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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Apr 18. 2022

Gonçalo Mabunda:
죄악의 질료에 관한 폭로

흉측함을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Gonçalo Mabunda:

형상(Eidos)에 심어진 죄악의 질료(Hyle)에 관한 폭로


그림 1. 곤살로 마분다, <왕좌(Throne)>, 연도 미상


 곤살로 마분다의 고향 모잠비크는 17년에 달하는 오랜 내전을 겪었습니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는데, 1962년부터 전개된 모잠비크 해방전선(프렐리모)의 게릴라 투쟁과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을 계기로 1975년 독립합니다. 그러나 독립 이후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에 흑인 주도의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된 것에 불만을 가진 미국 등 서방국가와 백인 통치 짐바브웨(당시 로데지아) 및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은, 주로 반공주의 사상의 백인 소작농으로 이루어진 모잠비크 민족저항운동(레나모)을 조직하여 모잠비크 정부를 공격합니다. 레나모는 SOC, 농장, 병원, 마을을 공격하고 조직적인 학살과 고문을 자행합니다. 특히 구호물자 트럭을 공격하고, 식량 창고를 불태우는 등 개발 및 구호 프로젝트를 집요하게 파괴해 서방의 구호품에 의존하게 유도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모잠비크인 1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이 피난에 올랐으며, 250만 명의 전쟁고아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학교와 보건소를 파괴한 결과, 아동들이 사회안전망을 잃고 레나모 측에 징집되어 만여 명의 소년병이 발생합니다. 전쟁은 1992년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지만, 2013년부터 이번에는 프렐리모 집권 하의 정부군이 중범죄를 저지르며 상황은 다시 악화하고 있습니다.


 마분다는 모잠비크가 갓 독립하던 1975년에 태어나 내전 통에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쟁은 땅 곳곳에 버려진 무기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전쟁과 학살을 통해 권좌에 앉은 정치인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해체된 포탄과 수류탄, 탄피, AK-47 소총 등을 모으고 그것들을 용접하여 형상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인간의 공격적 의도를 함축한 전쟁 무기를 오브제로 활용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콜라주해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각 오브제들의 수적 덧셈을 초과하는 하나의 상(狀)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구성에 개입합니다. 그 방식은 직관적이고 비판적입니다. 문화산업용 전쟁영화에서 총과 탄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신화적 표현 양식을 갖습니다;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늠름하게 표현되며, 총알은 늘 발사되기 전의 상태로 가지런히 장전되어 있거나, 발사된 총알이라 해도 사출된 탄피로서만 표현됩니다. 쏘되 맞는 사람은 없고, 피격당해 죽되 관과 시체는 없는 것이 대중문화에서 표현되는 전투와 전쟁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폭력의 정당화와 전쟁 프로파간다로 활용됩니다. 다음 이미지와 같이 말입니다.    


그림 2. 배경화면 웹사이트에서 자주 유통되는 종류의 소총 이미지.


 그러나 실제의 전쟁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죽는 사람은 있는데 쏜 사람이 없습니다. 박힌 총알이 없는데 파괴된 사람이 있습니다. 마분다는 다음 작품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림 3. 곤살로 마분다, <고향에 돌아온 군인(Soldier Returned Home)>, 2012, 에단 코헨 미술관 소장


 알알이 박힌 탄피가 점으로 표현된 피부의 면인지, 눈물인지, 수염인지, 아니면 전쟁이 인간의 영혼에 꽂아 넣은 포탄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형상의 탄피들은 그림 2의 미학화되어 있는 실탄들과 다르게 “발사되어”있습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언젠가 실제로 누군가를 겨누어 발사되었다는 점과, 그것이 실제 사람을 해쳤든 해치지 않았든 전쟁에 연루된 자들의 물질적 얼굴에 뼈대-심어진 인간성의 얼굴에 날아와 영원히 박히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실제 전쟁 무기들을 오브제로 차용한 마분다의 잔인한 익살은, 원리 면에서 완전히 진보한 현실성과 참여성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적 가상성으로부터 현실성이 독해되는 기존 예술의 프로토콜 수순을 견지하면서도, 실제 전쟁에 사용된 무기라는 강렬한 함의가 담긴 오브제를 차용함으로써 현실성으로부터 예술적 가상성이 형성되도록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가상적 형상으로부터 독해된 정신이 형성되는 동시에 무기라는 오브제가 가진 이미 이해된 정신으로부터 형상이 형성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폐기된 무기라는 오브제가 그 자체로 독해 가능한 메시지를 수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재한, 그러나 고통스러움을 무릅쓰고 발굴된 전쟁 유물을 예술적 내러티브로 정렬하는 파토스적 모멘트가 그의 작품에 역사적, 직관적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오브제들은 플라스틱이 아닙니다. 실제로 누군가의 살과 목숨과 가족을 찢어놓았던 실탄, 박격포, 돌격 소총의 조각입니다.



그림 4. 곤살로 마분다, <무제(Untitled)>, 연도 미상


 마분다는 오브제 자체의 상식(Common-sense)적 직관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또한 적극적으로 전체의 형상을 뚜렷한 미학적, 시각적 기획을 통해 조직합니다. <왕좌 연작>에 포함된 이 작품은 그 폭로의 긴장감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고통이라는 경험적 개념 자체를 직관하게 하는 가학적 바늘들로 덮인 이 왕좌. 우리가 볼 때에는 그렇지만 저기에 오를 사람만은 매끈한 등받이와 좌면에 기대어 팔뚝 아래의 시퍼런 총부리를 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태의 폭로와 예술적·미적 고유함을 함께 가져가고자 했던 여러 예술가들과 궤를 함께하는, 참여적 저항예술로도 독해할 수 있겠습니다. 권좌는 늘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형상은 금과 흑단으로 되어 있겠지요. 그러나 죄의 관점에서 그 질료는 아마 저런 형상에 가까울 것입니다. 아니, 오직 마분다 작품이 제공하는 미적 직관으로만 그 질료의 참된 죄악성은 그 휘황찬란한 형상으로부터 끌려나와 폭로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말해, 미학의 의무는 미학이라는 범주를 미학 자체로서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인즉슨, 여타의 언문(logos)과 형상들이 미적 기망을 통하여 품은 죄악들을 은폐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지요. 사이비 미학화들; 역사의 미학화, 정치의 미학화, 담론의 미학화를 지목하여 미의 장막 뒤에 감추어진 저 진정한 죄의 형상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학은 죄의 은폐에 가담한다는 혐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표현을 해낼 때, 진(眞)과 선(善)이라는 두 축 사이에 드러나는 미(美): 완전한 의미의 아름다움으로서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색찬란한 화려함의 아름다움보다, 이 살인과 파괴로 이루어진 존재의 죄악성을 폭로하는 곤살로 마분다의 이 흉측한 연작들의 아름다움이 더 완전할 것입니다. 끝.    



그림 5. 곤살로 마분다, <왕좌(Throne)>, 연도 미상,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 소장


그림 6. 곤살로 마분다, <어둠의 얼굴(Le visage de l'obscurité)>, 2012, Magnin-A 갤러리 소장





이 글은 2017년 예술철학 수업에서 발표되었습니다.

표지 작품: 곤살로 마분다, <The Throne of the Living>, 2020, Jack Bell 갤러리 소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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