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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Feb 14. 2022

마음의 돌비석으로,
번뇌를 죽이고, 손해를 이익으로

번뇌의 독립성과 편재성을 응용한 불교 심리관리 기법

불교의 가르침을 오늘의 주제에 따라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 "인생은 개인플레이 이며, 나의 내면은 전적으로 자기책임이고, 또한 자기 관리기술 하에 놓여있다." 불교는 우리에게 주로 번뇌를 다스리는(관리하는) 법을 알려주는데, 그것의 핵심은 번뇌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과응보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와는 상관없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번뇌는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에게 발생할 때도 있고, 죄를 지은 사람과 업을 지은 사람에게 발생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 점에서 번뇌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은 오직 '번뇌로부터 살아남아야 할 책임'만을 자기 스스로에게 지는 것이다. 또한, 번뇌에 있어서의 승패는 오직 자기 자신이 자신의 분노 · 증오 · 탐욕 · 어리석음 등과 같은 두개골 속 자기계정 내부에서의 관리에서 이기느냐에 달려있다. 만약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한 어떤 분쟁의 상황에 있더라도, 가해자가 죄책감이나 증오심으로 스스로의 수명을 깎아먹고, 피해자가 평화롭다면, 가해자는 번뇌에 있어서 피해자를 해치지 못한 것이고,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승리한 것이다. 반대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어떤 사건에서 아무런 정서적 동요도 느끼지 않았다면, 둘 모두 동시에 승리한 것이다.


보다시피,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내면이 -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생각에 영향을 받는 구조가, 통상적인 세계의 선/악, 가해/피해, 죄악/응보 체인 구조와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매우 잔인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의 내면과 객관적인 사건이 사고 관리 기술을 통해서는 어느정도 분리될 수 있고, 그것이 피해자의 복지를 지켜낼 레버리지가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 사실 그 자체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번뇌의 독립성과 편재성" 이라고 부른다. 번뇌는 이렇게 인간의 잘잘못과 독립적으로 발생하고, 또한 어떤 곳에는 있지만 어떤 곳에는 없으며, 어떤 곳에는 있게 만들 수 있지만 어떤 곳에는 없게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에 관한 한, 우리는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가해자가 자신의 분노와 증오로 괴롭고, 어떤 피해자가 그것에 영향 받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세계에서는 따로 피해평가와 후속조치가 필요하겠으나, 우리의 번뇌가 발생하는 주관적인 세계에서는, 가해자는 자신의 증오가 담긴 행위에 의하여서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는 아주 매끄러운 거울로 가해자의 레이저 공격을 반사시켜 피해자에게 자신의 죗값을 돌려주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가해행위로 인하여 더 단단해진다면, 피해자는 그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를 입은 사건을 생각할지라도 괴롭지 않다면(심리치료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고통받은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를지라도 고통받은 기억 속의 고통을 지금 굳이 불필요하게 재현하지 않을 수 있다면(심리치료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기억과 현실의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심리치료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괴로운 기억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면'(심리치료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피해자는 현실에서 가해자의 행위로부터 상관없어지고, 사건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은 가해와 피해의 사건에서뿐만이 아니라, 아무런 뚜렷한 개인 가해자가 없는데 나 혼자 피해를 본 상황, 예를 들면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내가 졌을 때(새벽 3시 30분까지 유튜브 쇼츠 보기), 모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았지만 나에게 큰 상처로 남았을 때(양육자의 지리멸렬한 이혼), 과거사로부터 주어진 정치사회적 재앙(다행히도 폐지된 낙태죄나 아직도 폐지되지 않은 징병제), 그냥 운이 없이 당한 나쁜 일들(운동하다가 입은 부상이나 도로에서의 안전사고) 등으로부터도, 우리는 저 비극적인 사건과 지금-이곳에 존재하는 나의 두개골 안의 정신세계 사이에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


이러한 번뇌에 있어서의 균형잡히고 종합적인 승리를 위하여서는, 두개골 안의 자기계정 안에서의 승리와 두개골 밖에서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세계에서의 승리를 따로 떼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해와 피해가 일어난 한, 공동세계에서의 피해사건은 명백히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두개골 안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교가 우리에게 안내하는 축복이지만, 우리가 그 승리 때문에 공동세계에서도 승리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루쉰의 '아Q정전'에 나오는 이른바 '정신승리'가 된다.


우리에게 두 층의 전쟁터가 있음을 기억하라. 공동세계에서 피해받은 것은 피해받은 것이고, 그것대로 복구하고 또한 적절히 보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폭력 피해나 남자들이 당한 강제징집 피해를 묵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세계에서의 피해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면, 우리는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피해를 깨달음과 초월과 자기 재정립을 수행하는 '재료' 또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불교는 우리에게 인생 손해 보지 말라고 가르친다. 돈 한 푼, 시간 하루, 인연 하나 손해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객관적인 공동으로 살아가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분노 · 욕심 · 공격성 · 복수심 · 증오심 · 공포 · 저항감을 얻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번뇌를 되풀이하며 제 살 깎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 전체의 손익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삶은 지금-이곳에 있기에, 지금 당장 나에게 닥쳐오지 않은 내 상상속의 증오나 조바심이나 두려움은 망상임을 알려준다. 정신조차 근본적으로 시뮬레이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육체를 경영하는 조종실의 화면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시뮬레이션은 아니다.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진정한 시뮬레이션은, 지금-이곳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들이다. 오직 내 두개골 속 정신의 '자기계정' 안에서 일어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괴로운 번뇌들과, '마음이 콩밭에 가는' 현실 집중 이탈 현상이다. 그것이야말로, 쌀이 다 떨어져 가는데 컴퓨터게임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현실을 돌보지 못하고 진짜 가상세계에 몰두하는 행위인 것이다. 마음의 고통은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제거되는 편이 좋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손해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돈 한 푼, 시간 하루, 인연 하나를 시원하게 내어주고, 욕설도 듣고 협박도 듣고 뒷담도 들으며, 그 모든 것에 손해보지 않는 영원한 승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나를 해치려는 자들은, 나를 해치려는 마음이 짜낸 코르티솔로 스스로의 수명만 깎고, '다른사람을 자비와 인정 없이 대하는 중생' 이라는 욕과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가리라. 그 죄과는 나에게 행위한 행위자의 것이지, 그 행위의 대상인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 돌비석의 비문(碑文)이다.


이러한 진실을 돌비석처럼 선언하고, 심지어 만약에 가능하다면 나에게 손해 준 자를 용서까지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드높은 자기통제의 개선문을 지나 차원이 다른 우월의 길로 가는 것이다. 우월한 자는 화내는 원숭이를 용서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잔인하게도, 우월한 자는 그 원숭이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용서는 가해자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 못박기이다. 용서를 통해, 우리에게 그 사건은 종결되며, 이 사건에 남는 것은 가해자의 불명예와 자기폭력밖에 없어진다. 


덕이 아니라 증오와 공격성으로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자는, 어떤 약한 피해자에게는 흉터를 남길 가능성이 있지만, 강한 피해자에게는 무화(無化)된다. 타인에게 못되게 행동한 대가로, 자신의 일부가 이 세계의 전체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데, 타인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탄핵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미성숙하고 자비없고 못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인다. 


가해자가 아주 교활하여서 명예도 손상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에게 별다른 타격도 주지 않았더라도, 그는 죄악의 '중심 극한 정리'를 완성하는 또 한 번의 사례를 추가한 것이다. 운이 좋았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못되게 하는 한 번의 시행에서 화를 입지 않았다면. 그러나 우주의 그 어떤 개체도 통계를 피해갈 수 없고, 자신의 행위경향성이 만드는 확률적 중간값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도 없다. 자신이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행위하는 한, 반드시 어느 점에는 '그 대가의 중심경향치(Central tendency)'가 찍히게 되고, 그 점의 위에는 누군가에겐 이불처럼 누군가에겐 무덤처럼 내 행위 대가의 '정규 분포 곡선'이 그려지게 된다. 누군가 못된 경향성을 가지고 한 번의 행위를 했다면, 그 대가가 요행히 평균에서 가장 자비로운 영역에 찍혔더라도, 언젠가는 그 후과(後果)가 통계 평균을 향해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연의 섬뜩함이다. 인연의 섬뜩함은, 결코 타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로부터, 타인을 해치고 살면서도 타인을 원하고 타인에 의존하며 타인에게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이 언뜻 보기에는 탈정치적이고 피해자에게 회복의 책임을 씌우는 것으로 읽힐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는, 인간사이의 (혹은 인간과 다른 생물 또는 지구 생태계 사이의) 가해와 피해에 대하여 섬짓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교 가르침이 모든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특히 미시 사례관리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그 빈 자리를 불교가르침 이라는 '미완성 범용기계'를 사용하는 우리가 채워야 한다. 사회참여나 정치투쟁에 대한 통찰도 미약해서, 인간세계의 정의구현을 장기적 확률론에만 맡기는 실책이 크다. 다만 그것이 불교의 정치적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피해자가 스스로 회복해야만 하고, 행위의 결과나 인과응보가 행위 그 자체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은 사실 불교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원래 구조이다. 불교가 사라진다고 해서 행복한 가해자가 사라지고 불행한 피해자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불교는 오해받을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오히려 세상의 원래 구조가 그러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그것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지혜를 참조하는 수많은 생활인과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이, 이 구조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불행한 가해자와 행복한 피해자를 만들 수 있을지 설계하게 한다. 


이 글 역시 그러한 설계문(設計文)의 일환으로 집필되었다. 이 글을 있게 한, 나의 몇몇 가해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여러분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 담긴 메시지와 노하우를 잘 활용하셔서 생활에 보탬이 되신다면, 제가(필자가) 과거에 입었던 피해들은 아름다운 결과로 완성되는 것이다. 거의 모두 용서했고 또한 무화된 일이므로, 이제 여기에 정제된 영양분이 있다.


자 우리는 이제 마음을 돌비석처럼 굳게 세운다.


가시라, 가서 행복하게 사시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Nathan Wat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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