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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31. 2022

갈등이 문제가 아니다.
도덕적 갈등을 이끌어라.

우리 시대는 도덕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메시아는 "당신"이다.

수많은 담론의 현장에서 오늘날 우리 시대를 '갈등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때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혐오의 시대, 분열의 시대, 극단화의 시대, 필터 버블의 시대…. 하지만 나는 요즘의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갈등'의 부상과 확대라고 간주하거나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갈등'이 우리 시대의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문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문제를 지나치게 추상화시키기 때문이다.


'갈등'을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로 짚는 것은 두 가지 지점에서 과도한 추상화를 초래하고, 그러므로, 실제 문제를 덮는다. 그 까닭은 첫째로, 인간의 조정 및 의사소통의 방식 중 하나이며 그 결과 중 하나인 '갈등 그 자체'를 제거하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박멸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도전해야만 하는 질병 · (사회적)장애 · 차별 · 폭력 · 빈곤 · 해충 등과의 싸움과는 불가능의 종류가 다른데, 전술한 불가피한 싸움의 대상들은 구체적인 퇴치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예를 들면 모기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하수관에 대한 방제작업을 하면 되고, 빈곤을 퇴치하기 위하여서는 인력개발법과 생계급여법에 대한 조치를 취하면 된다) 싸움과 갈등 그 자체는 원인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개입 방식 중 하나이므로,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은 소용없으며 불가능하다. '거친 욕설 덜 쓰기 캠페인'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 까닭은, 갈등을 제거하겠다는 발상은 갈등의 원인인 인간의 부당한 고통과 불편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과 전혀 상관없으며, 때로는 그 갈등을 격발시킨 원인 문제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갈등은 인간의 행동이 촉발한 것이고, 인간의 행동은 원인 자극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며, 부정적 반응을 제거하기 위하여서는 원인 자극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갈등을 그만합시다. 혐오를 그만합시다' 라고 말하는 자들은 원인 자극을 인지하지 않고 오히려 덮어두려 한다. '갈등'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갈등을 촉발시킨 원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갈등 그 자체'에서 찾는다. "싸우지 말고 화해해!", "전쟁하지 말고 평화를 지지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겉보기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 침략자에 맞서서 방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말은 "빨리 항복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맞춰주면서 평화를 유지하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한국인들은 그 자신이 민족주의적 저항(수많은 한반도 침략사)과 항쟁(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그리고 방어전쟁(1950.6 한국전쟁)과 심지어 시민항쟁(1980.5 광주항쟁)과 노동투쟁(1987~1989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적 유산 위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싸움과 남의 항쟁에는 너무나 쉽게 "싸우지 말고(=투항하고) 평화롭게 사세요." 라고 말한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좋고 조선 독립 운동도 좋으면서 홍콩과 타이완 독립 운동은 폄하한다. 팔로군과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너무 좋고 사회주의 · 공산주의 노동자 무력혁명을 주장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방어 항쟁은 모욕한다. 싸움은 나쁜 것이므로 싸움을 멈추고 그냥 항복하면 공동체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하여 '이완용'이라는 상징적인 매국노를 통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대해 싸움을 멈추고 일터로 돌아가라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일터로 돌아가야 할 당사자이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폭력과 차별에 저항하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는 갖은 트집을 잡아 폄훼한다. 


한국인의 이런 이중잣대는 큰 잘못이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남의 민족에게는 항복하라고 하고,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못박은 사람들이 민족의 동일성 추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민족주의자에게도 탈민족주의자들에게도 각자가 임해야 할 방어전쟁과 저항투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임하는 싸움과 같은 싸움을 하는 먼 곳의 전사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존경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싸움을 그저 단순한 서로 기분나빠하는 두 사람의 입씨름과 모욕행위 정도로만 생각한다. 자기 일, 자기 상처, 자기가 당한 폭력과 흉터가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함부로 말하는 것은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이 정책을 만들며 그 정책이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가 타인의 싸움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그 싸움 속에서 피해자이고 방어자인 사람들을 지지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사회적 싸움은, (교통사고 전문가) 한문철 변호사가 50 : 50 이라고 시원하게 일갈하는 쌍방 과실 교통사고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갈등 상황에는 단순한 감정싸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의 구체적 인권침해, 사망사건, 산업재해, 불안, 공포, 박탈, 외로움, 폭력, 차별, 성폭력, 경력 단절, 독박 육아, 증오범죄, 증오발언, 기본권 박탈, 장애인 방치와 인권침해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감정을 촉발시키기는 하지만, 감정 그 자체가 아니며 감정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시되는것도 아니다. 그런 사건들은 그 자체로 한 인간에게 피눈물을 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 주로 사건의 피해자들과 당사자들은 - 저항한다. 차별과 폭력 등의 심각한 사건들을 촉발한 주요 인물 또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 그런 사건의 가해자들은 증오받으며, 겉보기에 잠재적으로 가해 당사자가 됨직한 사람들은 경계받는다.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해서. 예를 들면 n번방 사건에 있어서는, n번방에서 죄악을 저지른 수십만명의 한국 남성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피해자 또는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은 가해자와 가해 가능성이 충분한 인간들을 증오한다. 그 증오는 원인이 문화적 · 제도적으로 제거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증오는, 자신을 향한 증오에 불쾌해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추궁당하지 않을 자유'(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를 부르짖는 추궁당하는 가해자들이 갖는 반발심과 기득권 수호의 증오심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가해자들의 도덕적 역겨움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갖는 가해자에 대한 혐오와, 추궁당하는 자들이 자신이 두르고 있던 기득권의 보호막에 감히 도전하는 보편인권의 요구자들들에게 갖는 혐오는, 둘 다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다른 여타의 갈등, 증오, 공격성, 분노도 마찬가지다. "여성에게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그런 당연한 것에 반발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과, "여자들은 성폭력 당해도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썅년들아"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증오와 분노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그 두 이글거리는 감정과 행동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같지 않은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헌법적으로 같지 않다.


그러나 요즘 이 시대가 "혐오의 시대", "갈등의 시대"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분노를 같은 것으로 보며, 부당한 공격자와 정당한 방어자가 뚜렷이 존재하는 싸움을 그냥 산책 나와서 마주친 개들이 견주와 상관없이 으르렁거리는 '짜증의 표출' 정도로 가벼이 여긴다. 그 싸움의 원인이 되는 진짜 사건, 진짜 피해당사자, 진짜 고통, 진짜 상처, 진짜 흉터에 대하여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무사유(無思惟)이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의 사건이 문제다. 혐오가 문제가 아니라, 정당한 혐오를 일으키는 부당한 인간들의 못되고 혐오스러운 행위가 문제다. 싸움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을 되찾아야만 하는 오늘날의 제도적 차별과 방임 그리고 폭력이 문제다. 불만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불만을 촉발하는 누군가의 반사회적 행동이 문제다. 시위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 정도에 해당하는 당연한 공공서비스의 제공을 말로 요구할 때 알아듣지 못하고 '휠체어로 지하철 타기 운동'을 해서 준비되지 않은 휠체어수송능력이 폭발한 장애인이동권시위가 집행되어야만 부랴부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우리 얼빠진 한국 시민과 그 정치적 대표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이 모두 옳다. 나는 이대로 사는 게 너무 좋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주어진 어떤 차별과 기본권 침해도 '원래 마땅히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못된 사고방식…. 나는 세상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퇴행적인 사고방식…. 난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으로서 내 이익을 지킬 권리가 있으므로, 내 재산을 조금이라도 할양하라고 요구하는 자들을 욕설댓글과 여론 형성을 통해 제압할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여기는 반사회적인 사고방식…. 이 비도덕적이고 공격적인 사고방식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을 사회적 피로와 연대의 해체로 몰아넣는, 혐오와 갈등의 구체적인 출처이며 원인이다.


왜 사람들은 도덕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권리만을 이야기한다.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 사회적 약자를, 여성을, 장애인을, 2차노동시장노동자를, 외부노동시장노동자를, 산모와 어머니를 닥치게 할 권리!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조금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반납하지 않을 권리! 혐오발언과 파괴적인 대중 선동을 일삼고, 그것을 발언의 자유로 보장받을 권리!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을 내 눈앞에서 보지 않을 권리 - 왜냐하면 걍 내가 보기 싫으니까요! 여기에 어떤 윤리와 어떤 사회성이 존재하는가?


남성들이 역사와 현재를 통틀어 여성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조금도 추궁당하지 않을 권리! 명예훼손 고소와 맞고발로 남의 정당한 주장을 막을 권리! 자신이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권리! 자신이 주장하는 권리행사의 구체적 내용이 띠는 인간적 · 도덕적 정당성과 그 실질적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결과적으로 못된 행동을 '행위 일반을 형식적으로 보장한' 법적 자유 개념으로 정당화할 권리! 여기에 어떤 공공성과 공화국의 긍지가 존재하는가?


도덕과 진정한 인간적 정당함은 간데없고, 방어할 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다. 싸움에 당당히 임하는 항쟁과 바로잡음의 높은 이상은 간데없고, 그냥 '싸움'만이 강조되고 있다. 싸움의 내용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저항전쟁과 침략전쟁이라는 상이한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행위들이 '전쟁'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섞여서 동시에 비판된다. 그 전쟁이 멈추면 전쟁할수 없는 저항과 전쟁이 아니어서 더욱 유리한 침략이 존재할 뿐일 것인데도.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혐오로 얼룩지고 있다' 라는 말을 하루빨리 지면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혐오로 얼룩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피해자들 · 약자들 · 소수자들이 겪고 있었던 인생의 고통과 얼룩이 이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드디어 분노하기 시작했고, 도덕적으로 열등하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며 윤리적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드디어 정당한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갖기 시작했고, 이렇게 치고 올라오는 이글거리는 정의의 감정에 놀란 가해자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를 위한 혐오'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평화가 있는가? 평화는 불가능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지 말라는 주장은 틀렸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실존한다. 납치범과 피랍자를 어떻게 통합하는가? 피해자가 가해자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움은, 이 혐오의 시대는, 이 정의로운 혐오의 시대는, 도덕적으로 파탄하여 혐오받아 마땅한 자들의 행동 변화가 있어야만 끝난다. 예컨대 여성혐오가 끝나면, 여성혐오자들에 대한 혐오스러운 시선은 철회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파탄한 자들이 마음속 깊은 차별과 증오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그런 표현을 억제함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비난받거나 증오받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도덕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혐오받지 않기를 바라는가? 혐오는 철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도덕성을 가질 때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혐오는 시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지식인들과 글 좀 읽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이 정의로운 방어전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양비론, 오직 양비론 뿐이다. 운동의 정당한 도덕성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고, 이 세상의 도덕성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이 어떤 반발심을 키웠는지에 대해서만 공격한다. 왜 PC를 해서 그러냐! 왜 남자를 욕해서 그러냐! 심지어 많은 페미니즘 내부비판가들조차,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더 나은 도덕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순응성을 갖기를 바란다. 머리도 기르고, 예쁘게 하고 다니고, (여성 바이섹슈얼들은) 남자도 사귀어서 페미니스트들이 문화에 순응하는 친사회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말려든 것이다. 페미니즘이 도덕과 윤리에 대한 세계관이 아니라, 그냥 연애시장에서 숏컷이나 하는 패션운동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파간다에 말려들고, 심지어 그런 이미지를 거스르지 말 것을 내부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큰, 훨씬 큰 도덕적 우월성과 압도적인 근거중심 사회학 설득 체계를 보강하자고 격려하는 대신에….


언제부터 사회운동에 대한 내적 비판들이 이런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는가? 왜 페미니즘에 대한 도덕 바깥에 대한 공격에 '응답'하는가? 좋게 말하면 비판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고, 심하게 말하면 납치범을 사랑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반응해서는 안 될 것에 반응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도덕의 이니셔티브를 가져가서 새로운 도덕교육의 깃발을 세우는 대신, 적의 탈-도덕 깃발 아래 기어들어가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적에게 거대담론이 없는데, 나 역시 거대담론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개별 사건에 대한 비판과 반격은 중요하지만, 사람들을 감동시킬 이념이 없으면 결국 먹고사니즘의 이념에 통합되게 된다. 그렇다고 우파정당들처럼 산업이나 부동산이나 국제 정치외교나 에너지정책 등 먹고사는 문제들을 (잘한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일관된 톤으로 언급할 줄이라도 아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예로 들었으나 다른 모든 진보 사회운동에 이런 문제가 있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그냥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이상과 도덕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드높은 숭고의 파도 앞에,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부끄러움 느끼게끔 압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문제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고 · 자신이 나중에 그 처지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후회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념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념 없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시스템의 디폴트값처럼 '번식주의'의 이념이 깃든다. 최대한 많이 벌어서 최대한 적게 일하며 최대한 많이 번식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벌레 같은 측면을 강화할 뿐이다. 


인간과 벌레의 차이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마음의 유무뿐이다.


우리 시대에는 도덕과 윤리가 필요하고, 도덕과 윤리가 정초하는 가슴 벅찬 이념을 제공해야만 한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공공성을 위해 봉사하고, 역사의 반복되는 과오와 부끄러움을 청산할 시대의 칼날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고 있는가? 인권은, 좌파는, 진보는, 페미니즘은, 사회복지는, 당사자운동은 그런 거대한 청사진에 사람들을 참가시키고 있는가?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처 없는 삶을 의탁할 수 있는 가치관을, 좋은 행위의 윤리관을,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의 도덕관을 제공하고 있는가? 아직까지는, 바로 아직까지는 그런 정신문명의 이니셔티브를 진보운동은 충분하게는 보여주지 못했다. 혹은 가지고 있더라도 충분히 그것을 주된 아이템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정당한 싸움이 '갈등', '혐오의 시대' 따위로 폄훼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지각이 없고 또한 비판적 생각이 없는 저술가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이기도 하지만, 새롭고도 모든 부족함들과 그 솔루션들을 일관된 윤리적 기준으로 연결하는 거대한 세계관을 진보 운동이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도덕으로, 다시 거대한 윤리적 세계 담론으로 돌아가서 모두를 참여시킬 수 있는 통합적 세계관을 설계해야 한다. 특정한 '학파'로 가지 말고, 특정한 이념이나 이론가의 주장을 그대로 끌고 와서 한국의 상황을 '정답 잇기 문제'처럼 대입만 하지 말고, 이론을 수입만 하지 말고, 원점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생 사는 의미를 제공하고 함께 부정의와 싸울 수 있는 공동전선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우리 시대가 단순히 불필요한 갈등과 혐오의 시대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정당한 인권의 회복을 위한 정당한 분노에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하며, 참가하는 모두는 공동체이자 크루라는 공동체 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싸움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싸움은 휘말리는 것이며, 끝날 때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싸움에서 그냥 빠져나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싸움을 싸움이 아니라고, 분노와 증오와 혐오가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데 그런 거는 머리아프니까 없다고 해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도덕이고 윤리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깃발을 세워야 하고, 그 깃발을 적극적으로 휘둘러야 한다. 모두가 도덕성이 위선이고 필요없다고 말할 때, 그것을 훈계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선생, 훈계자,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생질에서, 훈계질에서, PC주의를 부끄러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우리사회에 더 이상 도덕적 가치와 사회 전체가 추구할 멋진 이념 따위는 필요없고,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코인으로 돈 복사하고 개꿀빨다가 고분고분한 배우자 만나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번식주의'의 벌레 같은 본능에 굴복하는 일이다. 


굴복하지 마라. 굴복할 거면 『논어』, 『채근담』, 『성경』과 같은 도덕적 설교들도 다 내다버려라. 『논어』, 『채근담』, 『성경』을 읽고 무언가 조금 더 큰 뜻에 나를 바치고 더 높은 삶을 살아보려는 것이라면, 그것의 핵심 도덕과 윤리를 우리 시대에도 적용할 책임이 있다. 어떤 고전의 가르침도, 고전을 읽기만 하고 실천은 안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고전을 실천하는 길은, 우리가 다시 이 혼란스러운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다시 용기있게 그리고 굳건하게 '도덕', '윤리', '공공성', '가치'를 주장하는 일이다. 다시 도덕에 주목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도덕으로 압도하라. 


메시아가 무슨 유전되는 초능력 같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메시아가 없는 세상에서는 쫄지 말고 본인이 메시아가 되면 된다. 쫄지 말고 정신차려라!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되고, 장애인들은 집에나 처박혀 있어야 되며, 여자들은 무임승차하는 2등시민이라고 말하는 '일베적 인간'들이 드높은 도덕의 이상을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이기는가! 도대체 벌레 같은 인간들에게 왜 주눅드는가! 쫄지 말고 정신 차려라. '번식주의'에 굴복하여 도덕과 윤리를 자기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은, '유저 차단버튼'과 욕설 댓글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릴 수 있을지언정, '너는 얼마나 잘났냐?', '너는 깨끗하냐?'라는 방어기제만을 발작적으로 격발할지언정, 메시아의 진정한 큰 뜻과 도덕적 메시지 앞에 3분도 버티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메시아적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 고작 인터넷의 욕설 댓글과 싸우고 있다. 메시아는 욕설 댓글에 무너지지 않는다. 메시아는 자살하지 않는다. 큰 도덕적 가르침과 영원한 세계관을 품어라. 죽지 않는 메시아가 되라.




Photo by Daniel Krue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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