 칸트의 세계관은, 현세대 철학의 관점에서 비판하건대 그리스철학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물활론적인 실수이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 까닭이 '쓸모 있음'에서 벗어나 목적에 '열려 있기' 때문이라는 칸트의 요지는,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근본적인 최고 속성이 바로 '자유'에 있다는 점을 짚은 최고의 통찰이다.


망치는 쓸 곳이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망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과 운신의 폭은 망치의 목적에 의하여 '한계지어진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비행하는 우주선과 우리의 人生은 그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목적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숭고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대상의 그러한 형식을 아름답다고 느낀다(단순히 '아름답다'라고 하면 칸트미학에서 아름다움의 요건이 대상에 존재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미의 주관성을 강조한다). 만물 대부분에 부과되어 있는 쓸모로부터의 여분에서, 필연적 지향을 벗어던진 공간에서, 숨막히게 요구받는 당위로부터 벗어난 지점에서부터, 자유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해석하기에 칸트 미학의 핵심은, 아름다움의 근본적인 출처가 바로 자유에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미학을 통해 밝혀지는 칸트에 있어서 '자유'의 가치는, 도덕적 행위의 근본 출처가 '안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는 자유 하에서의 도덕적 결단'에서 온다는 것을 밝힌 칸트 윤리학에서의 '자유'와 나란히 설 수 있는, 가장 엄숙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고 인간의 정신을 철저한 구조 속에서 바라보았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란 어떤 의미인지 깊이 숙고하였던 '자유의 철학자' 칸트의 진면모인 것이다. 



창조자가 창조물로부터 해방되는, 

미래가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행위, 예술.


이처럼 칸트가 아름다움의 조건을 '쓸모의 여분으로서' <자유>로 파악하였다면, 나는 확장되고 창발하는 인간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더욱 드넓고 성숙해지는 인간 정신의 조건을 '인간 창조물의 설계 의도의 여분으로서' <자유>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가 생성한 의미들로부터 각도의 삐뚤림, 빗나간 의도, 오해와 오독이라는 일종의 '경험적 윤활유'를 통해 우리의 움직임은 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창작자가 A라고 말한 것을 B라고 오해할 자유, C라고 해석할 자유, D를 자유연상하며 창작의 원래 의도에서 멀어질 자유…. 종합예술이 제공하는 풍부한 자극과, 그 자극이 인간 각자의 독특한 퍼스널리티라는 블랙박스 안에 입력되어 환원불가능하게 다채로운 색으로 해석되고 수용되는 이 '창발의 경로'는 곧 자유의 생성과정이다. 


이 창조적 분쇄의 흐름 안에서, 어떤 정보는 완전히 다른 위상으로 도약하며, 다른 계에서 다른 의미로 재탄생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다시 종속되지 않을 수 있으며, 역사와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창조한 것들끼리의 다시 풀 수 없는 뒤섞임과 그 뒤섞임을 섭취하는 씹기운동의 엇박자 속에서,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경험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의 조건인 '창조적 분쇄'로서 예술의 정점에는, 그렇다면 당연히 모든 예술의 총집이자 주체적 창조가능성이라는 구조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게임과 가상현실(메타버스)이 위치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본따 만들었지만 우리 마음에 전혀 색다른 인상을 남기는 창조된 경험 · 새롭게 생성된 세계에서의 경험 그 자체가 주는 생소함 · 예술이라는 형식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자유로운 해석가능성 · 도전-해결이라는 놀이의 원리가 깔려 있되 그것에 리얼리티를 더하여 놀이를 가상-'현실화' 하는 과정에서 그 극복의 과정이 하나의 서사시가 되고 그 서사는 플레이어의 캐릭터(아바타)와 함께 인격화되는 '신화적 체험' 등으로 구성되는, 압도적으로 자유롭고 열려 있는 창발적 체험은, 오직 게임예술을 위시한 메타버스만이 제공해줄 수 있다.


이것을 보다 기술적인 층위에서 논하자면, 우리 인류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래픽카드'에게 받은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현실세계를 밝히는 불을 가져다 주었다면, 유니티 · 에픽게임즈 · 오토데스크 · 와콤 · 리얼텍 · 엔비디아 · AMD는 가상세계를 밝히는 불을 가져다준 것이며, 그 횃불의 이름은 Geforce Titan X인 것이다. (나도 이거 실물은 신방과 랜더링실에서 딱 한 장 봤다)



우리 인간성을 확장시키는 

체험과 창발의 터전을 지킨다는 것


이처럼, 게임 그리고 게임을 포함한 가상현실로서의 메타버스는 인간이 가진 자유와 창발을 생성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점에서, 그리고 또한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가치'와 '종잇돈'을 구분하지 못해왔듯이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메타버스'를 통해 우리 '현실'은 점점 더 확장되어갈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앞으로 우리 삶이 의탁될 사실상의 시공간이며 또한 인류가 지닌 인간성을 보다 긍정적으로 조성(shaping)해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신경써야 하는 '공유지'(네그리&하트의 맥락에서 'the commons')인 것이다. 메타버스는, 자유를 생성하는 공유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메타버스의 창발이 뻗어져나가는 '방향', 그리고 그 창발 속에서 생성되는 자유의 '주제(theme)'에 대해서 비평하며 비판해야 한다. 게임-메타버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을 가진 체험의 군집을 창출할 것인가? 어떤 '스타일'로 창발할 것인가? 게임-메타버스가 제공하는 체험은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윤리적 함의를 가질 것인가? 어떤 현실을 기반으로 한 가상현실을 제공할 것인가? 어떤 사상을 반영한 서사를 제공할 것인가? 우리를 결과적으로 무엇에 동조하게 하고, 무엇을 수용하게 하며, 무엇을 거부하게 하고, 무엇에 주목하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전통적 문화비평의 언어로 하자면 '정치성' 또는 '정치적 함의' 인데, 나는 '정치성'이라는 어휘에 담긴 뜻만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의탁할 '공유지'에 관하여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뇌의 성격이 다 표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확장되는 세계를 형성하는 재료는, 언제나 기존 세계에서 본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세계의 의미망(각 의미들간의 관계와 상대적 값어치들), 기존 세계의 가치관, 기존 세계의 신화적 사고방식, 기존 세계의 갈등구조, 기존 세계의 편견과 오해, 기존 세계의 무의식까지 모두 복사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긍정적인 게임-메타버스를 구축하기 위한 기획은, 반드시 메타버스 이전에 존재한 여러가지 세계(혹은 브론펜브레너의 관점에서 '체계')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고뇌를 모두 포함하여, 그 원본 고뇌가 메타버스의 '창조적 파쇄'를 거치면서 새로이 파생된 생소한 문제점에 대한 임기응변을 모두 성실히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만. 이 시점에서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아니, 언제는 개인의 독특한 정신적 해석체계에 의하여 환원불가능한 다양성으로 이해된다며? 그리고 그것이 예술과 메타버스가 제공하는 근원적 자유라며? 그런데 왜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기존 세계의 '정치성' 이라는 성격, '윤리성' 이라는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지?" 좋다. 좋은 질문이다.



자유는, 프랙탈처럼 육체가 한계지은 대역폭의 

안으로 안으로 우그러들며 피어난다


왜 게임-메타버스가 인간에게 필연적 법칙들과 생활의 지루함을 넘어선 자유를 창출하는 창조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현실의 한계와 과오를 여전히 반영하는지 논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앞서 다루었던 '굴삭기의 비유'를 다시 언급해야 한다. 즉, 가상은 현실의 연장에 불과하며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은 어떤 물리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구조화된 피드백 회로라는 주장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 게임-메타버스가 '창조적 분쇄'를 통해 기존의 표현들을 새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호 · 의미 · 상징에 대한 여분을 열어주고, 또한 거기에 개별 인간의 참여라는 계기를 둠으로써 인류가 가지는 정신적 자유의 가장 강력한 플랫폼이 되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환원불가능한 새로움과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에도 어떤 '대역폭'이 존재한다. 해석의 대역이 한계지어지는 범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해석이라는 행위가 우리 실제 세계와 물리적 육체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격발된 한, 그 행위의 전반적인 방향성은 우리 환경과 (정신을 포함한)육신의 조건들에 제약당하기 때문이다. 가령 거의 모든 인간들이 돈을 벌고 번영하려는 행위의 일관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 행위의 확장된 버전인 게임-메타버스 역시 그 경향성을 배반할 수는 없다.


물론 가상현실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때로는 현실과 색다른 시도를 해 볼 수도 있고, 가상현실의 예측불가능한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현실에서 되풀이해오던 가치관이 내가 알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 사람은 어떤 게임-메타버스에서의 체험이 현실에서의 스키마 · 욕구 · 가치관 · 사고방식과 아예 완전히 다르면 그 가상현실에 머무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머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색다른 체험이나 유튜브에 리뷰할 자극적인 유흥거리로 소비될 뿐이지 실질적으로 한 사람의 삶이 적극 연루되는 확장된 '현실'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게임-메타버스는 자유롭게 넓어지는 광활한 공간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기존 현실의 복제가 일어나는 곳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게임-메타버스가 약속한 '자유'는 어디로 가는가? 왜 인간은 메타버스에서 '창조적 파쇄'를 통해 자유로워지는데, 동시에 그 자유는 육체성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가? 자유와 한계. 이 서로 모순된 개념은 어떻게 메타버스 안에서 양립할 수 있는가? 


나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중학수학에서 배웠던 '유리수의 조밀성' 개념에 비유해 보려고 한다. 어떤 임의의 두 유리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유리수가 존재한다. 예컨대 유리수 1과 2를 생각해보면, 1과 2 사이에는 1.5가 존재한다. 1과 1.5 사이에는, 1.25가 존재한다. 1과 1.25 사이에는……. 이런 식으로 두 유리수 사이에는 반드시 무한한 양의 무리수가 존재한다. 두 개의 유한한 고정된 지점 사이에 무한한 수가 존재하고, 그렇기에 우리가 얼마나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무한히 많은 값을 발견할 수 있다는 유리수의 조밀성(그리고 실수의 연속성) 개념은, 인간의 정신-문화가 무한히 자유롭게 다양히 뻗어나갈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이 처한 세계와 육체에 얼마나 절대적으로 구속되는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비유할 수 있는 알레고리이다.


유리수 1과 2라는 대역 사이에 무한히 많은 유리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아무리 새롭고 혁신적인 게임-메타버스를 만들지라도 그 '무한한 가능성의 대역폭'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기존 세계 안에서 제한적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다. 게임-메타버스의 모든 예술적인 표현가능성과 창발의 가능성은, 우리의 머리끝에서 시작해서 발끝에서 멈추고, 남극에서 시작해서 북극에서 멈추고, 가장 호의적인 감정에서 시작해서 가장 공격적인 감정에서 멈추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에서 시작해서 가장 허구적인 이해에서 멈춘다. 예술적 재해석은 그 원본의 대역폭 안에서, 그것을 재현하고 재해석하고 그 원본 육체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무한히 다양해질 뿐이지, 그것과 무관하게 그것의 '바깥으로' 다양해지지 않는다. 수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게임-메타버스의 창의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인간의 원래 삶 바깥으로는 '발산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래부터 살아 왔던 기존의 육체적 세계, 기존의 분노와 차별, 기존의 세계관은 메타버스에 그대로 반영된다. 오늘날과 같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서 편견이나 멸시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유에서 뻗어나온 예술작품이 게임-메타버스에 복잡하고 환원불가능하게 얼키고설킨다 할지라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 · 증오 · 공격이라는 감정은 숨길 수 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불교 경전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이런 격언이 있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된다". 물이 젖소라는 필터를 거쳐서 물보다 훨씬 더 복잡한 우유가 되듯이 그러나 물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듯이, 소주와 막창을 먹고 토했는데 와인과 치즈가 튀어나올 수는 없듯이, 게임-메타버스의 다양해진 표현과 창발하는 체험도 기존 세계에서 입력된 정보 및 감정의 성격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증오와 편견이 메타버스 안에서 창발하지 않도록,

통찰력과 자비심이 메타버스 안에서 창발의 날개를 달도록.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 게임-메타버스에서 창발하는 자유는, 넓이가 1이지만 표면적은 무한한 프랙탈 도형처럼, 인간의 원래 세계가 한계지은 가능성의 안으로 안으로 우그러드는 형태로 피어난다. 창발은 물론 예측할 수도, 창발된 것을 그 이전 단계로 환원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육체라는 한계를 가진 인간의 행위라는 점에서 완전히 제한없이 '발산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무한히 창발하고 변주될 인간의 예술적 · 창조적 표현에 어떤 지혜와 이해심과 감정이 담아낼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해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원본 세계와, 우리의 게임-메타버스의 창작행위와, 그 게임-메타버스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의견을 표현하는 비평행위에 의하여, 그리고 공통적으로는 '예술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현실에 대한 개입'에 의하여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되고 유도될 수 있는 것이다.

멩거 스펀지(Menger sponge) 프랙탈

자료 출처


이 글의 앞에서, 오늘의 주제인 게임-메타버스 그 자체를 논하지 않고, 갑자기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되풀이되는 현실의 사고방식들 · 예술작품에 나와 관계없는 인간들을 등장시키는 방식들 · 가상에서 현실이 재현되는 방식들에 관하여 논한 까닭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지금 굉장히 문제가 많은 실제 21세기 지구와 우리 문화의 현실을 가상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극도로 세심한 윤리성을 제고하지 않는다면, 메타버스는 우리 세계의 악랄한 부조리도 함께 증폭할 것이다. 


세상을 혹은 세상의 가장 약한 사람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우리의 가치체계와 윤리적 행위체계를 원점에서 반성하지 않는다면, 가상세계는 그냥 더 넓어진 지옥이 되는 것이다. 게임 안에서도 수많은 경매장 시세조작과 사기 사건이 터져나오는 온라인게임 『던전&파이터』를 보라. 로또와 승부조작으로 돈을 버는 세계에 살던 인간들이 그 버릇을 못 고치고 들어간 가상세계에서 저지른, 『메이플스토리』 뽑기아이템 확률조작 사건을 보라. 반복될 뿐이다. 현실의 비루함과 지리멸렬함이 반복될 뿐이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은, 가수 파인애플이 부르고 자신이 피쳐링으로 참여한 「마린의 후회」라는 곡에서, "이제 총소리는 게임 속에서만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게임 속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완전히 가상적인 총소리가 아니라, 그냥 실제 전쟁을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실제 전쟁의 가상적 되풀이일 뿐이다. 오늘날의 게임은 인간의 공격성향과 경쟁성향을 신화적 서사로 승화시키고 인간의 되풀이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가상 샌드박스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실제 전쟁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한 현실을 되풀이하는 지리멸렬한 동어반복인 것이다.


현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현실이 가상현실에 반영되는 창작의 경로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게임-메타버스에 우리가 기대하는 무한한 창발과 자유의 포텐셜은 현실세계 인간의 비윤리적 허물들을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재생산해 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구속되고 또한 자신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필연의 세계에 구속되지 않기 위하여 가상현실을 만들었지만, 그 가상현실에서 증폭되는 인간의 죄에 다시 사로잡힐 위험에 처해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파인애플 - 마린의 후회 (Feat.임요환&T1)



자유와, 

그 자유의 틈 안에서 샘솟는 윤리를 향한 시도를 응원하라


나는 우리가, 나는 게임-메타버스를 더 윤리적이고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도구로 활용하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 게임-메타버스는 현실을 똑같이 만들어서 보여주는 단순한 '체험형 3D 미니어쳐'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경험, 결단해볼 기회가 없었거나 결단하지 못한 어떤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경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공동체의 역동을 실험하는 테스트베드(testbed), 현실에는 만나지 못한 존재들과 인격들을 서로 이어주고 만나게 해 주는 '서로주체성의 시뮬레이터'의 성격으로 사용되었으면 한다. 게임-메타버스에 내장된 종합예술이자 가상현실로서의 능력은, 새로운 체험과 타자에 대한 추체험에 있어서 '시뮬레이터'가 되어주고, 새로운 윤리적 결단과 공동체적 경험이 출현할 가능성에 있어서 '자유'를 창출하는, 윤리적이고 건설적인 미래를 미리 살아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디스 워 오브 마인(2014)

이미 수많은 깨달은 게임 개발자들이, 게임-메타버스의 그런 잠재력들을 사람들에게 더 의미있고 시의적절한 경험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좋은 게임들을 만든 바 있다. 내전에 휘말린 어느 봉쇄된 도시에서 펼쳐지는 주민의 생존기를 다룬 로그라이크 횡스크롤 생존 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멋진 시청각적 여정을 통해 다채롭게 변주하고 체험시켜주는 2인 협동 게임 『잇 테이크 투(It Takes Two)』, 척박한 세계를 일구어내고 상상을 현실에 건축해내며 공동체와 협력하는 것의 의미를, 자아실현욕구가 추동하는 자연스러운 협동과 개척의 체험 속에서 느끼게 하는 샌드박스 게임 『마인크래프트』. 이 외에도 많은 게임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앞으로 우리가 실험해볼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행동과 관점들을 미리 이곳에 시현해주었다.


게임-메타버스 윤리학을 건축해나가기 위하여서는 하나의 완결된 종합예술로서 게임도 눈여겨 볼 가치가 있지만, 최근 많은 게임 제작사들이 전반적으로 자사의 게임에 적용하고 있는 일종의 정책적 경향성도 나는 오늘 특별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것은 바로 다양성에 대한 지향이다. 오늘날 게임개발회사들은,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이라는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실제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자사의 게임에 대거 등장시켰다. 



어떤 추체험의 윤리


배틀필드 1(2016)

1차세계대전을 다룬 EA의 『배틀필드 1』(2016)은 타이틀 표지와 싱글플레이 캠페인에 아프리카계 미군, 베두인족 여성 군인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1차세계대전의 숨은 참전군인들을 등장시키며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세계사를 결정지은 전쟁에 참여하고 역사의 일부가 된 참전용사들은 유럽인 남성이 아닌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당연히 많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와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그들은 다수자들과 동등하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EA는 『배틀필드 4』(2014), 『배틀필드 5』(2018)에서도 싱글캠페인과 멀티플레이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여성 및 소수자를 꾸준히 등장시키며, 게임-메타버스가 현실세계의 불평등한 '소수자 존재의 가시화' 문제를 대중문화의 강력한 인지도와 가상현실이 가진 창조성을 통해 보완하는 중요한 예시가 되어주었다.


오버워치(2016)

블리자드 사의 FPS게임 『오버워치』(2016)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포착된다. 오리지널 작품을 브랜드의 최상단에 놓고, 그 아래에 굿즈 · 음반 · 의류 · 오프라인 행사 등 여러가지 파생된 컨텐츠를 수직계열화하는 디즈니의 전략처럼, 블리자드 역시 『스타크래프트』 · 『오버워치』 등의 오리지널 IP를 상업적 · 컨텐츠적으로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하위 파생 미디어를 생산한다. 이러한 미디어는 제공하는 의미 체험이 비교적 단순한 '반복적 총싸움 게임'인 『오버워치』에 서사와 사회적 함의의 깊이를 더해준다. 특히 『오버워치』의 전성기에는 매 대규모 업데이트가 있을 때마다 신규 캐릭터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와 이벤트성 마이크로사이트가 열리곤 했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플레이하는 여러 캐릭터들이 여성 · 동양인 · 동성애 · 장애 · 정신 질환 · 고령 · 비만 등과 같이 현실세계에서 멸시받고 공격당하는 여러가지 불리한 (그러나 불리해서는 안 될) 삶의 조건이자 삶의 일부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꾸준히 주어져왔다. 


이렇게 블리자드는 『오버워치』에 등장하는, 우리가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32명에게 각각의 독특한 소수자적 서사와 정체성을 불어넣었다. 이 덕분에 현실의 수많은 복잡하고 불리한 서사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게임이라는 가상현실 캐릭터를 조종하면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 나를 대표하고 그래서 더 이입할 수 있는 게이밍 경험을 갖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계기로 소수자와 약자를 한 번 더 알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기에 느끼게 되는 거부감과 혐오의 감정을 접촉을 통한 친밀감과 익숙함으로 바꾸어내게 되었다.



타자와의 만남으로서의 게임-메타버스


소수자성을 게임-메타버스의 캐릭터성과 짝지은 『오버워치』의 시도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게임 개발팀의 소수자성/약자성 재현의 윤리는 더욱 정교해져가고 있다. 단순히 하나의 캐릭터와 하나의 소수자성/약자성을 연결짓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전체 창작물의 세계관 속에서 서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도 시도되고 있다. 리스폰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한 배틀로얄 하이퍼FPS 게임인 『에이펙스 레전드』(2019)가 바로 그 현장이다. 예컨대 이 게임-메타버스에서 정찰병 캐릭터인 '블러드하운드'는 성 정체성이 '논바이너리'인 캐릭터이다. 개발팀은 단지 설정만 그러하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가상현실의 예술성과 창조가능성을 십분 활용하여 '자기 성별을 남성이나 여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력있게 체험시켜 주었다. 머리 전체에 투구와 방독면을 씌우고 체형을 모호하게 설정하고 목소리를 중성적으로 변조함으로써, 블러드하운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과 전형적인 젠더 표현에 붙잡히지 않은 '성별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을 추체험해볼 수 있었다.


에이펙스 레전드(2019) 그리고 나의 원픽 블러드하운드

이 게임은 캐릭터들이 엄청나게 말이 많고 개성있으며 자기표현을 숨기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플레이하다보면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시도때도없이 한 마디씩 덧붙이는 말들에 묻어있는 그들의 관점들을 들을 수 있고, 시즌마다 새로이 제공되는 공식 미디어믹스를 통해 폭넓게 묘사되는 이 캐릭터들의 면모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종합예술이 '종합-인격예술'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 정체성을 굳이 온몸에 걸치고 살아갈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 · 목소리 · 태도 · 자세 · 시야 · 의견들을, 플레이어들은 '내가 그 사람이 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겪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에이펙스 레전드』를 하면 블러드하운드를 주로 선택하는데(1티어 정찰병 필수 캐릭터임), 이 캐릭터로만 수백 시간을 플레이했고 랭크를 플레티넘까지 올리면서도 '아 이 캐릭터는 남자네 나와 같은 성별이네?' 또는 '아 이 캐릭터는 여자네 나와 다른 성별이네?' 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가상적 삶의 추체험 속에서, 나는 현실과 가상을 막론하고 누군가의 성별을 지속적으로 의식해야 하는 피곤함의 바깥에 잠시 서 볼 수 있었다. 마치 세상의 젠더 문화라는 시끌벅적한 고깃집을 빠져나와 조용히 아이스크림 하나의 맛에 집중하는 듯한 고요함이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것이 상관이 없는, '사냥꾼' 블러드하운드에 대한 탈-젠더화된 체험은, 젠더에 대한 내 상상과 경험의 폭을 넓히고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또다른 생소한 삶의 모습들을 마주할 나의 생소함을 길들이는 하나의 만남이었다.



사회통합을 위한 만남을 가속하는 광장으로서 

'게임-메타버스'를 위하여


오늘날 이러한 다양성을 지향하는 시도들은 남성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 묻었다' 라는 조롱으로 폄훼되기도 한다. 그 'PC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게임 안에 소수자가 나오는 게 싫다'는 것을 요지로 한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대중문화에서 대부분의 군인은 유럽 백인 남성이었는데 내가 왜 생소한 소수자나 약자들을 게임에서까지 봐야 하느냐?" 는 것이 한국의 여러 남초 사이트에서 울려퍼지는 'PC 묻은 게임들'에 대한 비난의 논거인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양식 있는 사람들을 분개하게 하여 왔다. 


하지만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저런 격렬한 감정적 반응이야말로 현세대 게임-메타버스가 참가자들에게 무언가 뚜렷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숙치 않은 소수자들'을 묘사한 게임 경험 안에서, 이용자들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존재들과 맞닥뜨리고 · 상호작용하고 ·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 세계와 자신의 기존 생각에 대한 어떤 고민이 필요한 불일치들을 발견하고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내가 전부라고 믿어 온 세계의 '여분'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들이다. 물론 자신이 익숙지 않은 존재들과 맞닥뜨리며 남초사이트의 안타까운 사내들처럼 'PC주의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고 비분강개할 수 있겠으나, 그 분노의 반응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COVID-19 백신 2차접종 후에 찾아오는 몸살처럼 그들의 정신 안에는 타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점점 갖추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게임-메타버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만남'은 단지 소수자와 약자와의 만남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받아들여야 할 여러가지 환경과 사회상, 기술과 제도, 아픔과 고뇌, 희망과 기투, 선행과 연대의식, 패션과 미학적 시도들도 게임-메타버스에서의 '미리 만남'속에서 익숙해진다. 그리고 종합예술이라는 구조가 제공하는 아름다움이라는 쾌락을 통해, 그러한 낯선 만남들은 궁금하고도 신비로운 벌써 친밀한 어떤 것으로 격상된다. 그리고 가상세계라는 구조가 제공하는 유저의 주체적인 참여와 사실적인 상호작용이 이끌어내는 무한한 창발 속에서는, 우리 사회를 모두 이롭게 할 수많은 가능성들이 제안된다. 바로 이렇게 우리 사회가 그리고 인류가 택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선택은 더욱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종합예술, 창발, 참여, 타자와의 추체험과 커뮤니케이션 : 바로 이 구조적 특성들이, 게임-메타버스가 단지 오락거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더 자유롭게 하는 어떤 만남의 광장이 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저 구조적 특성들이 현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더 희망을 주고 더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고 비평해야 한다. 게임작품 그 자체에 대한 평론도 중요하지만, 현시대 게임과 현시대 세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그 드넓은 계면(界面)을 늘 종합적이고 비평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게임-메타버스는 우리가 맞이할 내일의 '오픈 베타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Sieon Na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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