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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Feb 18. 2022

군인을 위하여.
사회적 약자인 군인을 위하여.

군인과 군대에 대한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개혁적 접근


읽기에 앞서 : 이 글은 A4용지 40페이지에 달하는 긴 글입니다. 저는 주로 페미니즘이나 사회복지에 관한 글을 써왔지만, 오늘만큼은 거의 대부분 지면을 남자를 위하여, 군인을 위하여, 군 장병을 위하여 안배하였습니다. 또한 이례적으로 군인과 군대에 대한 진보 · 좌파 · 페미니즘 그룹 내부의 균형잡히지 않은 접근에 관하여서도 내부적인 관점에서 비판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파격적인 주제를 선정한 까닭은 갑자기 변절했다거나 아니면 서서히 변절했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평생 일관되게 주장해왔던 인권 보호와 노동자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라는 윤리적 기준의 구체적 적용이 군과 징병제의 문제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단락마다 따로 소제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긴 글을 읽으시며 발견할 '이스터 에그'처럼 남겨두고, 앞으로 나올 내용에 관하여 12가지의 주제를 추려서 먼저 보여드립니다. 모두 재미있고 심각한 주제이니, 부디 읽어 보시고, 너무 긴 글이라서 정주행을 할 '동기부여'를 얻고 싶으시다면 주제 11을 먼저 보시고, 나머지 주제들을 읽어보세요. 1~12까지의 주제들과 소제목 및 단락들은 대략적으로만 일치합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주제 1. 피해자로서의 군인을 선언하다
주제 2. 어떤 존재를 위해 주장한다는 것에 관하여
주제 3. 좌파와 군인의 미묘한 인연 
주제 4. 전쟁억지력을 생산하는 중요한 사회적 분업, 군사노동.
주제 5. 군인이라는 보상받지 못한 직업 - 직업상담가의 관점에서
주제 6. 제5기갑여단 전차조종수 故변희수 하사를 기리며
주제 7. 감사를 멈춰라. 지갑을 열어라. 현금으로 보상하라
주제 8. 군가산점제도가 위헌인가? 그럼 강제징병제는 위헌 아니고?
주제 9. 군대와 페미니즘 - 내부비판 관점에서
주제 10. 군인을 피해자 공동체에 받아들이자
주제 11. 27조 3천억원 - 대한민국을 모병제로 만드는 구체적인 예산
주제 12. 군인을 중산층으로 대우하자. 군인을 자유민으로 대우하자.



피해자인 군인


군인들은 애국의 피해자다. 정부를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피해자라는 것이 아니다 - 어떤 직업들은 사회를 위해 특히 더 희생한다. 정부를 위해 일하고자 기약 없는 9급 공무원시험 · 7급 공무원시험과 같은 공시 응시자들은 희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돈과 복지의 방식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군인들은, 군인이라는 직업적 특수성이 초래하는 훨씬 더 강도높은 인생 전체의 손실을 애국심이라는 가상화폐로 보상받을 뿐, 돈과 사회보장으로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자인 것이다. 군인의 위험은 '애국심'이라는 가상화폐가 아니라 '현금'으로 환산되어야 하며, 그 환산은 지금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군인들에 관한 문제를 뒤통수에 쥐고 살아왔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군인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벼루어 왔다. 나는 언제나 약자를 위해 글써왔고, 약자를 돕고 강화하는 법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렇게 군인에 대하여 글을 쓰고 있다. 어떤 분들은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군인이 약자라고?" 물론 일반적으로 군인이 약자라는 인식은 별로 없다. 통상적으로도, 군인은 가령 '강인한 국군' 과 같은 식으로만 이해되고 표현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군인이 강자라는 것은, 단지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강자라는 것은, 마치 역도 선수나 복싱 선수가 힘 세고 싸움을 잘 하기 때문에 강자라고 간주하는 것과 같다. 물론 역도 선수가 올림픽에서, 복싱 선수가 링 위에서는 강자이겠지. 그렇다면 군인도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는 특정한 그들을 위한 '링' 위가 아니라면, 어떤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우리 대부분보다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오늘 그 '어떤 여러가지 이유들'이 무엇인지 말하고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현직 군인이나 주변에 군인이 있거나 군인을 생각하는 분들께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군인들이 더 많이 지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군국주의나 국가주의, 군사주의, 선군정치주의, 혹은 내가 군대 나왔으니 군대에서 내가 부하직원에게 존중받던 것만큼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입의, 이른바 '군무새' 관점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현행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버전의 군인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군인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군인을 '위해서' 글을 쓴다. 무언가의 입장에서 글쓰는 것과 무언가를 위해서 글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내가 아닌 무언가를 위해서 글쓰고 주장하기


예컨대, 내가 성매매 여성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면 내 글은 성매매에 대한 정당화로 가득할 것이다. 성노동론자들의 에세이처럼, 성매매가 얼마나 해봄직하고 수지타산이 맞고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일인지 써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과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같은 정신병약을 먹고 같은 학력/경력/인맥 단절에 시달리지 않는 한, 진실된 글을 쓰고자 노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성매매당사자들의 사정을 '꿀빠는 것' 또는 '견뎌봄직한 것'으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성매매는 본인의 뇌와 정신을 서서히 융해되게 만드는 느린 자살이다. 자살하는 사람에게 자살의 정당화를 평가하게 할 수는 없다. 자살자 이외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정도의 타자화(=객관화) 속에서 그 대상이 되는 타인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이 '무언가를 위해서' 글쓰고 주장해야 한다.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진보활동가(여기서는 '좌파'라고는 하지 않겠다 - 왜냐하면 보통 소수자나 피해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한 '진보활동가'와는 조금 다른, 전통적인 사회주의↔시장주의 축에서의 한 쪽을 담당하는 정치진영으로서의 좌파들은, 그 맞은편 우파만큼이나 대상화를 즐겨해왔기 때문에)들은 '당사자성' 내지는 '발화의 당사자성'을 중요하게 여겨 왔다. 


이것은 당연히 중요한 강조점이다. 진보 문화 연구자와 기고자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는 '서발턴'의 문제 - 즉, 특정한 피해자 집단이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를 출판하고 전파할 권리를 박탈당한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그룹이 표현하지 않은, 레즈비언/게이가 표현한 레즈비언/게이 문화 컨텐츠를 접해본 적이 있는가?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 그룹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표현한, 형제복지원사건 컨텐츠를 접해본 적이 있는가? 2014년 세월호참사 이후에, 유가족분들 및 생존자분들께서 직접적으로 내신 목소리와 표현물이 비교적 많이 전파되었지만, 여전히 당사자 아닌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 내는 담론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비-당사자의 담론을 우리가 익히 보아 알듯이, 당사자 아닌 타자에 의해 제작된 표현들은 언제나 상황에 대한 몰이해와 모욕과 배제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그러한 윤리적인 문제만 극복할 수 있다면, 문화인류학적인 ·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그 대상의 복지와 이익을 대변하리라는 윤리적 원칙을 지키며 민족지적 참여연구자의 태도로 조사하고 집필할 수만 있다면, 굳이 본인이 그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녹색주의자들이 숲을 옹호하기 위해서 굳이 비료가 되지는 않고, 고래보호운동가들이 굳이 돌고래로 다시 태어나지는 않고, 뼈 있는 농담이지만, 남성 페미니스트가 굳이 성전환을 하지는 않듯이(그런데 일부 넷페미니스트들이 이걸 종종 헷갈리고 '자신의 남성성 그 자체'에 죄책감을 가지기 시작하여서, 나는 2015 페미니즘 리부트 시절부터 이 양반들을 어떻게 타일러야 할지 고충을 겪었다).


이처럼, 나는 성매매를 하지도 않고 여성도 아니지만, 성매매여성의 객관적인 복지와 인권 수호를 '위해서' 성매매 산업에 우리 사회가 특정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오늘 내가 군인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한 취지와 같다. 나는 군인이 아니지만, 내가 군인이 아니라고 해서 군인의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그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나는 같은 인간으로서 거기에 당연하고 마땅히 함께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씀으로써 그 책임의 일부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군인을 '위해서' 군인에 관해 우리가 특정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핵심은, 군인의 노동자성을 더 깊이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진보와 합리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존경하는 진보-좌파 여러분들이 우리 사회의 군인이라는 '노동자'들을 더욱 강하게 옹호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더욱 풍부하게 다루기 위하여, 우선 진보-좌파와 군인 집단간의 좀 (전라도 말로 하자면) 껄쩍지근하고 희한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진보-좌파와 군인의 애매하고 미묘한 관계


이 세상에, 정말 말 그대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진보-좌파들과 군인들간의 관계만큼 다층적이고 착종된 사이는 없을 것이다. 진보-좌파들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시혜해 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 오늘 내 글의 핵심 아이디어를 바로 선언하자면 - 군인들은 사실상 역사적으로도 현재까지도 상당히 많이 학대받고 외면당하고 홀대받고 소외되던 3D업종 블루칼라 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이 다른 약자들을 보살피는 것에 비하여 비교적 꽤 후순위 업무로 밀려나왔다. 더군다나 진보-좌파들에게 군인은 약자라기보다는 가해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왜나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시대'가 어떤 야만적인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는지 의식하고 있는 진보-좌파들은, 지난 수백년간, 파리코뮌에서부터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좌파와 민간인을 주로 학살한 집단이 우파 군인이라는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에, 좌파들은 현직 군인들에 대해서, 다른 존재들에게 베푸는 시혜들에 비하여 비교적 적은 시혜를 베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인간의 솔직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내 글의 주된 목표 중 하나로 설정했기에 언급하자면, 진보-좌파운동이란 근본적으로 불쌍한 타인에 대한 시혜 - 봉사활동 - 다. 시혜라는 말에 알러지 반응 일으키는 진보-좌파가 참 많은데, 우리가 하는 일이 시혜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시혜가 아니면 과금서비스라는 것인데, 사회운동에 돈이라도 받을 생각인가? 우리는 모두 서로의 시혜에 의존한다. 인간이 서로 시혜 베푸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긍지 느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까지 진보-좌파 활동가들이 군대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언제나 군대 정상화 문제에 관해 논할 때 이렇게 묻는다 : 1953년 한반도전쟁 종전 이후로, 북한군에 살해당한 한국군이 많을까, 한국군에 살해당한 한국군이 많을까? 사망한 북파간첩을 제외하면 남파간첩에 의해 살해된 한국군은 대체적으로 보도되어 있다. 그러나 가혹행위, 총기난사, 의문사 사건, 자살 사건, 성폭행 사건, 그리고 억울하게 전역당하거나 아니면 자살한 사건들은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 남자들은 안다… 아무리 극우적인 남자라도 부정하지는 못한다…. 군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망사고가 은폐되는지. 알려져 있는 일부 사건의 바디카운트만 세어도 북한군 킬카운트의 100배는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마어마한 '전우 살해'에 대해서 문제제기한 사람들이 우파였는가, 좌파였는가? 당연히 좌파지. 진보-좌파지. 지금까지 군인 집단에 대한 좌파 집단의 헌신은 어마어마하다. 민간기관 <군인권센터>와 정부기관 <국가인권위원회>는 누구들 작품인가? 진보-좌파의 작품이다. 


국가주의자들이 그렇게 종북세력이라고 모욕하고 저주했던 좌파들이, 북한군도 죽이지 못한 숫자의 남한군을 마치 로마군의 십중지일형(decimate)처럼 죽이고 트라우마와 정신질환을 심어놓고 여성혐오 기계로 만들어 놓던 똥군기와 병영부조리를 제거해나감으로써, 수 만 명의 남한군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정신병으로부터 구하고,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현대화시킨 것이다. 아하, 이제 누가 그놈의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인가? 누가 했는가? 군인은 군인답게 죽도록 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군국주의자들이 국방력과 전쟁억지력을 증대했는가, 아니면 보수일간지에서 북한 간첩이라고 낙인을 찍히며 살아가는 진보-좌파들이 국방력과 전쟁억지력을 증대했는가? 


진보-좌파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군대가 지금만큼 합리화되고 현대화되고 진보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반대할 때, 군 복무기간 단축과 휴대폰 사용을 이끌어냈고, 이제 병사들은 '후임을 갖고 노는 대신' 스마트폰을 갖고 놀면서 병영 학대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그래서 나라에는 좌파랑 우파가 똑같이 필요하다고? 웃기는 소리지. 망할 오른쪽 날개를 당장 부러뜨리고 왼쪽 날개에 감사하다고 큰절이나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진보-좌파 사회운동가들에게 감사를 멈추지 말라.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좌파의 군인들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는 여전히 상당히 적대적이다. 군인을 돕는다고 해도, 군인 전체를 돕는다기보다는 주로 군인으로부터 튕겨 나오는 사람들이나(성소수자 군인 · 성폭력피해자 군인), 군대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지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군인 일반에 대한 좌파 전반의 인식은 상당히 차갑고, 대체적으로 적대적이다. 물론 이해한다. 그리고 이해해야만 한다. 좌파들은 군인들과 정말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악연을 가진 사람들이다. 직접적인 악연이 없더라도, 민족적인 악연이 있다. 



'만들어진 민족'들과  민족들 사이의 악연들


뭐라고, 민족적인 악연이라고? 우리는 같은 한민족이지 않은가? 아니. 민족이란, 5천만명의 인구가 있으면 5천만가지의 민족이 존재한다고 봐야 하는 아주 개인적인 범주설정의 문제이다. 민족이란 심리적인 스키마의 구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3인터내셔널이라는 개념을 아는가? 1919년부터 1943년까지 존재했던, '세계 정당'이다. 이곳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의 당 아래 모인 정치체였다. 이들은 국적을 따지지 않았고, 노동계급은 세상 어디에나 똑같은 취급을 받는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진리 하에 하나의 국적으로 행동했다. 멋있고 아름답고 호연지기가 빛나지 않은가? 그래, 지구에도 이런 대인배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그저 단지 공산주의자들이 특별히 멋있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아, 물론 역사 속 공산주의자들이 특별히 멋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루종일 남초커뮤니티에서 여자들 욕이나 하고 컴퓨터게임에 빠져 사는 젊은 코리안 네오나치 남성들과 체 게바라를 비교해 보라. 혹은 인구 십몇 만 명도 되지 않는 만만한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트랜스 공격헬기'니 뭐니 맘껏 능멸하고 자빠져 있는 '개미밟기' 래디컬 페미니스트(TERF)들과 헬렌 켈러를 비교해 보라… 차라리 원숭이와 다윈을 비교하는 게 훨씬 유쾌할 것이다.


20세기 지구인들이 서로의 민족과 국적을 떠나서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민족성이라는 스키마를 머릿속에서 '열고' 혹은 '셋팅하고', 그렇게 열린 프레임 하에서 초국적 · 초민족적 단합력을 발휘한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인간이 누군가를 나의 민족 · 나의 가족으로 설정하는 행위는 생각보다 굉장히 자의적이고 유연하게 진행된다. 인간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인간의 높은 지능 · 극히 효율적이고 적응적인 상징활용능력 · 높은 상황적응력 · 높은 학습능력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스키마. 유연한 스키마. 믿을 수 없이 유연한 스키마. 그것에서 나왔다. 솥뚜껑을 거북이로 착각하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할 수 있다면, 부상당한 이웃이나 고통받는 외국인을 내 가족처럼 '아름답게 착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우파 정부가 좌파 민중을 억압하려고 해 온 정치적 흐름 속에서, 주로 우파의 사주를 받은 군인들이 좌파 민중과 좌파 운동가들 그리고 그들이 의지하던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농사꾼 마을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과정들 속에서, 우파-군대-근황주의자-국가주의자와 대립되는 좌파-민중-진보주의자-민주주의자라는 초국적이자 정치적인 '민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민족이란 대체적으로 핍박과 억압과 고난을 함께 당하게 되는 불행한 체험으로부터 생겨난다. 이것은 세계사의 법칙이라기보다는(사회학에 법칙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맑시스트들이여) 인간 심리에 내장된 심리학적인 법칙이며, 그 법칙 때문에 거시적으로 세계사적으로 특정한 패턴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함께 고생하고 내 뒤를 지켜주는 친사회적 행동을 보여준 사람을 '우리' 혹은 준거집단으로 삼는 인간의 습성 때문에, 민족이란 등장한다. 우파와 그들의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이 좌파와 그들과 동조했던 민간인들을 다 죽여버리는 바람에, 우파-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시간과 국경과 민속(ethnic)을 뛰어넘은 초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 가로쉬 헬스크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中

그래서 좌파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 전승된 우파에 의한 학살의 역사를 인식함으로써, 우파는 물론이고 우파의 손발과 총폭탄이 되어주었던 군부와 군대에 거의 영원히 척을 지게 된 것이다. 마치 한국인들이 지난 역사를 알아가면서 일본인들에게 '민족적인'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베트남인들이 지난 역사를 알아가면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민족적인'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좌파 역시 세계 곳곳에서 까마득한 과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미얀마를 기억하라)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을 척살하는 군대에 '민족적인' 불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간에 이 원리를 엄중한 현실로 파악하고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좌우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가져오고 싶거든 말이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군대가 자기변호를 해야 하는 것이고, 우파가 군대를 함부로 지배해서 난동부리지 않겠다고 피의 맹약이라도 해야 해결이 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나 역시 운동권 출신 진보-좌파로서 솔직하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개선을 요구하건대, 진보운동가나 좌파 시민들은 군대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군대가 요구되는 상황에 대해서 너무 허용적이거나 아니면 반대적으로 너무 거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극우 파쇼 북한이라는 진짜 위협


특히 한국이라는 지정학적인 상황에서, 좌파들은 한국 인구 일반에 상당한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는 파시즘-나치즘 국가인 북한과의 적대를 자꾸 '일방적으로 종식'하려고만 한다. 이것이 사실 한국 진보-좌파의 드높은 영광을 갉아먹고 있는 중대한 착오이다. 무엇에 대한 착오인가? 인간은 인지적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세상을 최대한 단순하게 파악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인지는 0 혹은 1,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최소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사용하는 프레임은 이분법이다. 즉, 생각없는 우파들이 모든 것을 빨갱이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자로 파악하는것처럼, 생각없는 좌파들도 모든 것을 우파-군대-근황주의자-국가주의자와 대립되는 좌파-민중-진보주의자-민주주의자라는 이분법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그 이분법에 들어가지 않는, 그런데 심지어 해로운 존재들도 그 이분법에 억지로 우겨넣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해롭고 위험한 적들이 친구가 되어버리며,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친구도 잘못해서 적으로 분류되어 버린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한국 좌파들의 북한 옹호론이다. 그리고 그 해외 버전이 서양(유럽) 신좌파들의 중국 문화대혁명에 대한 찬양이다. 이들 모두가, 우파-군대-근황주의자-국가주의자와 대립하여서 자유민주주의 및 사회주의를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우파-군대-근황주의자-국가주의자도 아니고 좌파-민중-진보주의자-민주주의자도 아닌, 우파-보수주의-공산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라는 폭력적인 제3세력을 내 친구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과거에는 소련이었고 지금 일부 한국 좌파들에게는 북한이며, 얼치기 유럽 좌파들에게는 천안문 민주화시위대를 탱크로 뭉개버린 중국 공산당과 체첸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폭군 러시아다.


이렇게 착각을 일삼는 사람들 가운데는 좌파와 우파가 적당히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우파지만, 좌파도 다 죽지는 않은, 상당히 산업화되고 최소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이 한반도에 함께 살고 있다. 즉, 우리는 우파와 좌파가 피터지게 싸우다가 적당히 타협을 보아서 결과적으로 중도우파적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좌파들은 자신의 나라가 우파-군대-근황주의자-국가주의자에 점령되어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물론 상당부분 사실이고 적어도 그러한 위협이 상존한다. 우리는 이런 나라들을 이른바 1세계국가라고 부른다. 또한 이들은 자기 나라 지배세력이 좌파-민중-진보주의자-민주주의자를 공격하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도 상당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사실이든 간에 언제나 절반의 진실이다. 살아 있는 좌파-민중-진보주의자-민주주의자들은… '주어진 자기 나라' 안에 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좌파-민중-진보주의자-민주주의자들이 순수하게 자기들만을 위해 세운 나라는 없다. 그들도 나라를 세울 뻔 했으나, 극좌-국가주의자-군국주의자들에게 몰살당했다. 구 소련 국가들, 중국, 베트남, 북한이 바로 그런 나라들이다. 좌파-우파가 극렬 대립하다가 일종의 휴전협정을 맺은 상태로 대충 시간이 흘러서 적당히 중도화되지 않은 나라들은, 극좌에 의해서 좌파가 말살되고 그들이 다시 극우로 변절하여 우파-보수주의-공산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좌파의파시즘에 대한너무 헐거운 용서


문제는 많은 좌파들이 그런 정신나간 스탈린주의나 좌파권위주의를 '미친놈'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단지 표면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자 국가', '사회주의 정부', '공산주의 정부'를 표방한다고 해도 그것의 사회학적이고 경제학적인 실질이 정말로 그런 이름에 걸맞는지 검증을 해야 하는데, 좌파들은 그걸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때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던 중국이나 북한이 요즘에도 하는 만행을 보면, 사실상 자본주의와 경찰력으로 독재하는 공포스러운 감시국가 싱가포르 정부가 자기네 영토에서 하는 짓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악랄하다. 하지만 좌파들은 그런 우파-보수주의-공산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 나라들과 '적당히 봉합된 속물적 중도우파 나라'들간의 적대적 관계를 일방적으로 종식시키려 한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시민자유를 지키기 위한 이익관심에 있어서는 전자 나라보다 후자 나라와 좌파들의 이익관심이 훨씬 더 일치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일방적으로 종식'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한반도의 경우에, 남한 좌파들은 북한과 얼른 화합을 이루고 싶어 하지만 북한은 이 적대적 공생 관계를 종식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북한은 완전한 개혁개방과 완전한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좌파들이 가장 먼저 눈치챘어야 하는 트릭이다. 생각해보라. 한국의 진보-좌파가 평생동안 싸워 온 문제 가운데 가장 큰 축에 드는 하나가 무엇인가? 노동인권 문제이고, 불법하도급과 불법파견 문제 아닌가? 이 문제들의 본질이 무엇인가? 양심 없는 업체 사장들이 직고용을 하지 않고 자꾸 서류상의 가짜회사를 만들어서 노동자를 가상적으로 고용하고 그 과정에서 서류상의 임원진과 서류상의 사장에게 부당이익을 챙겨줄 구조를 만들고, 그 대립구조를 또한 악용하여 직영노동자 ↔ 간접고용노동자, 정규직 ↔ 비정규직, 남성노동자 ↔ 여성노동자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려는 획책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것이 남한 ↔ 북한 관계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그 주된 책임이 단지 남한 정부뿐만 아니라 북한 정부에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그걸 모르면서 무슨 민족주의적 평화 운동을 하네, 미국대사관 앞에서 민족주의 춤을 추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신격화하네 하는 것은 개 같은 헛소리이다.


물론 이것은 좌파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인, 아직도 남아있는 NL 주체사상 계파 등 '일부의' 패착이다. 하지만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 북한 문제에 대해서 좌파들이 전반적으로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에게 '너는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이 사상검증을 위해 겨누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생각에 동의해야만 도덕적으로 무결해질 수 있다는 세계관이 담긴 전체주의적 협박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든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북한 따위의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저급한 질문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성적으로 생각하기를 관두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북한을 천사처럼 생각하거나 북한의 군사적인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판단은, 좌파 진영이 역사적으로 보여준 위험천만한 지적 게으름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다. 좌파는 한국 내부를 향하는 어떤 오해나 혐오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이렇게 북한의 죄악과 북한군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그들과의 우호성을 과대평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수순은 무엇인가? 남한 진보-좌파들이 가지는 남한 정부군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이다. 바로 이것이 나의 군인옹호론과 좌파의 미래전략이 접촉하는 핵심 교차로이다. 


정리해 보자. 역사적으로 우파의 군대는 좌파와 민중들을 학살해 왔는데, 그 우파 국가들이 20세기를 거치면서 제1세계 자본주의 연합으로 역사적 신분세탁을 했고, 그런데 실질적으로 현대화 · 민주화 과정에서 우파의 근황주의는 좌절되고 좌파의 민주주의와 인권개념이 대부분 1세계 나라에 탑재되었는데, 그럼에도 1세계 나라 우파들의 역사적 과오가 있었는데,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일부 좌파는 단지 그것의 거울상에 불과한 2세계 나라에 무조건적 호감을 주고, 그들과 적대하는 1세계 나라(자기 나라) 군사력에도 적대감을 갖는 것이다. 제3의 · 제4의 · 제5의 그룹을 새로 개설하여 보다 복잡하게 판단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는 우파들이 세운 나라니까 지금도 절대악(惡)이고, 그러니 반대로 절대선(善)은 저 신비로운 봉쇄된 공산국가라는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생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한국군의 결정적인 현대사적 기여를 인정하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인 『연대투쟁가』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그래 너희에겐 외세와 자본이 있고 / 폭력집단 경찰과 군대 있지만 / 우리에겐 신념과 의리로 뭉친 / 죽음도 함께하는 동지가 있다" 이러한 투쟁가들이야말로 한국 진보-좌파의 세계관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시(詩)적 보고서이다. 외세(제국주의)-자본(자본주의)-경찰(감시)-군대(국가폭력)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고, 그 용도 역시 단순히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원래 우파의 것이었던 남한 정부군은, 파시즘으로 미쳐버린 북한 정부군의 남침 야욕을 효과적으로 억제해 주었다. 원래 우파의 것이었던 경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살인자와 강도들을 잡아가두기도 하였다. 


내가 요즘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는,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위원장 최병천 선생께서는 20세기 한국 근현대 발전사에 있어서, 보수-우익 진영의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로 북한의 남한 침략을 저지한 군사적 대응을 꼽는다. 이른바 '북한의 남침 야욕'은 실재하는 것이었고, 202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북한이 '모든 보복을 감수하고서' 남한 침략을 감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방금 내가 언급한 그 '모든 보복'을 약속하는 '진짜 위협(=군사적 전쟁 억지력)'이 없다면 저 귓구멍 꽉 막힌 아시안-파시스트들은 정말로 세계정복을 시도할 것이다. 


민족주의를 부추길 생각은 없지만, 언제나 한민족은 고립되고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사랑하는 무속적 세속주의자들이었다. 북한사람들도 한민족이니 민족적 전승 안에 그다지 침략자의 문화는 섞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정국은 파쇼이며, 파시즘은 반드시 전쟁으로 귀결되고, 그 정국에 있는 한 얼마든지 자신들을 지배하는 정권이 명령하는 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 NL운동가들은 눈과 귀를 막고 인정하지 않겠지만, 1953년(한반도전쟁 종전) 이후로 북한은 정말로 계속해서 2차한국전쟁을 일으키려고 준비했고, 남한 정부군은 나름대로 대비하여 그걸 막았다. 우리는 이 사실에 있어서 정말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한국정부나 한국군을 숭배하는 것은 안 되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군대 종사자들에게 잘 해 주셨고 덕분에 '잔인한 신자유주의 국가인 동시에 의외로 정비가 그럭저럭 되어 있는 복지국가인'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현대 한국의 범국가적 프레임워크가 보존될 수 있었음을 깊이 감사하고 보상해야 한다. 


좌파들은 이렇게 대체적으로 군대 자체를 잘 인정하지 않아왔고, 외세-자본-경찰-군대를 '범 좌파 민족적으로' 거부해왔지만, 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정권을 잡은 많은 좌파들은 나중에는 타락하여, 누구보다 잔인한 군사통치세력이 되곤 했다. 오히려 우파들은, 명목상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열받아도 다당제라는 정치적 프레임웤을 유지해야만 했고, 그 시스템 하에서 중도좌파 및 온건우파들은 수용될 수밖에 없었으며, 암살과 고문을 일삼던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수준의 '미친 극우'라고 할지라도 시민사회와 야당의 견제를 받아서 막나가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쏘련은? 우파는 물론, 중도좌파까지도 다 죽여버리고 나라 전체가 돌아버렸다. 그들은 다당제 시스템 또는 제도적 민주주의라는 구조적 안전장치 덕분에 막나가는데도 한계가 있었던 우파들보다 더 타락하여, 누구보다 제왕적인 외세(소련)이 되고 무엇보다 파탄난 시스템(소련/북한식 공산주의)가 되고 무엇보다 잔인한 경찰(소련/루마니아)가 되고 누구보다 끔찍한 군대(소련/중국의 침략과 학살)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이승만 군대(또는 한국 정부군)은 10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죄가 있는 반면, 그래도 소련-북한 따위 일당독재 쓰레기들을 배격하고 다당제를 지켜 낸 공로가 있는 것이다. 



좌파의 내로남불 - 좌파인 나 자신을 성찰하며


이것을, 이것을 수용해야 하는데, 적지 않은 숫자의 진보-좌파들은 아직도 이 냉정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군대'에 대한 대부분 진보-좌파의 입장은, 한 마디로 말해 '내로남불' 이었다. 내가 하면 프롤레타리아트 로동자정부 혁명적 독재, 남이 하면 불법 극우 군사정권. 이는 보다 문화적인 지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예를 들면, 물론 나는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극우 혐오 선동가들이 설치는 나라에서는, 그들이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없도록 규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진보-좌파들은 똑같이 특정 발언을 금지시키는 법안임데도, 『차별금지법』에는 찬성하지만, 『국가보안법』이나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에는 반대해왔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국가보안법』이나 『형법』 307조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은 명백한 반공주의 군사정권이 낳은 악법이고 폐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살인마 김기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내 질문은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우리 진보-좌파가 공적 폭력과 국가권력을 꾸준히 비판해오다가도, 어떤 상황에서는 갑자기 긍정해버리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전통적 우파 권위주의자들보다 더 우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부적으로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 선(善)은 존재한다. 『국가보안법』이 우리들(좌파)에게는 그들이 생각하는 『차별금지법』과 마찬가지고, 그들에게는 『차별금지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라는 식의 생각없는 상대주의로 논의를 희석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왜 좌파는 정부의 권력을 일관되게 해체해야 될 것처럼, 모두가 시민사회 풀뿌리의 힘에 기대야 한다는 방향과 취지로 말하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부의 권력장치(다음의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소위 말하는 '국가장치')에 기대느냐는 것이다. 왜 진보-좌파는 다른 모든 것을 유럽과 북유럽 기준으로 맞춰가기를 바라다가, 성범죄자에 대해서만큼은 형량만을 경쟁적으로 높이는 미국식 엄벌주의로 가자고 하느냐는 것이다.


좌파가 정부 권력장치에 기대는 게 문제라는 게 아니고, 성범죄자에게 솜방망이 처벌 하는 게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얼핏 보기에 일관되게 '자유와 불규제와 불간섭'을 주장하는 우파들도, 사실은 자유와 불규제와 불간섭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과 돈과 폭력과 패거리와 젠더의 힘이 발휘되기 때문에, 규제가 텅 비어 있을수록 자신들의 짐승같은 권력이 그 공간을 채울 수 있으므로 '무제한 표현의 자유를 허하라'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 검열에 발광을 하고, 심지어 죄악 중의 죄악인 리벤지포르노를 마음껏 볼 자유를 지껄이던 인터넷 한국남성들이, 페미니스트 웹툰 작가들을 웹툰 플랫폼에서 퇴출시켜버려야 한다고 마녀사냥에 나선 <YES CUT> <검열에 찬성합니다> 캠페인을… 그 역겨운 캠페인을 펼친 것을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다. 그래. 내로남불은 사실 어느 한 그룹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좌파의 내로남불이 우파의 내로남불만큼 속이 뻔하게 저열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권력장치에 기대고서라도 특정한 중요한 목표를 성취하고 싶은 그 핵심 가치관과 진심이 중요한 것이라고도 나는 생각하고, 법원의 정의구현에 대한 요구와 범죄자 - 특히 성범죄자에 대한 보복의 마음을 나 역시도 누구못지않게 강렬히 갖고 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인권을 소중히 여기지, 인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나도 그렇고, 많은 인권주의자들도 인권을 법과 정부가('국가장치'가) 해치지 못하기를 바랄 뿐, 남의 인권을 짓밟은 놈들 내 손으로 죽여버리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멈추느냐이다. 좌파가 권력을 잡았을 때, 열정이 광기로 변하는 변곡점 앞에서 멈추고, 좌파가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권력 또는 권력기구 앞에서, 그것을 어떻게 균형잡히게 평가하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입체적인 역사적 평가를 내리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의 좌파에 있어서 그 과제는, 바로 '한국군'이라는 복잡미묘하고 불편한 '피묻은 고대 병기' - 과거 우리 조상들을 죽였지만, 오늘날 기이한 평화를 유지시켜주고 있는 괴물 같은 토템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로 부여되었다.



정치적 선명함이라는 죄악 


내가 그렇다고 해서 남한의 우월성을 찬미하고, 정신나간 북한 파쇼 정권의 전쟁도발을 억제하는 한국군의 정당성을 들이대며 북한 정벌이나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북한을 침공해서 전쟁통일을 해버리자고 선동하는 자들을, 나는 내 두 손으로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진짜로 전쟁이 나면 북한인들은 알아서 105mm 장사정포를 조준사격하여 한국인 300만명을 형체도 찾을 수 없는 살조각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전쟁이 나면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모인 서울 · 경기 · 인천은 불바다가 되고 신용에 신용으로 얽혀 있는 KOSPI 주식은 재활용 우유팩보다 싸구려가 될 것이다. 당신의 삼성전자와 카카오 주식도 포함해서. 그런 끔찍한 미래를 전쟁주의자들에게 VR헤드셋이라도 억지로 씌워서 미리 체험시켜주어야 한다. 


전쟁! 정벌! 선제타격! 노동자 혁명! 북진 통일! 선명하게 말하려면, 누구나 선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명성은 분쟁과 전쟁을 낳는다. 선명한 좌파들은 결국 소련과 북한이 되었고, 선명한 우파들은 이승만주의자와 박정희주의자들이 되었다. 타협과 희석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선명성은 인간의 미지근한 행복과 적당한 복지를 분쇄하고 파시즘과 엄숙주의, 그리고 그 모든 어리석은 짓들을 끌고 가기 위한 일상화된 폭력을 초래했다. 


내가 한반도에 선명한 이슬람이 몰고 오는 반인권적 · 여성혐오적 문화를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단지 PC주의자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소수자 혐오하지 말라 했지만 아랍 공동체의 '선명한 이슬람인'들은 벌써 수만명의 여성을 명예살인하고 수백만명의 여성청소년을 할례했다. 내가 선명한 기독교를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단지 PC주의자들은 종교 혐오하지 말라 했지만 종교의 현실적 의미를 새로 쓰고 있는 '선명한 기독교인'들은 선명한 극우정치와 융합해 카르텔을 형성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그들의 자살률을 몇 배나 끌어올렸으며 혼전순결 따위의 광대짓을 퍼트려서 그러잖아도 짧디짧은 청춘을 살다가는 인간의 성문화를 조선시대 이전으로 퇴보시켰다. (섹스가 하고 싶은 '이대남'들은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선명한 기독교, 즉, 한국의 기독교근본주의가 자행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양 문화, 반공주의와 대북 도발을 통해 끌어올리는 한반도 군사 긴장의 무책임하고 위험천만한 에스컬레이션, 666베리칩과 빌게이츠 코로나백신 음모론, 빅뱅이론과 진화론이 사탄의 계략이라 주장하는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겠다.


나는 언제나 독자들에게 심판을 구한다 : 누가 악마인가? 사람을 죽이지 말고 현상을 잘 유지시키고 개혁을 꾸준히 하자고 주장하여서 사람들을 조금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악마인가, 모든 인간이 어떤 선명한 구조와 질서 안에 들어가야 하므로, 소수자와 반대파를 작살내고 어떤 세력을 선제타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명성 경쟁자'들이 악마인가? 선명성을 내세우는 자들은 가슴에 황금 훈장을 치렁치렁하게 달고 가장 고결한 태도로 웅변하지만, 그들 연설의 내용은 '여성 인권을 없애버리자' 라거나 '사실 300만명을 죽이고 1000만개의 가정을 파괴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진심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 말이 진짜 전쟁으로 이어졌을 때 그 책임을 짊어질 최소한의 지능과 참을성조차 없기 때문이다. 



'선명함 억제 노동자'로서의 한국군


하지만 좌파가 지금까지 그렇게 경계하고 내심 증오했던 한국군은, 그런 '선명성 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진짜 행동을 개시하지 못하게 하는 '군사적 전쟁 억지력'을 제압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남한군의 강력한 전쟁억지력은 북한이라는 굉장히 내부-이질적인 집단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일부 '선명한 전쟁론자 장군'들이 감히 자신의 군사적 야망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중요한 설득력이 되어주었다. 모든 북한인이 남한인을 정벌하고 싶어하지는 않겠지만, 일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남한인 가운데 일부가 그렇게 생각해왔듯이. 그들의 전쟁 충동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진짜 위협'이 필요했고, 남한군은 동북아에서 그 '살벌한 무력시위' 혹은 '진짜 다 죽일 수 있다는 연극'를 가장 잘 한 조직이었다 - 한국군 내부의 극악무도한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즉, 한국군은 군사 긴장을 촉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의 '선명한 무력통일주의자'들을 억제하는 '정치적 희석제'이자 '정국 안정화 첨가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것이다.


같은 원리에서, NL 이념가들이 '미 제국주의 원쑤 침략군'이라 증오해 마지않았던 주한미군 역시 그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주한미군은 최근 한미연합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하는 2019년까지 한강 이북에(북한 가까이에) 주둔하여, 군대의 진격을 통제하는 '인계철선' 역할을 했는데, 재미있게도 이 인계철선은 북한의 '선명한 남침주의자'들의 인계철선이기도 했지만 남한의 '선명한 북침주의자'들의 인계철선이기도 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서 미군을 먼저 고려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어떤 미친 정부가 북한을 갑자기 침략하기 위해서도 먼저 미군을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미국이 남한의 어떤 미친 정부의 침략전쟁을 승인할 리는 없고, 그래서 남한 군사주의자의 충동적인 북침전쟁 역시 여태까지 억제되어왔다. 지금까지 미군은 북한과 남한 양측의 전쟁 의지와 요건을 어렵게 만들어 주는, 그리하여 남한이 경제성장과 복지를 이루어갈 조건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실질적 평화수호자가 되어준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가?


이처럼 군인은, 누가 집필에 참여한 지 모르겠으나, 『중학교 도덕』 따위 쓰레기 교과서들이, "군인아저씨 나라를 보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숭고한 국방의 의무 만세!" 라고 남 일 말하듯 뇌까리는 타자화된 망발로는 절대 정당화할 수 없는 극히 힘들고 위험한 분업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 동료 노동자 시민이다. '군사 노동자' 혹은 '로컬 전쟁억지력 유지보수 노동자'인 군인은, 각국의 선명한 이념을 가진 극단주의자들의 폭력행위를 억제하는 거시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러한 억제력이 작동할 수 있도록 선박 · 차량 · 우주항공 · 보병 · 미사일 · 레이더 · 정보 · 반탐 등의 구체적인 무기체계를 유지보수하고 운용하는 힘들고 위험한 육체노동자인 것이다.



군인에게 숭배 대신 보상을 주어라


노동자를 위하는 좌파이든, 노력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는 우파이든, 위험하고 비위생적이고 힘든 육체노동을 보살피고 보호한다면, 그것에 정확히 해당하는 모든 군인들에 대한 보살핌과 보호이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행하여 온 군인에 대한 막무가내식 존경과 숭배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즉각 멈추어야 한다. 그 존경과 숭배가 좋은 것 같지? 그게 다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상적인 물질적 보상을 치환하는 '가짜 보상'이다. 왜 군대에 끌려가는 국군 장병들을 찬양하고 숭배하는가? 오, 줄 돈이 없으니까! 20세기 중후반 시절에는 그게 나름대로의 묘책이었겠지. 줄 돈이 없으니까 일단 국가에 대한 헌신을 숭배하고 그 헌신을 보여주는 자를 영웅화함으로써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하지 않은 심리적 보상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한 마디로 공짜 전투노예로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70년이 지나 GDP 전세계 9위 경제강국이 된 2020년대의 선진강국 대한민국은 어떤가? 오, 그래도 돈 주기 싫다고 한다! 국군장병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든든해서 감사하면 돈을 줘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 당신만큼은 예외이길 빈다 -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죄다 증세를 하면 나라가 망하는 줄 아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국방세를 증대함으로써, 기초생활수급비보다 싸구려 돈을 받으면서 사실상 공짜로 징병된 강제징집 피해자(현역) · 강제징용 피해자(사회복무요원)들은 물론이고 쥐꼬리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위험천만한 폭탄과 총기를 다루는 부사관들의 처우를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요즘 말로 '무지성'으로 "오, 위대한 국군장병 만세", "오, 듬직한 내 남자친구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군대에 갔어요. 너무 자랑스러워"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바로 그 숭배 때문에 아무도 국군장병들에게 제대로 된 봉급과 복지제도와 사회복귀제도를 확충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 숭배 때문에 당신들 남자친구가 군대 화장실에서 똥을 퍼먹는 거라고!


돌이켜보라. 우리가 왜 여성혐오 가운데서도 어머니와 모성성에 대한 숭배를 멈추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 출산을 한 당사자에게 돈(이전소득)과 공공보육(공공복지서비스)으로 보상하기 싫으니까, 그게 돈이 들어서 내 주머니에서 타인의 인권을 위해 지출하기 싫으니까, 가사를 분담하고 자녀양육을 책임지기 싫으니까, 남자들은 남자대로 여자들이 자기 자식 알아서 키워줬으면 좋겠고, 정부와 그 정부의 지출을 부담하는 사회는 그들대로 돈 쓰기 싫으니까 산모들이 제 알아서 먹고살도록 내팽개친 것이 아닌가? 돈을 줘야 하는 자리에 '현모양처 칭찬' 과 '모성 신화' 라는 가짜 돈을 끼워넣어서 지리멸렬한 현실을 견뎌내게 강요해 왔던 거잖아. 그게 얼마나 졸렬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같은 짓거리인가? 숭배는 혐오다. 여성숭배가 여성혐오이듯, 군인숭배가 군인혐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혐오해왔던 게 산모들뿐인가? 돌이켜보라. 우리가 국군장병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숭배를 자행해 왔는가? 그리고 우리가 국군장병을 무슨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워 희생하는 특별하고 신성한 사람들로 '혐오'해 왔는가? 대학 나온 독자 분들께서는, 대학교 교양수업 때 아마도 한 번쯤 배웠을 것이다. 낙인(stigma)은 원래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에게 찍는 징표에서 온 말이라고. 신성화란 곧 낙인이고, 즉 혐오라고.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는가? 우리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 "신성한 노동", "신성한 어머니"를 말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제물로 바쳐 왔다는 말이다. 오 젠장, 제발 존재하지도 않는 '신성함'을 빼고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들을 이해하면 안 되겠는가? 국군장병도 별 게 아니라, 그냥 팔2개에 다리2개 달린 사람이며 전투직 공무원이고 행정부(국방부) 소속 직원이라고! 그들도 인간이라고! 행정부 소속 직원이 땡볕에 구르고 돈도 제대로 못 받고 항상 경직된 인간관계 속에서 노동하고, 죽음과 가까이 하는 직무를 수행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존경하고 숭배해야 할까, 아니면 불쌍한 약자로 생각해야 할까? 당연히 후자로 생각하고 돈 더 챙겨 주고 복지제도 더 확충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복지 마인드 아닌가?


나는 불쌍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이미 모두가 불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닫고 있을 뿐이니까! 좌파건 우파건 전부 다 PC주의에 찌들어서 눈 가리고 아웅이나 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솔직함으로 여러분에게 뭐 하나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분 살림에 보탬이 되고 여러분이 피해를 당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여기 앉아서 이 긴 글을 왜 쓰겠는가?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모두가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을 "오, 그것은 그 당자사들에 대한 혐오야. 그들을 짐짓 강자라고 추켜세워줘야 해"라고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진리의 측면에서 '그게 문제를 못 해결한다'.



커리어의 무덤, 군대


불쌍한 대상을 불쌍하다고 파악하고 도울 궁리를 하는 대신, 멋쟁이로 숭배하는 것은 가짜다. 나는 국가기술자격을 소지한 직업상담가다. 직업상담가의 눈으로 군인을 본 적 있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 뿐이다. 생각해보라. 군인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훌륭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강제징집병/부사관/ROTC/장교/장군을 막론하고, 군 복무라는 직업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한 사람의 내면과 포트폴리오라는 '자기계정' 안에 어떤 커리어적 누적이 차곡차곡 쌓이는가? 부사관 출신이고 소위 출신이고 대위 출신이고 중령 출신이면, 군대 바깥에서 뭘 할 수 있는가? 


군대는 커리어의 분쇄기다. 그곳에 들어간 모든 직업적 성장 가능성은 군대가 요구하는 '임무'와 '부속품화' 안에 철저하게 묶이게 된다. 심지어 그러한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탁월함과 재량 속에서 멋지게 잘 수행한다고 하여도, 그 직업인으로서의 역량은, 다른 직업 및 직무로 확장 · 통용 · 호환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군대에서 배운 기술과 직능과 역량은 군대 내에서만 통하는 것이다. 군대를 전역하는 순간 모든 군인은 아무리 군대 안의 멋진 커리어를 자랑했든 상관없이 즉시 '무장해제' 당하며, 군대 내부의 문화와 아비투스와는 너무나 다른 군대 이외의 세계에서 마치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처럼 살아남아야 한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예방하고 보조하고 지원하고 원호해야 하는가?


물론 가치관이나 개인적인 꿈이나 개인적 성향에 있어서 군인이 굉장히 적합한 사람이 있다. 기술이 아무것도 없는데 일단 먹고 살려면 유용한 직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모든 그런 식의 유인가(valence)를 갖는 직업들은 장기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나는 모든 직업에는 저마다의 '직업 건전성 수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름대로 그것을 표준화해보려고 노력해 왔는데,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 체계 가운데 중요한 요소로서 "직업전환의 용이성", "직무의 범용성", "사회와의 연결성", "워라밸", "정서 위협", "육체 위협" 등이 있다. 그리고 당연히… 군인이라는 직업은 그 대부분 지표의 밑바닥에 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순위로부터 달아나려 하는 자기보호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애국심 섬광탄'을 맞은 사람들이 불리한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 밑바닥 순위의 직업을 제 손으로 고르는 동료시민을 뻔히 보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과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죄를 씻어낼 방법은, 군인 당사자들조차도 놀랄 현금 보상을 지급하는 것뿐이다.



자아의 무덤군대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는 이것을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복지' 정도로 보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실은 회의적이다. 군인은 군사산업의 특성상 육체적 부상과 정신적 트라우마(PTSD)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것은 돈 정도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직무는 근본적으로 상당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늘 긴장 상태로 진행된다. 하나의 산업으로서의 성격은 어떠한가? 군대란 근본적으로 '전쟁억지력'이라는 기묘한 '삽탄 장전된' 재화 및 '군사긴장 유지'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이것을 수행하는 '군사산업'은 무엇을 생성하든 계속해서 그 생성물을 소비해야만 유지되는, 즉 장기적으로 오직 소비를 목적으로 자원을 소비하는 극히 기괴한 산업이다. 이것이 초래하는, 그 산업 종사자들의, 자기 자신의 직업을 바라보는, 의미 붕괴는, 보상가능한가?


내가 단순히 '군대는 폭력집단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얼빠진 수준으로 군대 욕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침략주의적인 옆 나라들이 미사일과 탱크를 찍어내며 전쟁도발을 하는 기괴한 짓을 하면, 우리도 그에 맞춰 전쟁억지(방어)를 위해 기괴한 짓을 해야지 별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야말로 정말 군대란 '필요+악'인 것이다. 파괴와 학살이라는 쓰레기 짓을 하는 미친 이웃들을 위해 나는 더 많은 쓰레기 짓을 해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의 연극을 유지하는 '기괴한 죽음의 극단'이 군대의 본질이다. 그리고 도대체 이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얼마나 '삶의 주체성의 약자'이고 '의미의 약자'이며 '생산성의 약자'인가?


국가에 대한 헌신을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어떤 군사노동자는, 내 말이 뼈아플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 때문에, 군인들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군인이라면 바로 당신이) 이 복잡하게 얽힌 상호의존적 산업사회에서 홀로 외따로 소외되고 배척된, 생산하는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고, 오직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군대에 의존해야만 하는 약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 말이 싫고 모욕적으로 들린다면… 좋아, 마음대로 생각하라; 나는 국가에 헌신하는 멋쟁이고, 내가 부모와 애인을 지키는 방패고, 귀신 잡는 해병이고, 북진통일의 창끝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바로 그 생각이 원래는 당신이 이번달에 받아야 될 월급의 일부라는 것이다. 당신은 돈 대신 자부심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애국이 자랑스러운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수록 당신 이외의 모든 한국 납세의무자들은 '땡큐'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니까. 한국인이 당신을 위해 납부해야 할 국방비 명목의 세금이 '세이브' 되면, 그들은 그걸로 에어컨 밑에서 교촌치킨 한 마리, 도미노 한 판 더 시켜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누군가 직업 특성상 에어컨 밑에서 치킨 못먹으면, 그거를 마땅히 돈으로 보상하는 게 양심있는 사람이다. 나는 양심을 지키고 싶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더 많이 돈쓰고 싶다. 그런데 그 양심을 지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고 법/제도 개혁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국방세를 내도 근거법이 있어야 내지. 나는 당신이 더 많은 돈과 보호를 받을 법을 만들고 싶다. 지금.



망할 놈의 얼어죽을 "감사합니다"


나는 그래서 그 경로 개척을 위해 말한다. 군인 여러분이 지금까지 사실상 피해자이고 약자라는 사실을 재조명하고, 돈 대신 숭배와 찬양으로 때우는 미친짓을 한국인 모두가 중지하고, 일본도 그만둔 강제징집이나 쳐 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숭배도 좀 그만하고, 남한테 미안하고 고마우면 정직하게 높은 월급과 사회복지 서비스로 보답해야 한다고. 망할 놈의 "국군장병 감사해요"가 아니라! 감사하긴 뭐가 감사하냐 누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데? 국군장병을 사지로 내모는 것은 오 한국인 모두가 아닌가? 우리가 그들을 헐값에 쓰고 버렸잖아. 아, 그뿐이 아니지. 내다버린 것이 군인들 뿐이오? 우리가 택배기사 아저씨들을 대퇴골두 무혈관성 괴사증으로 내몰았잖아. 우리가 쿠팡맨들을 과로사로 내몰았잖아. 우리가 홈리스를 서울역광장으로 내몰았잖아. 우리가 어르신들을 쪽방촌과 탑골공원과 박카스 성매매로 내몰았잖아.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를 비닐하우스에서 얼어죽게 내몰았잖아. 우리가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얼빵하고 정신질환에 걸린 여자애들을 성매매와 사채빚으로 내몰았잖아. 


누구냐? 누가 대한민국에 그렇게 감사해? 도대체 감사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 죄악의 민족이 누구야? 이걸 우리가 했지 무슨 북한 간첩이 했냐? 끽해야 고위 탈북자 이한영 하나 쏴죽이는 머저리같은 북한 간첩이 얼마나 실력이 좋길래 가출청소년 40만명을 만들고 랜덤채팅앱에서 집 나온 얼라들 몸 팔도록 꼬드길까요? 오, 한국 남자들이 공산주의의 사주라도 받아서 n번방을 만들었을까요? 산업재해사망사고로 연간 800명이 죽음당할 때, 그놈의 북한 간첩들이 연간 2명은 죽이고 있습니까 지금? 오, 대학 나와서 고위관리가 된 남한 사람들은 산업재해사망사고와 산업재해질병사망을 포함해 연간 2,000명을 죽이는데? 한국인들이 해외 공장과 원양어선에서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하는 만행들도 포함해 볼까요? 오, 남한 사람 대량살인을 북한이 했냐, 남한이 했냐? 누가 진짜 뿔 달린 늑대모양 악마일까용? 제발! 그놈의! 북한 간첩 좀! 머릿속에서 지우고! 고등학교에서 『확률과통계』라도 배웠으면! 통계를 좀 쳐다보란 말이다! 진짜 대학나온 악마가 누구냐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헐값에 삶의 의미와 커리어가 종말하는 불모지로 보내버리고 있냐고! 그건 바로 한국인 5천만명이야!!! 너! 나! 우리 모두가!!!


군인이 강자인가? 군인에게 은근히 위험을 떠맡기는 우파들이여, 군인을 은근히 싫어하는 좌파들이여, 대답하라. 인류의 기괴한 '군사산업'이라는 산업구조, 거기에 비해 너무 적은 사병과 부사관 봉급, 그것에 비해 사관학교 엘리트 출신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놓은 군인연금 테이블, 쉽지 않은 재취업의 관문, 기성사회와 사뭇 달라서 거의 재활이 필요할 만큼 특수한 인간관계 경험, 그런 모든 체험들이 인간의 내면에 새겨지게 되는 '자아의 특수함' 혹은 '특수하게 사회화된 자아'가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그들을 강자로 만드는가? 그들은 전역하고 나면 곧 재활을 필요로 할 사람들이다. "감히 군인보고 재활이라고?" 라고 언급한다고 해서 그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욱할수록 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욱하며 붕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예를 들면 일부 성노동자들도 성매매 철폐론에 저주를 퍼붓는다. 그런다고 그들이 항정신병약을 끊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사회복지와 『성매매특별법』이 성매매의 악순환을 끊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군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군인도 직업이니까. 군인이 하나의 직업이자 직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군인을 신성하게 낙인찍어온 것을 그만두지 않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낙인찍힌 번제물'로 계속 간주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지겠지.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 말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비참한 2차노동시장에 개밥바라기별처럼 쏠리고 몰리는 사람들, 아무도 자신에게 적절한 자아 계발의 기회를 주지 않아서 상처받고 무력화된 채 부사관 하러 온 사람들과, 나름대로의 애국심을 가지고 군인의 길을 걸었지만 시궁창 같은 복무환경에 눈물흘리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을 보면서도, 짐짓 젠체하며 뒷짐지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해봐야 그들이 당하는 피해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영업자들을 깍듯하게 "사장님"이라고 불러 봐야 남한 800만 자영업자들의 처우가 개선되는 건 아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됐길래, 사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왜 한낱 갑질하는 고객 때문에 죽음당하는데?", "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매? 근데 이게 뭐냐?" 라고 똑바로 쌍욕을 갈길 수 있어야 그들의 피해가 사라지는 최소한의 길이 열린다. 


군인은 약자다. 군인은 숭배를 통해 천시받고, 존경을 통해 차별받아온 약자다. 우리가 그들을 강자로 인식한 것조차, 육 · 해 · 공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엘리트들만 접하고 살아온 결과다. 기억하라. 사관학교도 대학교이고, 대학교 중에서도 엘리트 대학이다. 마치 서울대학교가 한국사회 모두를 제멋대로 대변해왔듯이, 사관학교 출신도 한국군 모두를 제멋대로 대변해왔다. 마치 국가에 대한 헌신은 충분한 보상을 받으며, 군인의 길은 멋진 길이라는듯이. '국가'라는 낱말의 언어철학적 비판도 생략한 채로….


물론 군인이라는 직업의 '흑역사'는 재론할 필요가 있다. 야만적이고 치욕된 역사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시 언급하겠다. 제주 4.3때 군경이 제주사람들을 학살한 역사가 있다. 광주 5.18 민주화항쟁때 공수부대가 광주와 전라도 시민을 학살한 역사가 있다. 여수-순천 사건 때 정부군이 여순 사람들을 학살한 역사가 있다. 그러한 용서치 못할 비극적인 역사 이후로, 군과 정권에 대한 꾸준한 민주화 시도가 이루어졌고, 한국 시민사회의 끈질긴 민주화운동 덕분에 이제 한국은 군사정권이 아니다. 군은 선출된 민주 행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비교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대 내부의 수준은 군정 시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 하신 여러 군인 자살자들은 일종의 직장갑질 하에서 죽어가는 2차노동시장 노동자들과 똑같다. 



한국사회가 군인에게 가하는 폭력과 죄악들


그러나 군에 대한 사회의 개입 또는 좌파의 개입은 비교적 충분하지 않았다. (우파에 대한 간접 칭찬이 아니다. 우파는 군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군의문사와 군자살의 간접정범들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군의 범죄들 때문에, 군이 단순한 무력을 휘두르는 강자로 이해되거나, 혁명을 억압하는 폭압자로 단순납작하게 이해되고, 정작 오늘날 현실에서 가장 뚜렷한 군인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묵살되는 것은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나는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아주 싫어하지만 이번에 딱 한 번 직관적 표현을 위해 사용하였다)


현직 군인들의 선배들이 학살자와 (베트남의) 침략자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죄이지 오늘날 21세기 군사노동자들의 죄는 아니다. 과거 교사들이 촌지를 받고 청소년을 개패듯이 패며 키웠다고 해서, 오늘날의 교사들이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심지어 그들이 당하는 인권유린을 당연시당하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역사 때문에 지금-이곳 현대 한국의 군인들이 시민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들이 어떻게 잘못되든지 외면받으며 명백한 부조리 피해가 마치 그들의 원죄로 취급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진보-좌파 및 평화학자 · 평화주의 운동가들은 이 부분을 명심해야 하며, 우파-국가주의자들도 알량한 '애국 페이'와 '똥군기'로 우리 군사노동자 동료시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짓을 즉시 그만두어야 한다.


지금 군인은,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적은 현금으로 보상받는 약자이며, 그것을 심지어 강제로 끌고 가서 시키는 강제징병은 폐지되어야 하고, 모든 군인들(즉, 모든 군인은 마땅히 직업군인들)은, 자신이 국방산업을 위해서, 자신이 분담하기로 결심한 '전쟁 억지력 생산업'에 희생되는 자신의 범용성 있는 커리어에 대해서, 다른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한 현금과 연금을 통해 보상받아야 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과거 한국 정부군(사람들은 '국군'이라고 부르지만 '한국 정부군'이 가장 객관적인 이름이다)의 학살 피해자들과, 오늘날 한국 정부군의 병영부조리 피해자들은 사실상 같은 원인으로부터 고통받은 것이다. 군인을 생각하고 저항하고 노동조합 조직하는 존재가 아니라, 법치주의와 인권개념이 개입할 수 없는 상명하복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과거 수많은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고, 오늘날 수많은 강제징병 군인들과 직업군인들이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故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며


나는 개인적으로 故변희수 하사를 두 번 정도 만나뵈었던 적이 있다. 그는 군복무 중 소속부대의 허가 하에 성별 정정 절차를 마치고 여군 편입을 원했으나 소속부대의 상급기관인 육군본부의 결정으로 강제전역당했고, 그 결정을 뒤집기 위해 법적으로 고군분투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가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제기한 전역 처분 취소 청구소송은 언론에서는 그를 일종의 -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 일종의 풍파를 일으키는 내부고발자처럼 다루었고, 댓글 다는 인간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말들로 故변 하사를 공격했다. 그런 모멸감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한국사회는, 전근대적인 국방과 애국주의 관점에서도, 진정한 애국자였던 변희수 하사에게 회복할 수 없는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武人)에 대한 예(禮)조차 다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긁어 부스럼 만드는' 트러블메이커 취급했지만, 그 분 내면의 애국심과 적성국에 대한 분노라는 군인으로서의 미덕에 대해 묻고 존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떤 '보수주의자'도, 그 어떤 '애국주의자'도…. 그는 한국 육군 제5기갑여단의 훌륭한 전차 조종수였고, 내적으로도 군인으로서 너무나 바람직한 북한에 대한 공격적 경쟁심과 남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빈 자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그보다 더 공동체를 사랑하지도 않는 비겁한 인간들은, '군대는 원래 보수적인 조직이니까' 라는 헛소리로 그 모범적이고 유능한 육군장병을 살해했다.



군인의 처우와 인권을 개선하고 월급을 올려라.


모든 종사자가 자유 징집병으로 되어 있는 미군은, 미국사회 안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개개인의 개성에 포용적인 문화를 가진 곳이다. 모두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매우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곳이고, 공동체가 그들에게 보상하기조차 힘든 굉장히 특수하고 꺼림칙한 일들을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며, 그러한 봉사의 마음으로 군사 노동을 자처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너는 여자야? 남자야?' 라는 황폐한 지껄임으로 모욕을 주고 군복무를 그만두게 만드는 짓, 그것이야말로 아군살해이고 이적행위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없다. 남성들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강제적으로 군인이 된 바가 있다 보니, 자신의 청춘을 강제로 빼앗겼음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군대를 정당화하기만 하거나 · 강제로 빼앗긴 것을 자각하고 군대를 증오하거나 · 이미 한 번 빼앗겼으니 그 쪽으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관심하다. 여성들은 본인 일도 아니고 여성인권 문제를 복구하는 것에도 바쁘니 군인 문제에 무관심하다. 심지어 '곰신 · 꽃신' 이라는 끔찍하고 기괴한 형무소 옥바라지의 변형 문화가 정착되어, 강제징집피해자인 자기 남자친구를 불쌍해하여 의로운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그저 멋있어 하고 그저 끌려간 남친을 기다리며 스마트폰과 우편으로 21세기 옥바라지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할 뿐이다. "사이버펑크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남자들은 (전역하면) 내 일 아니고, (전역 전에는) 2년 죽었다셈치고 참는 것이고, (전역 후에는) 자신을 강제징집한 군대에 갑자기 감정이입해서 남들도 다 군대가서 고생해야 하며 징집병이야말로 진정으로 정당하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강제징병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려 버리거나 더 이상 자기 일 아니라고 무관심해지고, 여자들은 거기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고 근본적으로는 자기 일도 아니니, 강제징병제는 오직 국가인권위원회나 군인권센터를 위시한 소수 시민사회 진보-좌파의 노력으로 겨우겨우 병영인권을 개선하고 자살률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남성 강제징집피해자(전역자)들의 일부는 자신과 같은 불행한 사람을 더 만들지 않으려고 고민하는 대신, 국방부가 자기들 입장에서 내놓은 '국군 50만명을 위해서는 곧죽어도 징집제가 필요하다' 라는 주장을 조금의 비판도 없이 인생의 진리처럼 떠받들고 부드러운 모병제 전환을 위한 사회적 공론을 번번히 공격하고 조롱하고 있다. 국방부는 현재 몸무게가 202.9kg인 사람이든 26.4kg인 사람이든 무조건 육군훈련소로 끌고가서는, 아픈 환자와 장애인조차 사회복무요원으로 강제징용시키는데, 이러한 작태에도 남성들은 대체로 침묵할 뿐이다. 여성들 입장에서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혐오는 물론이고 '여자도 군대가라' 라고 공격해대는데, 그런 집단을 위해서 먼저 손을 내밀 리가 없다. (물론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면 참 좋겠다)


몸무게가 26kg이어도 군대에 끌려간다.



군대와 페미니즘에 대한, 페미니즘 내부적 비판 


남성들이 먼저 여성 인권 문제에 관하여 행동하지 않는 한, 남성이 여성에게 남성 인권 문제(강제징병)에 관하여 행동해달라고 요구할 명분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즘 수용자 및 담론장 참여자(이하 '논자(論者)')의, 징병제에 관해 완전히 정신나간 판단을 보여주는 성찰 없는 형태의 '징병피해자 일등시민권' 해석만큼은 즉시 정정해야 한다. 나는 급식을 먹던 중학교 시절부터 페미니즘을 정제된 형태의 칼럼으로든 '키보드 배틀'로든 옹호하고 지지하는 작업을 계속해왔고, 대학교 시절은 페미니즘 학회에 눌러앉아 살듯이 함께했다. 내가 아는 대부분 페미니스트는 강제징병 제도에 대하여 기본권 침해라는 원칙으로 함께 분노해주었고, 끌려가는 친구들을 안타깝게 여겼고, 온정적이고 불쌍한 시선으로 봐 주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남성성(masculinity / toxic masculinity) 비판 · 호모소셜 비판 · 남성연대(homoeroticism) 비판에만 골몰하여서 다른 중요한 요점들을 간과한 나머지, 일부 페미니즘 논자들은 "한국이라는 병영국가 안에서 병역수행은 남성이 주류적 정상 남성이라는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라고까지 비약해서 해석하였다. 심지어는, 여성징병제가 시행되지 않는 까닭은, 국가가 여성을 '병역에서 배제된 2등 시민'으로 격하시키고, 국방의무 수행이 제공하는 남성성이라는 호모소셜 멤버쉽에 여성이 감히 가입할 수 없도록 '비-남성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를 수행하는 중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건 또 무슨 개미친소리인가? 그러면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 피해자들은 '일본제국인이라는 시민권 획득 의식'을 수행한 것인가? 그래서 그 사람이 떳떳한 일제시민이 되어서 금의환향 했는가? 아니면 군대 끌려가서 발목 잘리고 척수가 부러지고 목숨 끊어진 수많은 강제징용 피해자처럼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는가? 당장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갈겨도 시원치 않을 놈들! 그 망할 놈의 강제징병 피해가 '남성성 호모소셜'에 가입시켜주는 그리도 좋은 거면 당신도 군대 가면 될 것 아닌가? 


제 인생을 가치있는 것으로 채울 능력이 없는 머저리 같은 남자들이 군대경험을 '호모소셜 멤버쉽'으로 악용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도 자신이 군대에 약탈당한 것이 너무 많으니 약탈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와 거기서 얻은 피해경험과 술친구 인맥이나마 제 찢긴 가슴을 보상하는, '보잘것없지만 자신에겐 그것 하나뿐인 알사탕'같은 유일한 보상이니까 끝까지 입 안에서 굴려 먹는 것이지, 군대에 갈 어떤 위험도 없는 자가, 강제개병제(皆兵制) 자체가 남성들에게 무슨 선물인 것처럼 주둥이를 놀리면, 군대 가서 자살하고 살해당한 수많은 원혼들이 그 아무렇게 뚫린 아가리를 다시 쳐다보지 않을까? 


지금 당장 진짜로 우체통에 '소집영장'이 날아올 걱정도 없으니, 아무렇게나 뚫린 입과 찢어진 지느러미를 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미치광이들이, 존재했다. 아마 지금도 존재하겠지. 인간들 중에는 멍청한 미친놈이 존재하고, 자연의 잔인한 확률 추첨은 여성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으니까. 그게 비껴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물구나무선 여성혐오이다. 그러나 자연의 우연이 인간을 멍청하고 잔인하게 빚어냈다고 해서, 그 자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호모소셜 비판'이 기괴하게 비화된 '병역의무 특권 취급하기'야말로 또다른 형태의 수평 폭력이며, 그런 방식의 발상은 멈춰야 한다. 여자고 남자고 다 같이 죽어보자는 것이니까.



징병특권이라는 낙인을 거두고, 함께 피해자공동체로.


제3물결 페미니즘 - 그러니까 교차성 페미니즘에서, 우리는, 집단이 아니라 정체성을 단위로 사유하기로 합의했다. 예를 들면, 단순하고 납작한 2차원적 범주로서 '여성' 이 아니라, '어떤' 여성인가, 예컨대 동양인 여성인가 … 이주민이자 장애를 가진 여성인가 …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중년 경력단절 여성인가 … 요양병원에 입원한 빈곤 여성인가 … 낙태 경험이 있는 청소년 여성인가…, 와 같은, 중첩되고 교차되는 수많은 정체성들이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의 정체성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한 개인에게 수많은 변동치와 고유한 체험, 존중받아야 할 목소리와 경험들을 만들어낸다고 우리는 관찰하였고, 우리가 본 게 확실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어떤 남성이 군대 갔다가 장애를 얻고 돌아왔다고 하자. 내 친구들 중에서도 피해자가 굉장히 많은… 아주 흔한 일이다. 우리는 그 남성이 단지 2차원적으로는, 한국에서 이른바 '이대남' 그리고 '한남충'이라고 부름직한 쓰레기 같은 남성들이 소속되어 있는 '남성'이라는 집단에 들어 있음을 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할 말은 '그래, 너도 군대 다녀 와서 1등-남성성-시민권을 가졌으니 정말 좋겠다야, 나도 군대 보내 주면 안되니?' 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 '군대 경험자' 혹은 '남성'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 그리고 '장애인' 또한 '트라우마 피해자'에도 있음을 이해하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을 모든 '국가폭력 피해자', '장애인', '트라우마 피해자'를 대표하는 한 사람의 사절이자 대표자로 존중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일베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여성혐오자라 하더라도, 그가 받은 피해 그 자체는 정당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동일한 피해를 당한 다른 피해자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그리고 그 피해자의 해당 피해사실을 인정하고 · 그의 반응을 경청하며 · 해당 피해를 다루는 시공간에서 그의 인격과 경험을 존중할 때, 모든 피해자 공동체는 존중받는다. 그를 대표자로 하여 존중받는다. '모든 정체성을 가진 당사자는, 그 정체성 공동체의 외교관이자 대표자' 이라는 것. 이것이 내가 해석한 제3물결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함의 중 하나이다.


그러니 우리도, 물론 미운 남자들도 역겨운 남자들도 많고, 정말 없애버리고픈 남자들도 많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인간들이 세상에 수두룩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건대 시공간과 연령을 막론하고 보통 여자보다 남자의 '인격적 품질'이 확률적으로 훨씬 더 좋지 않은 경향이 있지만(이 글에 달리는 댓글에서 그 확률이 재현될지 기대해보자), 잊지 말자. 여자건 남자건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내 안에도 다른 성별과 동일한 유전자가 들어 있고, 다른 성별의 모든 것을 만들어낼 유전정보와 재료들이 들어 있다.


융 심리학의 아니마-아니무스 이야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원래 여자와 남자가 모두 될 재료가 들어 있었고, 배아 시절 우리 모두가 난소를 가지고 출발했으며, 아주 작은 열쇠 유전정보의 작용 때문에, 반쯤은 남자로 · 반쯤은 여자로 태어난 것이다. 근원적인 성격과 성향은, 고작 우리의 성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선천적인 두뇌 때문에 만들어졌고, 성별에 따라 지독하게 차별된(젠더화된) 교육과 호모소셜 때문에 특정하게 습관화된(뒤틀린) 방식으로 표출되도록 사회화되었다. 남자들도, 만약 못되거나 악한 행동을 했다면 그 보복을 처먹어야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경직되고 분열된 저열한 과거로부터의 유산에 거의 영구적인 영향을 받은 피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군 가산점 제도 - 역겨운 납치범의 알사탕


그래서, 많은 남자들의 기괴한 행동에는, 사실은 묵과할 수 없는 국가폭력의 상처와 흉터가 남아있다. 나는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한 남성들의 집착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남자들의 꿈은 위축되었다. 반인권적이고 위헌적인 강제 징집과 상식을 벗어난 강제징병 보상이 장기화되자,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우리나라 남성들은 국방부의 쥐꼬리만한 보상에 만족하고, 남자들의 삶을 나락가게 만든 가해자인 국방부와 병무청에 '스톡홀름 증후군(납치피해자가 납치범에게 애착을 느끼는 증후군)'에 빠져서, 군생활에 대한 격분과 찬미를 동시에 느끼는 양가감정에 고착되어 있다. 그리고는 많은 남자들은 제대로 된 월급과 모병제 같은 '빅 퀘스천'을 던지지 못하고, '군 가산점 제도' 따위의, 보상 같잖은, 귀엽고 보잘것없는 쓰레기 같은 장난감이나 요구하고 있다. 


남자들 90%가 강제로 끌려가서 2년을 노예 상태에서 군역이라는 특수하고 가혹한 노동에 이용당하고, 절반은 스트레스에 미쳐서, 운 없으면 죽어서 나오는 게 한국 군대인데, 지금 군필 공무원 가산점 따위가 '보상'인가? 군 가산점은 존재했으면 폐지되었어야 했고, 존재하지 않았으면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았어야 할 역겨운 '납치범의 알사탕'이다.


물론 군 가산점 폐지는 잘못되었다. 물론 군 가산점 제도는 위헌이다. 애초에 군 가산점 제도의 폐지 자체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여성단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장애인 단체의 발의로 추진되었다. 군 징병은 선택할 수 없는데,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일괄적인 공무원 임용 인센티브를 받으니 당연히 위헌이다. 그런데…?


군 가산점이 위헌이면, 강제 징병은 말이 되고?


그럼 강제 징병제는 합헌이고? 강제 징병제라는, 자살과 가혹행위가 난무하는 남자 청년 대 학살극을 벌이는 이 나라에, 군 가산점 하나 폐지되면 합헌적 유토피아가 열리는가? 국방부가 열어재낀(그리고 국방부에게 그럴 권한을 쥐어준 국회의원들이 열어재낀) 이 지옥같은 피의 축제의 피해자가 아니라면, 군 가산점 제도를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끌려가는 노예제가 아니라면, 자기가 뒤집어쓰는 지옥이 아니라면, 그 보상이 아무리 강제징병 피해자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알사탕이라도, 더 거대한 위헌적 입법에 고통받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피눈물과 넋을 달랠 수만 있다면, 허용해야 한다. 



 가산점 제도 - 잘못 폐지된 쓰레기


군 가산점 제도는 잘못 폐지된 쓰레기다. 쓰레기이지만, 폐지되어서는 안 됐다. 그 쓰레기는 강제징집 제도라는 더 악랄한 폐기물이 존재하는 한, 남성들의 슬픔과 넋을 달래는 최소한의 상처 보호제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왕 군 가산점제가 폐지된 한, 이재명 대통령후보가 공약한 '군복무 기간 호봉 인정 의무화' 제도는 합리적인 방식의 군 가산점 제도 대체재이다. 강제로 끌려가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니, 공무원이 맞다. 2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으니, 2년어치 공무원 호봉을 취직 시 산입해줘야 한다. 강제로 간 것이지만, 하기는 했다. 그러면 경력이 맞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군대 못 가는 사람에게 차별 아니냐고? 그래도 그 사람은 군대를 안 갈 수 있었잖나! 군대 가는 게 무슨 유토피아행 로켓이라도 되는 줄 알아? 억지로 군대 끌려와서 죽을 고비 넘기고 온 강제징용/강제징집 피해자들에게 군 가산점과 군 호봉까지 뺏어가면 평등사회가 열릴 줄 아는가! 역겨운 납치범의 알사탕조차 빼앗긴 징병제 피해자들 가운데 방황하는 마음의 칼날을 다잡지 못한 사람들이 남초커뮤니티에 모여 여성복지정책 싸그리 폐지시키자고 봉기하겠지!!! 모든 전역자들이 젠틀맨이라서 만만한 여자에게 화풀이 하지 않고 점잖게 모병제 입법투쟁을 한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2년을 강도질당한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가산점 몇 개, 호봉 몇 개 그거 한줌 쥐어주기가 싫은가?



'점잖게 모병제 입법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내가 존경하는 단체인 <모병제추진시민연대> 멋진 사람들이다.




내 일 아니라고?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군대 안가니까? 당신도 언젠가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말한 <무지의 장막>의 정치철학이다. 당신이 징병제에 당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운이 좋아서 군대를 안 갔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비껴간 모든 운에도, 자신이 그 시행에 포함되었던 랜덤 연산이었다면, 시민적인 연대책임을 지고, 함께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인류가 공동체라는 것을 꾸리는 까닭이고, 현대사회가 세금과 사회복지를 운용하는 이유이다. 


내가 운이 좋아 징병대상자로 찍히지 않았더라도, 운이 나빴으면 찍힐 수 있었다. 그 저승사자 칼날에 찍히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찍힌 모든 불운한 자를 위해, 운 나쁜 평행우주의 나를 위해, 평행우주에서 군대에 끌려가서 수류탄을 안고 자살한 나를 위해, 평행우주에서 총기난사범이 된 나를 위해, 군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징병제 피해자(전역자)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줄 수 있는 각종 보조금이나 가산점 제도를 지지해야 한다. 


이제 다시 물으리라. 군 가산점 제도가 위헌인가? 그러면 강제징집은 합헌이고? 모병제만이 합헌이다.




27 3천억원 : 대한민국을 모병제로 만드는 구체적인 예산


모병제로 가는 길은 기본적으로 여러 행정적 단계가 필요하다. 가령, 시민이 임금계약에 따라 자유롭게 군입대를 선택하는 모병제로 4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의 군을 모집하기 위하여서는, 군대 채용시장을 둘러보러 온 한국인 50만명이 동의할 만한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규모의 직접예산과 간접예산을 한국인들은 준비하여야 한다. 국방부가 한국군 채용시장에 제시할 수 있는 제시임금은 (최저임금이라는 바닥이 있긴 하지만 군인 월급이 당연히 그보다는 높아야 할 것이며) 수요-공급 법칙을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한선과 하한선에 모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국방부 급여예산을 확보해야 하며,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소득에 대하여 그 증가분을 증세해야 한다. 한국군의 국경방어 혜택을 받는 모두에게. 


예를 들어 보자. 내 생각에 군대에 건강과 커리어를 희생하는 동료시민의 노고를 보상하고 예우하며 시민의 군 입대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봉급으로 적절한 급여는, 병사 초봉 기본급 5천만원 선이다. 2021년 기준 육군하사 초봉(하사1호봉) 연봉은 기본급 17,496,000원이다. 육군소위 초봉(소위 1호봉) 연봉은 기본급 19,492,800원이다. 


현재 사병이 강제징집제라서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는 특수한 임금(2021년 기준 연봉 5,520,000원)을 받고 있지만, 가정하건대 한국군이 이들을 연봉 5천만원이라는 국방부 출발임금(기준임금)으로 고정하고, 2021 하사초봉과 2021 소위초봉의 비율을 반영하여 하사초봉을 정한다면, 1 : 1.114 비율로서, 육군 이등병이 연봉 5천만원을 받으면 육군하사 초봉은 55,700,000원이고, 해당 비율을 소위에게 준용하면 소위초봉은 62,049,800원이다. 한국 육군은 현재 장교 49천명 / 부사관 85천명 / 병 261천명이므로, 지금 즉시 해당 봉급의 모병제로 개혁한다는 가정을 하면, 육군 기준, 다음과 같은 대략적 임금이 도출된다.


육군 병 초봉기준 예산 : 13,050,000,000,000원(13조 5백억원)

육군 부사관 초봉기준 예산 : 4,734,500,000,000원(4조 7천 3백 34억 5천만원)

육군 장교 초봉기준 예산 : 3,040,440,200,000원(3조 4백 4억 4천 20만원)

이 소요된다. 이 모두를 합하면 20,824,940,200,000(20조 8249억 4천 20만원)

약, 육군의 모병제화 기준 21조원이 소요된다.


가장 규모가 큰 육군 기준으로 시범을 보였으니, 이를 해군 · 해병대 · 공군 3군에도 적용해보겠다.


해군은 병 15,000명 / 부사관 19,000명 / 장교 7,000명이며, 

해병대는 병 20,000명 / 부사관 7,000명 / 장교 2,000명이고,

공군은 병 33,000명 / 부사관 20,000명 / 장교 12,000명이다.

도합 병 68천명, 부사관 46천명, 장교 21천명이며, 해당 인원에 기준 초봉을 준용하면,


해군/해병대/공군 사병 3,400,000,000,000(3조 4천억원)

해군/해병대/공군 부사관 2,562,200,000,000(2조 5천 6백 22억원)

해군/해병대/공군 장교 1,303,045,800,000(1조 3천 3억 4천 5백 30만원)

이 소요된다. 이 모두를 합하면 7,265,245,800,000(7조 2천 6백 52억 4천 5백 20만원)

약, 해/해병/공군 기준 7조 3천억원이 소요된다.


이를 합하면, 현재 국군 규모를 유지하는 병사 초봉 5천만원 모병제의 소요비용은 약 28조 3천억원이다. 나는 급여의 시작금액인 초봉을 기준으로 계산했지만, 호봉이 올라가면서 급여도 올라가기 때문에, 약 50%의 추가 예산을 책정해야 할 것이다. 이 가정을 할 경우, 대략 42조 5천억원 정도의 추가 예산 편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미 (2021년 기준) 15조 2058억원을 인건비로 지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27조 3천억원만 더 투자하면 전 군을 연봉 5천만원부터 시작하는 모병제로 만들 수 있다. 


2021년 한국의 총예산은 558조였다. 27조 3천억원은 558조원의 4.89%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약 4.89%만 더 확보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세금을 약 5%만, 단 5%만 더 내면, 수많은 청년들을 극도의 고통에서 구하고, 대한민국을 모병제로 만들 27조 3천억원을 확보할 수 있다. 모병제가 되어서 병사 월급이 대폭 상승하면, 부사관/장교의 월급은 병사 월급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부사관과 위관급 장교에게도 마땅히 수령할 만한 보상과 예우를 갖출 수 있다. 군인에게는 돈을 많이 줘야 한다. 돈 말고는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군인들은 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탄광의 광부 같은 극히 힘든 직업이기 때문에.



군인에게 돈을 주어라군인에게  주느라 우리 생활비가 빠듯해질 만큼.


많은 돈은 그 자체로 획기적인 군인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고, 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 돈 자체가 삶과 노동에 대한 보상이고 위로가 되므로 군대에 대한 개인 내적인 수용도 비교적 쉬워질 것이다. 돈 자체가 복지이므로 전역자들에게는 새출발의 기초자본이 되어줄 것이고, 장기복무자들에게는 꾸준한 헌신에 대한 복지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공군 소위로 복무하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내 존경하는 친구의 말처럼, 군대의 고용창출과 임금은 그 자체로 경기를 부양하는 '뉴딜 정책'이다. 


그리고 또한 한국군 장병이 직업군인이 되면, 그것도 큰 돈을 받는 직업군인이 되면, 병영부조리는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내가 '아테네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현상 때문에 일어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떠올려보라. 그곳에는 군 복무가 자랑이었고, 특권이었으며, 명예로운 일이었다. 아테네에 한국군 총기난사 사건과 같은 극단적인 부조리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했다. 왜 그런가? 그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무기를 들고 결집한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에서 아테네의 시민권자에 상당하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사람들은 중산층들이다. 큰 연봉을 받고 그 돈을 밑바탕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산층 노동자이다. 한국 사람들은 중산층들을 존경하고 존중한다. 돈 없는 사람들은 훨씬 조금만 존중한다. 청소년들은 더더욱 존중하지 않는다.


지금 군인들은 자유인이 아니다. 중산층 노동자가 아니다. 돈도 없다. 자립한 어른도 아니다. 강제로 억지로 끌려간, 직업 없고 · 돈 없고 · 빽 없고 · 경험 없고 · 지혜 없고 · 두뇌도 다 성장하지 못하고 ·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 경력 단절된 18세~23세 안팎의 남자 '청소년'들이다(한국의 『청소년기본법』은 '청소년'을 9세~24세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징병제의 본질은 '아동학대'이자 '청소년 등쳐먹기'인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지만 특히 자신을 권익을 위해 대신 싸워 줄 변호사를 고용하고, 시민사회 분야의 여론전을 시작하고, 군인 복지를 위해 힘써줄 국회의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각종 민간 서비스를 이용할 돈과 경험이 없다. 사회란 무엇인지, 정부란 무엇인지 감조차 잡지 못한 '짬찌'들이다. 그래서 군대 바깥의 사람들도, 군복무를 끝마친 사람이든 군대를 상관쓰지 않아도 문제 생기지 않는 사람이든, 그들의 처지를 신경쓰지 않는다.



자유국가의 군인은 자유롭고 부유하게 나라를 지켜야 한다.


만약에 군인들이 초봉 5천만원, 평균연봉 1억원의 정규직 공무원이 된다면, 군인들이 자유를 얻는다면, 사람들은 군인을 멸시하고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우러러보고 그들의 생활에 관심갖게 된다. 마치 한국인들이 삼성 · LG · 한화처럼 대기업 간 사람들을 우러러보고, 그 '정규직'들이 무슨 피해를 당했다고 하면 벌떼같은 관심을 보이듯이. 그리고 반대로, 삶의 벼랑 끝까지 몰려서 오직 입에 풀칠하기 위해 쿠팡 같은 단순노무직에 지원한 사람이 과로사로 쓰러져 죽어도 별 관심 갖지 않듯이. 둘 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고, 이 사회심리학적 현상 자체를 뜯어고쳐야겠지만, 지금 군대에 대한 관심의 유형은 후자에 가까우며, 우리는 군인들을 고소득 중산층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전자로라도 바꿔놓아야 한다. 군대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어차피 갔다 오는 곳' 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오히려 삶에서 그 기간이 당연시되고, 그 안에서 겪는 고생도 당연시되며, 모든 기괴하고 끔찍한 폭력들이 의례화된다. 


모병제 반대론자들은 '모병제를 하면 가난한 사람들만 군대를 가서, 군대가 슬럼화될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월급을 많이 주면 바로 (돈이 많으니까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서) 해결될 문제이다. 징병제는? 이미 우리 군은 슬럼이다. 농담하는 게 아니고, 과장하는 게 아니다. 군대 안 다녀와봤는가? 그곳은 분노와 좌절과 히스테리와 광기의 용광로이다. 제발 현실을 직시해라. 징병제야말로 군대를 슬럼화시킨 주범이다. 징병제는 모든 사람이 자포자기인 상태로 불만과 불안에 가득한 채 군대에 입영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수평폭력이 들끓게 하며, 경력단절과 깊은 외상장애만을 남긴 채 전역하게 만든다.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징병제이고, 50만명의 자유로운 정예병사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모병제이다.


군인은 우리 이웃이고 고객이다. 군인은 우리 시민이다. 군인은 우리 동료이다. 군인은 우리 한국인이다. 군인은 자유인이다. 군인에게 궂은 일을 맡겨야 하므로, 자유인 중에 선발하며, 자유인 중에 최고의 대우를 하라. 이것은 내가 우파라서 하는 말도 아니고 (아시다시피 나는 상당한 좌파이다) 내가 강제징집 피해자라서 하는 말도 아니며 (어떤 강제징집 피해자들은 나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군인이 단순히 존경스러워서 하는 말도 아니다 (없어지면 큰일나는 직종은 군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군인보다 더 위험하거나 희생적인 직종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군인은 인권을 가진 우리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인류의 정신나간 꼴뵈기싫은 전쟁광 일원들을 막아서는, 우리 자유의 방패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 멋진 일은 크게 보상받아야 한다. 


군인에게 말로 때우지 말자. 군인에게 돈으로 보상하자. 우리 월급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자. 이 윤리적 결단을 받아들이느냐의 여부가, 누가 '아가리 애국러' 인지, '군대서비스 구독료를 결제하는 민주국의 자유시민' 인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지인 것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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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rittany Colette on Unsplash

The Korean War Memorial, National Mall, Washington, United States(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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