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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Apr 16. 2022

노란 리본의 예술철학:
김수영과 ‘0416’ 사이에서

주요 개념: 참사, 시민성·시민적, 미학화, 징후적 미감(美感)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

        - T. 아도르노



주요 개념: 참사, 시민성·시민적, 미학화, 징후적 미감(美感)



1. 고통과 일반적 착시들


 우리가 당할 수도 있었던 비참과 죽음을 대신 짊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과 강남역 페미사이드(Femicide) 사건. 세 모녀 사건과 구의역 사건.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된 비참과 위협에서 단순히 운이 좋아 살아남은 우리는, 그들의 영령을 마음의 둘레에 안개처럼 펼치고 살아갑니다. 희생자는 죽고 없지만 그들에게 어떤 지평으로든 마음을 이입한 시민적 유족들은 남은 생이 그들의 장례가 됩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겪었던 구체적 통증을 자꾸 짐작하게 되는 공감성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운 없었으면 그 일을 내가 당했겠다는 안도의 고통, 따라서 그들은 나 대신 희생된 것이라는 부채감의 고통 역시 때때로 우리를 습격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느낀다 하더라도, 모두가 그 사회적 참사에 즉시 개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민 대부분은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참사를 중계 받으면서도 똑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개별 시민 사이의 정서적 거리는 함께 슬퍼하고 화내줄 만큼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몸 다른 주소라는 완전한 안전거리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들이 남긴 시민적 과제를 이론적으로 알면서도, 다른 물리적 몸을 가졌음에 안도하고 더 윤택한 삶을 찾습니다.


 이 두 입장은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정당화하여 현재를 유지시킵니다. 우리가 뉴스를 보면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은, 우리에게 마치 그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계속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며 기도하면서도, 육천 원이 넘는 점보사이즈 스무디를 들고 노숙인 앞을 지나칩니다. 저는 이것을 ‘김수영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김수영의 시구대로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마음에 메아리치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 비겁함은 “민주국가의 착시’ 때문에 더욱 반성되지 못하고 견고히 유지됩니다. 민주국가의 착시란 제도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국가에서, 시민들은 선거가 이루어지고 정부조직이 유지된다는 사실만으로, 정치사회적 참사의 국가책임을 과소평가하고 정부가 제공하는 안전보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입니다. 


 이 문제에 예외인 나라는 없지만, 일본과 미국의 식민 상태로 근대화되어 자생적 시민조직이 정착하지 못한 한국은 더욱 심각합니다. 단지 5년에 한 번씩 선거를 하고, 가끔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착시는, 참사가 일상의 가능성이 아닌 공화국의 예외상황이며, 공적으로 투표를 거듭하고 사적으로 노력을 거듭하면 세상이 나아진다고 믿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김수영처럼 “개인적으로” 당당히 부끄러워하며 “공적으로” 시스템에 모든 것을 맡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착시를 깨어주는 것이 사건으로는 세월호였고, 물밑으로는 비정부기구, 군소 정당 등 풀뿌리 시민사회의 고발과 데모였습니다.



2. 슬픔의 티켓화,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슬픔의 미학화


 그러나 더욱 절망스러운 사실은, 참사를 목격한 사람 안에서 솟는 이 미안함, 거북함, 슬픔, 부채감조차 때로는 그 자체로, 미학적 회로를 경유하여 그에 대한 시민적 책임/감을 덜어내는 중화제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마치 참사에 대하여 시민으로서 지불해야 할 티켓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페이스북 릴레이 이벤트에 진심으로 ‘참여’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고작 친구들끼리의 결의를 다질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은 나르시스적 독백에 불과합니다. 진심은 힘이 아닙니다. 힘은 정치적 적을 설득하고 시위하고 때로는 때려 부수는 오직 ‘정치’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슬퍼하였고, 분노하였고, 페북에 참여하였고, 때문에 정치를 수행한 것 같은 착오를 겪습니다. 이것이 슬픔이 정치적인 중화제로 작용하는 대표 사례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착오에 미학: 나르시스적 미학이 작용할 때입니다. 참사의 희생자에게 바쳐진 예술품과 메모들은 항상 ‘그 자체로 예뻐질 수 있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슬픔에는 슬퍼하는 그 자신에 대한 대견함도 섞여 있습니다. SNS에 자기 우는 모습을 찍은 셀카가 의외로 많이 떠도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인간의 나르시즘은 언제나 거대 담론, 거대 의미망에 참여하는 자신을 주시하며 스스로 자랑합니다. 이 욕망은 우리를 투사, 민주화 운동가, 애도자로서 자기 의식할 기회를 원합니다. 어느 순간 문득 애도가 그 자체로 미학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이 징후입니다. 


 진심어린 애도는 물론이거니와 참사 희생자들을 모욕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정하게 화재참사의 그을음에 새겨진 추모의 말, 대형사고의 추모 문화제에서 발표되는 추모의 공연, 분향소 영전 앞에 바쳐진 그림이나 편지에서 미학으로 매개되는 나르시즘 위험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추모가 완전히 엄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민적 행동을 촉발하지 못하고 그저 미학적 슬픔/슬픔의 미학으로 전유되는 추모는, 세계에 어떤 구체적인 실천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연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참사의 당사자성으로부터 더 멀리 비켜서있는 사람일수록 더 쉽게 추모하며 ‘잊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시민적 책임과 그 속죄를 오직 믿음으로 아웃소싱하는 기독교인들처럼 정치에서 비껴나 미학의, 혹은 제의(祭儀)의 안일함으로 숨어들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3. 미적 보조성 그리고 징후로서 산출되는 미감


 그러나 정말, 모든 의미에서, 미감(美感)은 반정치적인 것이며 모든 추모는 아름다움을 강박적으로 걷어내야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엘리트주의로, 엄숙주의로 돌아가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산 자의 응답을 부르짖는 참사의 영령과 우리-생존 시민-의 무거운 책무라는 답답한 상황에 서로를 북돋우기 위해 사용하는 ‘미적 보조력’이 있음을 말하고 응원하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오브제가 바로 세월호 참사 때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노란리본입니다.


 노란리본은 우리 세대의 이크튀스입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지하 교회로 숨어든 기독교인들은 이 비밀 기호를 손바닥에 그리는 식으로 서로를 식별했다고 전해집니다. 박근혜 정권동안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들이 노란리본을 사용한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사건 당시 군령을 어기면서까지 노란리본을 착용한 황기철 전 해군 참모총장처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박해받는 모든 양심들은 공적·사적 자리에서 이 오브제를 착용하여 서로를 식별합니다.


 하지만 앞서 비판대로 이 노란 리본이 나르시스의 미학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묻는다면, 이 경우는 좀 다르며, 두 지점에서 슬픔-미학 사이의 새로운 규준과 모범을 보여준다고 말하겠습니다. 첫째로 오브제의 단순함이 보장하는 미학의 최소성입니다. 노란리본은 그 자체가 최소한의 미학적 내용을 지니는 극히 단순한 지시자(指示子, pointer)라는 사실입니다. 이 리본에는 어떤 미학적 기교와 나르시즘도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둘째로 오브제의 사회적 역할이 발생시키는 안도감 및 감동의 형식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을 노란리본이 매개하는 ‘징후적 미감’이라고 부릅니다. 양심은 늘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수많은 무관심한 타자와 적대적 타자들, 숨은 일베들과 태극기부대들, 단순히 노란리본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사건들, 그리고 그 모든 식별불가능성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건널목에서,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검은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린 노란리본을 보며 생판 처음 보는 주인과 기억-다짐의 연대를 확인합니다. 우리는 건널 수 없는 타자성의 거리에서 살아가지만, 적어도 세월호의 슬픔과 진상규명에 대한 공감이라는 시민적 공유 지반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줍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노란리본 자체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노란리본에 ‘깃듭니다.’


 노란리본은 우리에게 사회적 이슈와 미학 사이의 새 지평을 제시하고 그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미학의 공론장에는 아름다움은 사회적 의미와 무관하다, 혹은 무관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예술만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적어도 아름다움은 우리가 희망을 느끼는 무언가에서 징후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며,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의미부여한 오브제에 우리의 투쟁과 함께 깃들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끝.







이 글은 세월호참사 3주기였던 2017년 예술철학 수업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세월호참사 8주기를 맞아 게재합니다.


이미지 출처: 참여연대, <서촌노란리본공작소, 1000일의 시간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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