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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10. 2023

중중무진 카오스에 항복하라
그러나 계속 헤엄치라.

대평등(大平等)에서 대 카오스로 가면서 우리는 좋고 나쁨에서 해방된다.

인생은 한 줄이고, 분기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 하나의 시간선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하나의 일은 예전에 있었던 다른 모든 하나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당신이 겪은 모든 나쁜 일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에 지불된 비용이기도 하다. 당신이 얻은 모든 좋은 일도, 모든 나쁜 일과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당구공 같은 연쇄 사슬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기본적으로 대평등(大平等)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평등(大平等)을 확인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다. 우리는 의식을 가진 물질로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굳이 안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불교 역시 방하착(放下着 - 집착을 내려놓아라), 착득거(着得去 - 집착을 내려놨다면, 그 대상을 다시 짊어지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허상이라면, 일장춘몽이라면, 이 꿈에서 죽음을 통해 깨어날 것을 알면서도 꿈 가운데 최상의 꿈을 추구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여전히 한 줄이고, 분기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름대로 선택을 하고 결과를 바꿔간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여전히 우리의 통제 바깥에서 운명처럼 날아와 꽂힌다. 그 운명은 (혹은 '인연'은) 우리 선택이 완전히 우리 뜻대로 되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인 외부환경으로 작용한다. 외부환경이라는 랜덤하게 요동치는 액체로 꽉 찬 튜브 안에 시공간이 존재하기에 우리 인생은 여전히 한 줄이다. 심지어 우리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는 신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한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결과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신도 시간에 갇혀 있으므로(하나님이 홍해를 안 갈라 본 평행우주도 성경에 적혀있던가?). 우리가 두 시간선을 동시에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여전히 한 줄이다.


우리가 만약에 전능한 신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과거에 내린 선택에 구속당한다. 혹은 과거의 선택에 소외당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진정한 원인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되돌려볼 수 없는 시간의 직진성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그것은 확률밀도함수이다. 확률밀도함수는 있을 수 있는 모든 곳에 무언가는 가 있음을 조용히 섬뜩하게 가리키고 있다. 중중무진의 수채화로. 그러나 신은 모든 것 - 그러므로 확률밀도함수 - 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의견을 가지고, 자꾸 이래라저래라 떠들고, 자꾸 처벌하려 하는 것이다. 가지 않은 길에 초조하기 때문에, 예지 앞에 열등하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탓할 피조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 앞에 지렁이처럼 얇고 긴 4차원 막대기로밖에 존재하지 못하기에.


그러므로 진정한 절대자는 의지가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은 인격이 아니므로 '절대성'이라고 해야겠지. 시간이야말로 신과 인간을 동시에 징벌하고, 동시에 포상하며, 동시에 거두어가고, 동시에 후회케 한다. 그것은 중공업 작업장을 덮치는 산재 위험 확률 그 자체처럼, 아무런 개인적 감정 없는 우주 만물의 자연적 배치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있는 그대로 흐른다. 지나가니까 비키라고, 출발하니까 탑승하라고 말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연히 결과적으로 살리고, 때로는 우연히 결과적으로 죽이고. 우리는 알타미라 벽화에 소를 그리듯이, 어눌하게, 자연의 배치를 모델링해서 확률밀도함수를 그릴 수 있을 뿐. 그것이 진정한 신격의 얼굴이다.


그러므로 신이 인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신이 여러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그들끼리 소통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신경질적인 고독과 불안 때문이다. 신을 상상한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그 고독과 불안을 신이라는 개념에 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더더욱, 확률밀도함수가 아니고, 하나의 길다란 시공간 대롱 안에서 가장 뛰어난 신조차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공간과 힘겨루기 하는 신 지망생을 그만둠으로써, 더이상 시공간을 자기 능력을 제한하는 감옥으로 여기기를 관두었다. 언어와 의식이 없는 확률밀도함수 그 자체도 아니고, 모든 것의 설계도이자 중중무진한 인연의 관측가능한 표현형의 통계적 표현인 확률밀도함수 따위보다 열등한, 발버둥치는 전능의 신도 아니기로 한 인간은, 자신이 공간 안에서 전지전능하지도 시간의 튜브를 벗어나지도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소수의 깨달은 인간들은, 대평등(大平等)이라는 '제어불가능성 수용'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좋은 일은 나쁜 일의 원인이다. 나쁜 일은 좋은 일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시공간은 오직 한 줄로만 늘어놓인 당구대이기 때문에. 단지 뒷 공이 앞 공을 칠 뿐, 앞 공이 슬픔이라서 격발하지 않을 수도, 앞 공이 요행이라서 격발되지 않을 수도 없다. 어떤 인간들은 그것을 단순히 그냥 받아들이고 다음 당구공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수의 깨달은 인간들 가운데 또 다른 일부는, 튜브를 쳐다보다가 문득 자신의 몸을 만져 보았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전히 시공간을 탈출할 자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온 몸이라는 확실한 애착의 대상이 괜히 자유롭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쓸모없게 만들어 주었다. 인간은 몸을 지키기 위해 노동했다. 노동하고 기도하고 고군분투해도 반드시 원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예측불가능한 인연의 해류로 꽉 찬 빵빵한 튜브에서도, 여전히 헤엄은 작동했다. 분명 조금씩은 원하는 곳으로 헤엄쳐 나아갈 수 있었다. 동시에 여전히 해류도 작동했다. 의지와 불가항력이 동시에 작동했다. 


그러므로 대평등은 해석이었을 뿐,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실상은 대 카오스였다. 그것이 모든 책임을 덜어주었고, 모든 행운을 부여했고, 모든 불운을 부여했고, 모든 결과에 위로받을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미래에 의해서 해석이 뒤바뀔 가능성조차 남겨두었다. 대 카오스 속에서, 대평등은 사실 전화위복(轉禍爲福)과 새옹지마(塞翁之馬) 현상 때문에, 나쁜 사건이 좋은 사건을 유발하고 좋은 사건이 나쁜 사건을 유발하는 식으로 모든 사건의 값어치가 상쇄 또는 평준화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결국 다 사라진다는 이유로 분쇄 또는 평탄화될 것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대 카오스 속에서, 대평등은, 좋은 사건이 나쁜 사건의 비용이거나 나쁜 사건이 좋은 사건의 비용이라는 덮어쓰기가 작동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건이 어떤 다른 사건으로 연결될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를 통째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개별 중요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의미부여, 해석, 가치부여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개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판단하기에 최고의 일이 일어났을 때,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 또는 개인에게 임의적으로 떠올려진 몇몇 사건은 일렬로 전부 축복이 되고, 어느 순간 판단하기에 최악의 일이 일어났을 때,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 또는 개인에게 임의적으로 떠올려진 몇몇 사건은 일렬로 전부 안타까운 후회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실상 통제불가능한 미래가 자신에게 격렬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태워 탈진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의적 해석'의 반복학습, 얼렸다 녹였다 하는 '일희일비'의 반복학습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일희일비는 시공간과 달리 인간이 만들어낸 일이었으므로, 인간이 해결할 수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내는 일희일비를 해소하는 길은 바로 '모름'으로 가는 것이었다. 


"좋은 일이네요. 이 좋은 일이 나쁜 일을 불러올까요?" 


"애초에 이것이 좋게 해석될 미래가 올 지, 나쁘게 해석될 미래가 올 지 자체를 모릅니다. 예컨대 좋게 해석될 미래가 온다면, 그 해석을 바꿔놓을 또 다른 미래가 올 지 안 올 지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그저 할 뿐이군요."


"예. 그저 할 뿐입니다."


중중무진 카오스에 항복하라. 치던 헤엄은 계속 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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