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Feb 17. 2023

사랑할 결심, 사랑의 긍지

"그러므로 사랑은 넷이서 하는 것이다; 나와 내 사랑, 그와 그의 사랑"

나는 오늘 진정한 사랑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 우린, 사회의 관습보다는 사랑하는 대상 자체,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나와 별도로 존재하는' 내 사랑에 대해 더 깊은 경청과 존중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연애를 하고 싶은 거에요, 사랑이 하고 싶은 거에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 사람은 사랑을 마음으로, 연애를 행동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연애라는 행동을 통해서 사랑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저, 연애로 시작해 깊이 가면 더 깊은 연애를 얻을 것이고, 사랑으로 시작해 더 깊이 가면 더 깊은 사랑을 얻을 것이다. 즉, 연애와 사랑은 그 현상과 범주에 있어서 완전히 개념적으로 별개의 행위이자 내면의 역동인 것이다.


연애는 사회가 준 옷이고, 사랑은 나의 태어난 그대로의 알몸이다. 알몸으로 사회가 준 옷을 입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옷이 나의 알몸이 되지 않는다. 사회의 옷을 거부하고 알몸 그대로 존재한다고 해서,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의 옷을 지어 입을 때, 사회의 옷은 나에게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예복에 불과하다. 즉, 사랑의 형식은 사랑의 주인인 내가 언제든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이며, 직접 만들기에 누구보다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가서 사랑의 목소리에 정말로 귀기울일 수 있다면, 연애가 아니라 사랑으로도 충분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고 (운좋게도) 상대도 나를 정말로 함께 가고 싶다 여기고 사랑하게 되면, 함께하는 생활을 보존하는 최적의 합의점을 찾게 되고, 특별한 배려와 양보에 대한 추가적 보상지점을 찾게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유무이지, 그 사랑이 유지될 것이라는 '관찰로서 정립된 이론' 즉 '믿음 아닌 앎'의 유무이지, 사랑을 얼마나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인정받는지가 아니다.


사랑은 연애라는 '만남의 형태'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다. 사랑이 없어도 연애는 '수행'가능하고, 있어도 '수행'가능하며, 있다가 없을수도 없다가 있을수도 있다. 사랑과 연애는 상관관계가 있을 뿐 직접적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수반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연애란 하나의 미리 규정된 행동 양식이며, 행동 양식이란 문화적 모델이고, 문화적 모델의 다른 이름은 관습이다. 그리고 관습은 아비투스(habitus)이다. 연애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내가 연애를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원점부터 스스로 재규정하지 않은 개인간의 연애는 그 사회의 연애상을 규정하는 아비투스를 따르기 쉽다.



아비투스의 유혹


허나 안타깝게도 아비투스는 개개인의 욕구충족을 위해 정밀히 디자인된 것이 아니며 그것을 포괄적으로 대변한다고 믿어질 뿐인 관습이다. 그래서 욕구충족을 위해 아비투스가 제시한 길을 따른다면, 진정한 욕구충족보다는 자신이 그 욕구를 충족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행위를 반복하기 쉽다. 우리는 이것을 의례라고 부른다.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이 정말 와서 제삿밥을 먹는가? 그것은 사실 조상 그 자체도 조상에 밥 주는 행위도 충족하지 않으며 단지 그것을 서로가 수행했다는 '정신적 토큰'만을 발행한다.


아비투스에 의한 행위는 의례를 주고받는 것이며 의례를 주고받는 것은 화폐교환 혹은 용역계약의 측면이 있다. 마치 제사를 수행하는 사람이 제사를 지켜보는 사람에게 "이보시오 나는 효를 다하고 있소" 라는 '토큰'을 발행하고, 제사를 수행하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당신의 효자됨을 인정합니다"는 '토큰'을 발행하여 그 둘을 맞바꾸는 것과 같이. (정작 제삿밥 먹을 조상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와 같이, 연애는 사랑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느정도의 사랑으로부터의 창발과 어느정도의 아비투스가 뒤섞인 형태이며, 외로운 사람이 가장 즉각적으로 집어들기 쉬운 거리에 놓여있는 '법(자신이 진정으로 찾는 진리)보다 가까운 주먹(즉각적으로 툭 떠오르는 사적 의견)'인 것이다.


연애라는 의례는 사회 곳곳에 그 견본품과 칭송이 넘쳐나기에 덜컥 따라하기는 쉽다. 또한 연애라는 의례로부터 개인이 만족을 얻기 위하여서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사랑 방식을 용기있게 표현하고 서로에게 맞춤화된 관계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대신에, 의례가 규정하는 전형적 절차를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이 의례의 함정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쉽기 때문에; 훨씬 더 적은 사랑에 대한 기투(企投)와 · 상대의 선량함에 대한 확신과 · 소통가능성에 대한 선제적 신뢰와 · 솔직함이 주는 부끄러움을 견딜 용기와 · 스스로의 진정한 욕구와 그 정당성을 돌아보는 반성적 사고와 · 전통관습에 대한 철학적 따져묻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리고 후자를 한 번 시작했다면 그것이 제공하는 나름의 만족감으로 인해 '내게 맞지 않는 기성제품'의 크고작은 불편감에도 불구하고 전자까지 파고들 갈증을 못 느끼기가 쉽기에, 의례를 시작한 사람은 그 모노레일 위에 얹힌 관람차를 따라 미끄러지듯 그리고 떠밀리듯 삶을 살아갈 위험이 크다.


고유한 사랑의 모습을 찾는 것이 복잡한 고뇌와 소통을 요구하듯, 의례 절차 위에 단순히 올라타 있는 것도 공짜는 아니다. 의례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옷(규범)과 옷(규범)의 만남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역할모델이 될 것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계약의 성격을 띤다. 또한 그 계약에서 개인의 '연애 행동'은, 행동을 연애와 유사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마음 속 사랑의 힘과, 사랑을 자기가 대변해주겠다며 거칠게 주장하는 의례의 힘 양측에 의하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동된다. 그러나 의례 따르기를 거절하고 사랑을 할 때, '사랑 행동'은 오직 사랑할 결심에 의하여 제안되고 수락되는 대화를 통해 고유하게 형성된다. 의례가 아닌 사랑은 어떤 역할규범도 없이, 자신이 결심한 사랑의 행동을 한다. 사회의 기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위하여,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현재의 기대마저 넘어 미래의 기대를 충족하는 결단을 내린다.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얼어붙은 눈물의 겨울을 준다고 해도.



내 안에서 따로 숨쉬는 사랑


외적으로 주고 외적으로 받아 충족되는 것은 거래라고 한다. 외적으로 주고 내적인 동기에 의하여 충족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한다. 뭇 사람들이 사랑을 신비롭다고 하는 이유는, 그리고 메인프레임 종교들이 주로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사랑의 이 예외적 불균형성에 있다. 사랑은 내적으로 추동되고 사랑했다는 사실에 의하여 보상된다. 사랑이 내적으로 채워지는 과정은 정말 놀라운데, 사랑은 혜택을 줌으로써 '사랑하는 대상이 보다 강화되었다' 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스스로에게 충족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응답을 받으면 그 사랑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겠지만, 내가 받거나 받으리라는 기대가 없더라도, 상대방이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충족되는 사랑의 행동.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동기가 거의 모든 인간에게 씨앗으로 탑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그 씨앗은 심지어 긴 마음상처의 겨울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봄에 마치 춘화처리된 종자처럼 더 꿋꿋이 발아한다. 더 큰 감사와 놀라움으로.


그래서 사랑은 진리의 추구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진리란 '사실 그 자체'를 일컫는데, 이 사실 그 자체는 제빵에서 정확한 계량을 추구하는 '과학적 진리'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내 시(詩)나 선물이나 편지를 읽고 그 사람 안에서 작은 감동과 기쁨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담담히 홀로 아는 '섬김의 진리'일 수도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갖는가? 내가 추구하는 진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실임을 귀하고 놀랍게 여기고, 내가 그것을 귀하게 여김을 누군가가 칭찬해주지 않을지라도, 그 가치있는 사실 혹은 누군가의 감동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그것만으로 보상받는 것이다.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내가 아는 것. 앎을 통하여 홀로 있어도 충분히 만족하는 것. 그것이 사랑과 진리의 공통점이다.


사랑이 내적인 추동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개인 속 역동이라는 점에서, (마치 칸트의 물자체 논의처럼) 외부 대상과 사실상 격리되어 자라나는 온실 안의 식물 같은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단지 '통 속의 뇌'처럼 완전히 자폐적인 성격을 띄는 것은 아니다. 나와 나의 사랑은 대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 관해 말하고 사랑은 우리가 낭만이라고 비웃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한다. 사랑의 의견은 언제나 일관된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게 헌신하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헌신에 대한 대가와 보상을 갈망하는 고리를 홀로 담담히 끊어내고, 심지어 사랑이 (사랑의 대상에게) 거부당하였을 때 내가 여기서 철수하는 것이 사랑 대상의 최대이익임을 알고 그 최대이익을 성취케 하기 위하여 사랑 그 자체를 철수하는 놀라운 '헌신적 철수' 마저도 결행한다.


그래서 사랑은 가슴 속 온실에 홀로 자라는, 상대에게 선물할 씨앗을 생산하는, '필요시 자살할 준비가 된 해바라기'인 것이다. 이 비유는 단지 외로운 사람의 짝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고중세근대철학의 쓸모를 보존서고 관짝으로 걷어차버린 현대 심리학계가 그러나 아직까지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 칸트의 물자체 모델을 피하지 못하는 우리 모든 '두개골 안에 유폐된 가슴'이 수행하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존주의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갈망을 꺾고, 그 심장을 뚫고 스스로에게 야속하게 자라난 자신의 사랑 그 자체에 책임지는 실존적 삶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넷이서 하는 것이다; 나와 내 사랑, 상대방과 상대방의 사랑.


 

사랑의 육체성과 상호성이라는 측면


여기서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행동은 함께 하는 것이지 않은가?', '상대방에서 사랑이 오는 것도 중요하지 않는가?' 인정한다. 물론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을 바라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삶 속에서 누려진다. 만약에 서로가 상호적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며, 삶의 모든 구질구질한 슬픔과 자잘한 통증들을 한 순간 아득한 감사와 경이의 연료로 승화시키는 개벽의 빛이 된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의 삶과 그리고 사랑의 삶은 별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의 결정과 상대방의 응답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시뻘겋게 데워진 우리 집 난로가 내 소유이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듯 사랑은 태연히 자기 자신에게 새겨진 '설렘의 구조'를 수행하고, 나에게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한다. 나는 사랑의 결정을 존중하여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것이 때론 암흑 같은 기다림과 보답 없는 헌신일지라도.


'사랑이 하는 계산'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적의 헌신에 대한 계산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고려만을 나에게 보고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 자신의 이익 고려를 얼마나 넣을지는 내가 나의 사랑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나의 단기적 갈망 해소 욕구를 얼마나 통제할른지에 달려있다. 사랑 안에서는, 심지어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상처마저도 '사랑의 괄호' 안에서 무화된다. 내가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나에게 상처주는 그 특성에 대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귀여운 것으로 여기고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의 장점과 하나의 셋트라서 부분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와락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보상 없음'을 넘어 '상처 받음'까지 보쌈처럼 싸서 소화시킬 수 있다.


물론 사랑은 다른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조건들과의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로 사랑은 섹스를 수반하고, 섹스 역시 어느정도 사랑을 수반한다. 또한 대상과의 성적인 접촉이 인지되는 원본 사랑과 매우 유사하고 행동상의 상당한 교집합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 이것이 사랑을 찾는 외적 매력 탁월인들이 성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주된 이유일 것인데 (고맙게도 우리는 그런 슬픔을 면하였지요) -  또한 섹스는 사랑을 증폭하며 '주관적 사랑의 인지'를 증폭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 중 하나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사랑과 섹스 사이 담론은 거의 대부분 둘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동반관계 혹은 극히 높은 공변량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둘 사이의 역동에 주목해왔다는 것이며, 사랑과 섹스 사이에 서로에게 어떤 방향성을 가진 화살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사랑과 섹스가 '함께 존재한다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따로 존재할 수 있으며', 함께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처럼 본질에 있어 하나이고 위격에 있어 둘이 아닌, 본질에 있어서 둘이라는 사실이다. 둘 모두 서로를 촉발할수도 유지할수도 증폭할수도 있지만, 애초에 사랑은 섹스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와, 나의 신념과 이해관계를 넘어, 스스로 충전되고 발진하는 - 마치 핵연료봉이 삽입된 원자로처럼 -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마음 한 켠의 뜨겁고 외딴 방'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의 이해관계는 나의 이해관계와 다를 수 있다. 사랑이 하자는 섹스를 여건상 못할 수도 있고, 내가 하자는 섹스를 사랑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삶과 사랑의 삶이 근본적으로 분리된 것이고, 인간이 결코 스스로 달아오르는 핵연료봉을 손으로 만질 수 없듯 나는 사랑의 뜨거운 해류를 느낄 수 있을 뿐 그것을 쥐어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내게 주는  - 사랑의 긍지


그렇다면 사랑은 오직 가슴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이 간택한 상대방에 대하여 수행하는 일방의 희생인가? 사랑받을 가능성을 낚으려 시간의 강물에 드리운 기다림의 행위인가? 만약 그랬다면, 나는 그것을 그냥 희생이라고 불렀지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공동체의 일원)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이라는 독특한 추동만이 사랑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주인을 시켜 사랑의 대상에게 혜택을 주게 하지만, 사랑을 품은 자에게도 명백한 혜택을 준다. 사랑이 그 대상을 기쁘게 하는 방식은 그를 사랑하는 자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지만, 사랑이 자신의 주인을 기쁘게 하는 방식은 그가 자기 마음 속에 사랑이 숨쉬고 있다는 것에서 자신의 긍지와 힘을 확인하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즉, 마음껏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 그 자체에 대하여 자체적으로 축복받는 것이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능력이 나에게 있음'이라는 자기확인을 통한 긍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존감과 선택의 힘을 준다. 자아상으로서의 자존감과, 행동역량으로서의 선택의 힘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로 자리매김한다. 내가 확고하게 사랑 주는 능력이 있다면, 심지어 사랑을 받지 않아도 사랑을 먼저 줄 수 있는 사랑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스스로에게 갖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강력한 보물을 내가 소유하고 있어서 그 누구의 가슴에 비추어서도 황폐하지도 가난하지도 냉혹하지도 않다면,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면, 나는 고귀한 사람이다.


세간에 연애나 사랑에 대한 담론이 수없이 많음에도, 그것의 태반은 슬프고 아프고 부정적이고 구질구질한 부정적인 내용의 표현 또는 재현인 까닭은, 사실은 우리 사회가 다루는 '연애' 혹은 '사랑'이라는 것이 사실은 인간 내면에 거처하는 사랑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그것의 '사회화된 표현형'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1/3 정도, 아비투스가 1/3 정도, 그리고 늘 점잖게 빙빙 둘러 표현해야만 하는 대중매체 특성상 '연애' · '사랑'이라는 간판을 달아놓았을 뿐인 섹스 이야기가 1/3정도 뒤섞인 비균질한 혼합물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손상된 애착 이야기, 밥상 차리고 빨래 널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빨리 넣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 2세를 낳고 싶다는 이야기, 심심하다는 이야기, 말동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사랑이 뭔지 모르지만 남들 다 한다니 나도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빙빙 둘러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추구들은 언제나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떤 긍지나 충만함이 함께하기 힘들다. 사랑의 이름으로 내게 결핍된 것을 찾았을지라도, 그것이 내게서 박탈된다면 나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다', '사랑은 아프다'고들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자신에게 선물하는 굳건한 자유와 긍지


그러나 가슴 속의 핵연료 격납용기처럼 단단하고 뜨겁게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은, 어렵지 않고 쉽고, 아프지 않고 충만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에는 ❶사랑 받기를 갈망하는 대신 사랑을 줘 버리기로 결심한 데서 오는 자유, ❷나에게 사랑할 능력이 있음에서 오는 긍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히 누군가의 관심과 애착을 갈망할 때 그 대상에게 을(乙)이 되고 끌려다니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전전긍긍하게 된다. 내가 그에게 애착을 바란다면, 그에게 애착을 받지 못하는 나는 결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는 대신 내가 과감하게 진정한 사랑을 주기로 결심할 때 인간은 강자가 된다. 내가 그를 위해 사랑을 주기로 - 줘 버리기로 하는 한, '사랑할 결심'한 한, '사랑 마음 의도'를 내는 한, 그리하여 그가 나를 슬프게 하는 측면을 포함하여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귀엽게 여기고 있는 그대로 전부 다 사랑하겠다는 '진정한 사랑'의 집행을 결의하는 한, 나는 사랑의 주인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긍지와 자유를 갖게 된다. 갈망하는 자는 끌려다니는 약자가 될 것이며, 대상에 대한 갈망을 욕망마저 유예하는 사랑을 결단한 자는 자유로운 강자가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선물이고, 마음껏 주고 베푸는 자유를 상징하는 선물이고, 내가 자발적으로 주는 선물이기에 완전한 주체성과 통제권과 이타심을 상징하는 나의 긍지가 된다. 내가 받아야 했을 마땅한 인정과 사랑의 형태를 타인에게 갈구하는 대신, '내게 필요한 따스함을 다 받고 살아오지 못했을지라도, 그 결핍을 통해 삶에 어떤 형태의 사랑이 필요한지 알았노라' 선언하고 바로 그 사랑을 내 가슴에서 꺼내 타인에게 듬뿍 주고, 그 주는 과정에서 내가 낳은 나의 사랑을 만져 봄으로써, 충분히 받아보지 못했더라도 스스로 만들어낸 그 사랑의 온기와 촉감을 가슴으로 끌어안아보고, 어엿히 사랑을 창출할 줄도 아는 자신의 경이를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사랑과 접촉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 사랑받을 가치 충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궁극의 자유, 헤어질 결심의 주인되기


그런 점에서 사랑은 또 한번 진리와 닮아 있다. 마치 정서의 진리를 찾을 때 그곳에 사랑이 있고, 앎을 사랑할 때 진리가 드러나듯. 그리고 진리처럼 사랑 역시 인간을 자유케 한다. 이처럼 사랑은 어떤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갈망으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애착 트라우마와 결핍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의 주인이 될 때 가장 강력하게 얻게 되는 자유는, 바로 '헤어질 결심'이라는 관계의 주도성으로부터 나온다.


사랑을 주는 힘은 사랑을 끊는 힘이기도 하다. 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해소되는 정서적/육체적 결핍 때문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무관하게 그냥 내가 주기로 결단한 사랑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거두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두지는 않겠지만, 내가 거둘 수도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내가 주는 사랑을 거두는 것이 결코 나의 손실이 아니라 타인의 손실임을 인지하는 '냉정함으로부터의 안전감'은 인간을 타인에 전전긍긍 끌려다니는 노예 상태로부터 구해낸다.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끝낼 수 있는 힘이다. 매혹에 빨려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사랑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사랑을 끝낼 용기(=『헤어질 결심』)의 소유자도 나다. 그렇기에 열렬히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을 사랑 받는 나의 왕으로 대우하는 동시에 내가 그 이야기를 스스로 끝낼 능력을 소지한 '전지적 작가 시점'도 소유하게 된다.


내 삶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말했을 때, 그럼에도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선택했을 때, 내게 사랑을 선택할 능력이 나에게도 있음을 깨달은 순간 바뀐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될 때 영원한 사랑의 갑옷을 입는다 ;

나의 사랑은 괜찮은 거야. 네가 거절해도 괜찮은 거야. 네가 가져도 되는 것이지만, 꼭 네가 갖지 않아도 상관없는 거야. 누가 갖고 있지 않고 내가 들고 있어도 뿌듯한 내 삶의 작품이야. 내 사랑이 그렇듯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야. 나는 언제나 이익을 제안하지만, 그게 네 이익이 아니라 생각해서 그 가치를 알아본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도 나는 상관없어. 누군가는 내 생명으로 빚어 만든 나의 마음을 받아갈 거니까. 굳이 내가 울며불며 바닥을 기며 거쳐가는 고객을 최종고객으로 만들 필요는 없는 거야. 받은 마음을 반납하고 싶다는데 굳이 들고 있게 할 필요 없으니까. 필요없으면 돌려줘. 너 말고도 내가 들고 있는 이 사랑에 목마른 사람 많으니까.



최고의 사랑을 위해, 가장 굳건한 개인이 되어야.


여전히 홀로의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정말 거절당하면 어떡하죠? 맞다. 그 거절당할 가능성까지 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태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진실로,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경제적 · 정신적 · 관계적 자립 가능성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혼자 있어도 자신의 가치가 대단한 줄을 알고, 경제적으로 준비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마음 건강하고 고용주나 고객에게 인정받는 전문가·생산자로 홀로서야 한다. 그 과정이 길고 외로울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잘 끝낸 사람에게만 지속가능한 사랑이 찾아온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랑의 역량은, 그 홀로 견디는 자기개발의 터널을 뚫어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마음의 근육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는 언제나 문제 바깥에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생활을 돌보아야 한다. 술·담배·오락을 자제하고, 유능한 개인이 되는 길을 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한다. 독립적인 노동자나 경영자가 되어서 자립하기 전에 함부로 제도적·정서적 결합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독립적인 개인이 되는 삶의 핵심적인 부분 중 일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한 상태라면, 결코 '언제든지 거둘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언제나 자발적 확신으로 가득한 결심된 사랑'을 줄 수 없다. 의지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의지를 받고 마음을 바치는 거래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서로에게 의탁한 운명공동체끼리는 서로가 자기 등을 지켜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진정한 바람이 아닌 무언가조차 울며겨자먹기로 거래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더욱 배우자나 애인 집안의 돈으로 사업을 한다든지 박사과정을 한다든지 아니면 배우자에게 돈벌이를 다 맡기고 육아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물론 아동의 주양육자 애착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 당신이 자녀를 위해 독립된 삶을 희생한다면 굳이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겠다). 자립하는 개인이 되는 길은 그 방향이 아니므로. 언제든 변절할 수 있고 언제든 실망시킬 수 있고, 변절도 실망도 않을지라도 언제든지 사망해버릴 수 있는 인간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에. 요행히 그 위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위험의 존재 그 자체는 나를 타인에게 전전긍긍하게 한다. 무엇보다 사랑과 의존을 혼동하게 한다. 이론적으로 언제든 떠나도 생존가능한 독립의 역량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그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결합하는 가장 뜨겁고 순수한 형태의 결단된 사랑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랑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있어서, 인간의 사랑보다 더 격렬하게 몰두하는 것이 인간의 커리어컨설팅이다. 의존하지 않을 때 독립된 개인이 생겨나고, 개인끼리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거래하지 않는 관계에서, 아무것도 교환하지 않는 관계에서 완전히 세속의 이유로부터 독립된 사랑이 건네어지고, 그 사랑이 세속의 이유로부터 독립된 까닭에 의하여 수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내 소유의 내가 아닌 나의 홀로 들끓는 엔진이고,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며, 세속의 모든 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타인을 향한 순수한 뜨거움이다. 나의 소중하고 진정한 사랑의 첫 마음을 오직 그 자체로 보존하기 위하여서는, 그 사랑과 관련된 행동들이 부지불식간에 세속적인 자원을 받아오는 교환권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세속 속에서 당당히 생존하여야 하고, 번영하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않아야 한다. 홀로든, 함께든, 불안하든, 애매하든, 차갑게 버려졌든, 안정되고 결속되고 더 없이 행복한 사랑의 결속감을 느끼든, 나의 사랑은, 나의 긍지 높은 인간 최고 능력으로서의 뜨겁게 김을 내뿜는 살아있는 사랑이라는, 가슴의 외딴 더운 엔진룸은, 그 드높고 고귀한 능력은, 나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을.



끝.







Photo by Unsplash Tom Beier

작가의 이전글 좌파에 대한 역사적 교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