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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23. 2022

삶이 꿈이라면, 어떤 꿈을 꿀까.

영혼에 대하여

삶이 꿈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우리는 꿈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인격은 꿈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우리는 꿈 속에서도 여전히 평소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평소에 친절한 대상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꿈 속에서 '현실검증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기억'이 없을지라도, 평소에 내가 믿는 가치관과 신념들은 여전히 생생했고, 그 원칙에 따라 꿈의 숲을 헤쳐나갔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황당한 일들이 샘솟는 꿈의 공간에서도, 비록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사라져버려 마법같은 일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의 인격과 가치관만큼은 놀랍게도 여전한 것이다. 나는 그 일관성에 우리 각자 인격의 본질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일관성이, 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전의 나와 아침에 꿈에서 깨고 일어난 내가 동일한 사람임을 보장하는 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삶도 그렇다. 『기억의 뇌과학』을 쓴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하는 인생은 전체 삶의 3%에 불과하다고 한다. 꿈을 거의 잊어버리듯, 거의 대부분의 실제 인생도 잊는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매우 결정적인 선택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심지어 우연적인 계기였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매일매일 기억하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이고, 그 꿈에서 내린 결정이 오늘 나에게 청구되는 방식으로 결정되는 셈이다. 기억에 없는 내 과거 선택이 만들어낸 내 삶은, 오늘아침 내가 '렘수면의 꿈'과 함께 '과거의 꿈'에서 깨어나면서 배달되었다.


내가 한게 맞는데, 기억에 없는, 하지만 분명 내가 했음직한, 나의, 선택. 그 선택들은 과거의 방향으로 그림자처럼 늘어진 시간의 암흑 속에서, 명백한 내 글씨로 작성되어 내게 부쳐진 청구서들이다. 그 꿈 같은 과거들, 내가 꿈에 남긴 기억 없는 행동들이 그리고 그 요금과 대가들이 매일 내 앞으로 청구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업(業)이라고 표현된 것은 아마 그 의미일 것이다. 


과거의 꿈에 사는 동안, 기억할 수 없는, 내 서명이 들어간 흔적들을 얼마나 많이 남겨왔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친절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건넨 사랑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받은 사랑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미안함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구입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음식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술자리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논쟁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경멸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후회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결심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충격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선언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데이트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섹스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성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동성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대화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카톡들…….


그리고 어느날 오늘 깨어난 나는, 내가 과거에 만들어낸 그 모든 항목이 단 하나도 제외되지 않은 - 그러나 동시에 단 하나도 명백히 표기되어 있지 않은 포괄적 청구서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의 맨 앞장에는 물론 바로 어제의 기억과 아침 컨디션이 적혀 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글씨는 흐려지고, 그러나 그 모든 얼룩덜룩한 잉크의 효력은 두텁고 팽팽하다. 번진 잉크를 다만 내가 읽지 못하고 내가 뭐라고 써 놓은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뿐.


현재의 나는 과거에 간섭할 수 없다. 간섭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깨달은 미래의 내가 보기에는 부질없거나 안타까운 몸부림에 불과하다. 우리는 결코 청구서를 쓴 과거의 자신도, 청구서의 내용도 어쩌지 못한다. 나는 그러한 삶의 본질을 보고 일종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하면 그 청구서에 좋은 얘기만 적혀 있을 수 있을까? 딱 과거의 나만큼만 믿음직한 미래의 내가, 사고치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해치지 않을 수 있고,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해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열쇠가 오히려 꿈에 있다고 생각한다. 꿈에서 우리가 기억을 잃었지만 자신의 핵심 가치관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황당한 판타지 세계 안에서도 신념과 윤리의식을 당연스레 지켜왔던 것처럼, 꿈과 꿈 바깥에서도 똑같이 작동하는 자신의 핵심 인격을 잘 키우고 교육시킨다면, 나는 사고를 안 치지 않을까?


나는 가정한다. 밤에 꿨던 꿈들 속에서 타인을 해치지 않고 언제나 성숙하게 행동해왔다면, 아마 어제의 암흑 속에서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암흑 속에서도 성숙하게 행동할 것이다. 술에 취하거나 뇌손상을 입고 판단력에 장애를 입을지라도, 외상을 입고 섬망에 시달리더라도, 평소에 꿈에서조차 타인에게 진실로 마음 깊이 친절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심각한 폐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시험삼아 술을 취하게 해 보는 (=전두엽 활성을 저해시켜보는) 행동은 매우 비윤리적인 행동이지만 목적합리적이다) 좀비가 날아다녀도 위화감이 전혀 없던 비현실에서조차, 일관된 마음가짐과 됨됨이로 그 허황된 세계를 헤쳐나갔듯이, 현실에서 내가 현실감각을 잃을 때도, 꿈에서조차 변질되지 않는 나의 핵심 인격은 나를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행동케끔 할 것이다.


과거를 충분히 기억할 수 없고, 그래서 '삶의 시간상 전체(Chrono-bioholos)'를 장악할 수 없고 그것을 내 판단의 잣대로 삼을 수 없고, 우리는 단지 과거로부터 발송되는 청구서를 받기만 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지금-여기 만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구조적으로 꿈과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 매순간의 단절들 속에서 나를 유지하는, 나를 고유한 나라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바로, 꿈 속에서도 · 꿈 밖에서도 일관된 '핵심 인격'인 것이다.


내가 그 '핵심 인격'을 기를 수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미래의 안개로부터 안전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나의 과거는 나의 꿈과 실질적으로 같기에.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핵심 인격'만이 작동할 것이라는 점에서 기억할 수 없지만 '핵심 인격'만이 작동했을 과거와 실질적으로 같기에. 이처럼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의 통제를 벗어난 나의 무대이고, 꿈은 그 평균적이고 반복적인 작동방식을 암시하는 시뮬레이터인 한, 우리는 꿈을 통해서 나의 불멸의 '핵심 인격'을 계속 시험해보면서 내가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지금-여기'에서의 마음 챙김과 마음 예쁘게 먹고 고운말 쓰기 운동 등으로 나에게 불멸하는 '핵심 인격'을 더 좋게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개별 사건들이, '삶의 시간상 전체(Chrono-bioholos)'를 유일하게 관통하는 개인의 본질인 '핵심 인격'이 반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공장 출고전 제품 충격테스트' 같은 것임을 감안할 수 있다면, 예컨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아주 못되게 굴었던 사건들도, 사실은 그 사람의 '결의에 가득 찬 의식적인 악의'는 아닐 것이라는 - 내가 잘못해서 그 사람이 나를 표적으로 찍은 게 아니라는 - 통찰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핵심 인격'은 '삶의 시간상 전체'를 관통하며 매 순간 도장을 찍듯이 본인의 인간 됨됨이를 복제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격적 본질을 투사할 대상은 무작위로 선택될 뿐이다.


그러므로 타인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의 원인은, 사람이 꾸는 '현실이라는 꿈'에서 그 사람이 '핵심 인격'을 되풀이해서 벌어지는, 순간의 꿈결 속 판단과 행동일 뿐, 어떤 정신이 굳게 결의한 명시적인 진심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많은 상처에서 자유로워진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폭력을 휘두른 이유는 나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 그 사람은 그 때 내 포지션에 있었던 다른 어떤 영혼에게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므로. 


그리고 또한 그렇게 볼 때, 우리가 받은 많은 혜택과 사랑들이 사실은 우연히 얻어진 당첨들임을 알고, 그것이 우리에게서 떠나갈 때 훨씬 더 편안히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내가 받은 사랑도 누군가의 사실상의 꿈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친절과 호의들도 꼭 그 절묘한 조건이 만족되었기 때문만이 아니고 일기일회의 행운(serendipity)때문만이 아니고, 단지 우연한 지상의 무작위성 속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영혼(좋은 '핵심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마주쳤기 때문이므로.


두개골 속의 작은 밀실(chamber). 모두가, 순간과 순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자신만의 작은 방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핵심 인격'을 세공하는 아마추어 보석세공사들이다. 이 지상의 우연이라는 폭풍, 카오스라는 폭풍은, 그 수많은 보석들을 휘젓는 로또 숫자공 추출기 같은 것이다. 당첨은 축하하고 낙첨은 위로하지만, 그 로또 폭풍 그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는 더 이상 섭섭해 하거나 아니면 특별히 찬양할 구석이 없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핵심 인격'의 이슈 - 내 영혼이라는 보석을 어떻게 세공할 것이냐는 관건이다. 


그것만이 이 지구상의 모든 우연과 무작위성에 곱해버릴 수 있는 나만의 변수이고, 모든 혼돈의 장막을 꿰뚫는 유일한 바늘이며, 빛으로부터 어둠으로 들어가서 다시 빛으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실이고, 내가 믿을 수 있고 내가 통제 가능한 '삶의 시간상 전체(Chrono-bioholos)'를 관통하는 유일한 '수동 조종 장치'이기 때문이다. 나의 '핵심 인격'을 잘 가꾸면, 인생의 모든 무작위성과 불안을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불안이 아니라 외로움이 생기는 사람에게 말한다. 나는 혼자인가? 단지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내 손을 떠나 있고 우연적으로 선택되기 때문에 나는 혼자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내가 운전할 수 있어야 내 것이고 내 인연이고 내 사람이라는 망상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났느냐이다. 우리는 어차피 통제가능한 것을 만나도 기껏해야 우리 자신을 되풀이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거울처럼 비춰 볼 뿐이다. 통제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대상이어야 다양성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통제 가능한 대상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오히려 우리의 삶이 풍부해지는 것에 덜 도움된다.


통제 불가능한 대상 앞에서, 통제 불가능한 손님들 앞에서, 우리는 호의적인 손님들에 감사함을 배우고, 적대적인 손님들에 대응하는 방어체계를 더 강화한다. 이 모든 것은 축복까지는 아니라도 기회이고, 단체 수업이고, 과외 수업이며, 가끔은 정말로 축복이다. 그리고 그 당혹감이나 기쁨 속에서, 나를 맘놓고 복제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해법을 찾고자 아등바등하는 고뇌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 - '핵심 인격'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핵심 인격을 더 바람직하고 안정적인 방향으로 세공하고 연마하며 광택을 낸다. 절차탁마(切磋琢磨).


그래서 우리의 삶은 꿈이며, 꿈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현실에서도 반복되며, 그 경험과 해석의 중앙에 있는 프리즘인 우리의 '핵심 인격'은, 수많은 우연과 유사성들 속에서 한 사람의 독립성과 유일성 그리고 대체불가능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며, 환상같이 반복되고 스쳐지나가며 기억조차 할 수 없는 현실들을 유일하게 궤뚫는 실체이다. 그리고 그 실체는 우리가 유일하게 내맘대로 접근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나'의 제어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기억할수조차 없는 꿈 속에서 - 그리고 꿈과 다르지 않은 현실 속에서 - 우리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영혼, 자신의 본질 대로 행동하기에… 우리가 자신의 '핵심 인격'을 잘 가꾼다면, 기억할수조차 없는 삶 속에서도, 심지어 기억을 잃은 삶 속에서일지라도, 그 97%의 암흑시간 속에서라도, 매일매일 내가 그 긴 세월동안 일관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세공한 내 인격의 보석 렌즈가 수많은 꿈결 같은 순간의 장면들에 내 영혼의 홀로그램을 투사해줄 것이다. 


명상 스승들께서 '나'는 지금-여기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삶의 시간상 전체(Chrono-bioholos)'에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의 '나'들을 원큐에 조정하는 유일한 접근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영역을 나는 조금은 더 넓게 간주하고 싶다. 꿈결의 한 장면에 투사된 내 영혼의 홀로그램이라고 한들, 그것이 왜 내가 아니겠는가? 꿈이든-꿈같은 현실이든 그 순간순간 행복했고 또한 결단하고 가끔은 멋있는 행동을 했던 내 그림자들이 왜 내가 아니겠는가? 그 꿈결들 사이에서 분주한 수많은 잊혀진 나들도, 과거와 미래에 분명히 실존한다. 지금-여기에서 땀과 눈물로 세공해내어야 하는 자신의 영혼만큼이나 아름다운 실체로.




'영혼에 대하여'







Photo by Bryan Goff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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