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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11. 2022

인간관계는
내가 나와 하는 것이다.

내 역사가 내 눈에 비친 타인을 만들기에, 내 역사를 반성할 수 있다면.

인간관계는 내가 나와 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말 그대로의 나'랑, '내가 해석한 상대방'이랑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좋거나 누군가가 밉다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반응에는 대체로 그럴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고, 상대방에게 속한 객관적 좋음과 객관적 나쁨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만의 독특한 반응양식과 나의 트라우마 · 나의 집착 · 나의 애착 · 나의 취향이라는 나의 고유한 지각적/인지적 필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모든 호불호의 순간은 실은 나와 나의 대화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인 폭력이나 병리적인 무력한 반응도, 분쟁과 극적인 화합도, 사랑도 이별도, '본인의 시야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을' 두 사람의 인생 해석(세계 해석)이 마주친 결과다. 그렇기에 사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혹은 어떤 서운한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와의 화해가 필요하다. 내 안에 있는 슬픔과 결핍과 트라우마와 분노 그리고 내가 피해를 본 (그래서 앞으로 같은 피해를 방지하고 싶은) 나의 개인적 역사에 대한 나 자신의 위로 및 보상 행동이 필요하다. 


상대방에게 그 역사에 대한 보상이나 존중을 바라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상대방은 다른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 역시 자기 업을 해결하느라 바쁘다. 좋은 사람은 나의 역사(업, 業)까지 챙겨줄지도 모르나, 많은 사람은 남의 업에 관심없다.


남의 역사와 그 역사가 만들어낸 남의 여린 마음에 관심없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불친절하고 정떨어지는 인간일 수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애초에 구조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타인으로 보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혈액투석기계가 있으니 콩팥은 필요없다', 'ECMO가 있으니 허파는 필요없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의 역사는 내가 보상해야 하고, 나의 바람은 우연히 만난 타인이 아니라 완전한 필연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나 자신을 통해서 보상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누군가를 통해 내 역사를 보상받는다고 하더라도, 기억하라, 그가 의도를 가지고 내 역사를 보상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의미부여한 것이다. 그 사람이 행한 랜덤한 행동들 가운데 내가 의미부여한 행동들이 일어나면 내가 내 역사를 보상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베풀기 위해 의도적으로 특정한 행동을 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연히 그랬거나, 아니면 그냥 자기 역사를 보상하기 위해서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다는 속담처럼 뒷걸음질치는 방식으로 타인과 교류한다. 의도적 행동은 많지만, 그 의도가 우리가 쌓은 과거 혹은 우리가 쌓은 업과 무관한 행동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수많은 뒷걸음들을 깨닫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타인의 뒷걸음이 나를 기분나쁘게 치고 지나갈 때 그것을 용서할 준비를 해야 한다. 


누군가의 행동이 답답하거나 화가 나더라도... 그래도 용서하는 것밖에 별다른 수가 없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행동이 나랑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관여할 필요도 없다.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역사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반응이다. 내가 화내고 관여해서 그게 풀릴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그 사람이 자기 역사랑 화해할 시간을 주는 게 낫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른다.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사람을 기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 역사와 업(業)에 당하는 정신지배와 고난에서 자력 탈출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실은 이런 말도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의 업 때문에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상담자로서 자신의 역사 트라우마로 자타를 해치는 사람들을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역사적 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도움을 청하지 않는데다가 건네는 도움도 거절하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이미 쓰러진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쓰러진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은 쓰러진 사람들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을 일으키려는 것은 집착이고, 나를 짓누르는 방식으로 내 위에 쓰러진 사람이 스스로 반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자기 행동이 자기 역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자기 역사와 씨름하는 타인을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헤맬 것이고, 인간은 대부분 헤매며, 헤매는 인간은 당연하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역사(업, 業) 하나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오직 깊은 생각과 반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다. 자신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다면 타인의 역사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범죄피해와 같이 명백히 물리적으로 침습적인 사고상황이 아니라면, 본질적으로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영향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나와 나 자신의 문제다. 나와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에 우리 중 뛰어난 누군가가, 자신의 역사를 완전히 감당하게 된다면, 타인의 역사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자타에 대한 보상행위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가서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말이다. 회한과 상처의 잡동사니가 널부러진 자기 역사의 모든 거실을 다 치우고 나서도 그 바닥에 맨 처음부터 깔려 있던 카펫이 '인간애'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참 기쁠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그런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Photo by Jonathan Borb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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