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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16. 2022

찬 흰 언 먼 땅의 기별

나루시선, 52

찬 흰 언 먼 땅의 기별


                                                서나루




환상이었다. 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닿고자 하는 소망부터 틀린 것이었다


부친다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0 아닌 모든 거리는 결국 무한했고

편지는 아무것도 어루만지지 못하고 길 바깥에 버둥거렸다


아스팔트 없는

남향의 들판에서 쪽잠을 청하던 마음이 밤새

아이스크림 튀김처럼 얇게 얼었다


우스꽝스럽게 살얼음진

더운 진심들이 발에 채이던 국도

손은 얼마든지 붙잡아주었던 휴게소


언제나 거리의 바깥에 물결치던

신기루의 숲들 넘어

그 사람이 보낸 짧은 기별이 왔다

나는 존재하지 않을 한참을 고민하다

닿지 않을 슬픔을 곱씹었다


이를테면 1929년 시베리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낸 편지는 도착했을까

얼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고 누구의 마음 속에 있을까

그 충분한 한낮의 파도가?


사랑이 흩어졌을 때도

누군가

매일 흩어지는 사랑을 싸리비로 쓸어 

어스름 가슴의 앞뜰에 말려 주지 못했을 때도

누군가

그것을 함께 있는 외로움의 불에

엿새, 아흐레, 열나흘 넘게 타들어가게 했을 때도


거미줄 같은 도시의 회랑들은 빙하 같았고

서러움은 셋방에 어둑하고

체온의 보드라운 곁들은 축축한 현관을 나서지 못했다


주인을 뒤로 하고 날아간 것은 신호뿐이었다

얼어붙은 모스 부호를 풀자

아픔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던 기회로부터

낙오되어 귀향한 우편들이 쏟아졌다


한 계절의 장례가 끝나고서야 코트를 걸치고

테이프 자국 끈적이는 안테나를 들고

남쪽을 향해 나가

슬픈 이에겐 웅얼이처럼 들릴 말을 더듬었다


그 사람이 혼자 점심을 먹던

차갑고 눈부신

곡창지대의 도시가 거기에 있었다







Photo by Serge Gugelman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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